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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신계획이 시작되기 약 200년 전 곤륜산맥. 날씨가 좋은 어느 날.

마냥 평화롭게만 보이는 옥허궁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아무도 없나?’

 

건물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왕혁은 발소리를 죽이고 전진하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과 달리 원시천존은 보이지 않는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왕혁은 제 스승이 바쁜 몸인 것에 참으로 감사하며 어깨의 힘을 쭉 빼었다.

 

‘휴우.’

 

시킨 수행은 내팽개치고 낮잠 자고 온 걸 들킬까 봐 걱정한 건 아니다. 솔직히 이 곤륜산의 교주쯤 되는 이라면 자신이 뭘 하고 왔는지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이토록 긴장한 건, 역시 직접 마주치게 되면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지.

어차피 나중에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꾸중을 듣겠지만, 그게 언제더라도 몰래 돌아오는 모습을 발각되었을 때보다는 덜 혼나겠지. 큰 고비는 넘겼다고 생각한 왕혁은 제 거처로 발걸음을 돌렸다.

 

“안녕?”

“으악!”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제 뒤에는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혹시 제가 환각을 보는 걸까. 분명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단 말인가. 게다가 여자애라니. 곤륜에서 선녀들은 대부분 서곤륜에 모여있지,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가 이렇게나 고민하고 있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하는 걸까. 등나무꽃 색을 띈 긴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화들짝 놀란 왕혁에게 말을 걸어왔다.

 

“미안, 내가 놀라게 했어?”

 

비명까지 들었으면서 뭘 당연한 사실을 묻냐고 묻고 싶지만, 왕혁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묻기로 했다.

 

“…뭐야? 넌.”

“나? 나는 담운. 담운이라고 해. 너는? 원시천존 님 제자야?”

 

제가 원한 건 이름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름도 궁금하긴 했지만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대답을 더 듣고 싶었었던 건데.

하지만 원시천존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보아 이 소녀 또한 곤륜의 도사이리라. 그리 짐작한 왕혁은 어느 정도 경계를 풀고 물었다.

 

“그렇다만.”

“그렇구나! 그런데, 여기서 뭐 해?”

“뭘 하냐니,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나야 제자니까 여기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너는 어디서 온 거야?”

 

어차피 서곤륜에서 왔거나 막 인간계서 와 곤륜을 구경 중이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제 나름대로 상대의 정체를 추리한 왕혁은 상대가 정답을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안타깝게도 원하는 답은 들을 수 없었다.

 

“담운아.”

 

평온하고 고운 목소리가, 방금 막 처음 들었던 이름을 부른다.

왕혁은 마치 구름처럼 슬그머니 나타난 여성을 보곤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제 스승 외의 인물과는 거의 마주치지 않는 자신이지만 저 여자가 누구인지는 안다. 선인과 선인 사이에서 태어난 순혈 선녀. 단언컨대 이 곤륜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과 강력한 도력을 가진 인물인, 용길공주.

‘영감을 만나러 온 건가.’ 상대가 워낙 고귀한 몸이다 보니 왕혁은 그런 예상부터 했지만, 그가 주목해야 할 건 공주의 행차 목적이 아니었었다.

 

“스승님!”

“허?”

 

스승이라니. 설마, 저 용길공주가 스승이라고?

제 귀로 들었지만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그가 눈만 깜빡이는 동안, 담운은 용길공주에게 달려가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라지면 안 된단다. 멀리 나가지 않아 다행이구나.”

“죄송해요. 처음 와보는 곳이라 너무 신기해서 잠깐 구경하고 있었어요!”

“음. 하긴. 너는 밖으로 나올 일이 없긴 했지.”

 

‘계속 내 옆에만 붙어있어야 했으니까.’ 슬픈 얼굴로 중얼거린 용길공주는 담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시선을 느낀 것인지 왕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분명, 원시천존의….”

 

뜻밖에도 상대는 이미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걸로 보였다. 제게 아는 척을 하는 공주 때문에 왕혁은 마지못해 고개를 슬쩍 숙여 인사를 받아주려 했지만, 사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왕혁!”

 

멈칫거리며 어설픈 인사를 하기 무섭게, 그의 스승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아, 걸렸다.’ 벼락과 같은 호통에 어깨를 움츠린 왕혁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어딜 다녀오는 게냐! 또 수련을 빼먹고…!”

“빼먹은 적 없어. 명상하고 온 길이니까.”

“정말 명상한 것이 맞느냐? 내가 천리안을 가진 건 알고 하는 소리지?”

“정말이라고!”

 

당연히 거짓말인 건 들키겠지만, 보는 눈들이 있으니 발뺌 정도는 할 수 있다. 손님이 있을 때는 제게 꾸중이 덜해진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왕혁은 뻔뻔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원시천존은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공주와 그의 제자가 보고 있으니 자중해야 한다. 그리 생각한 걸까.

한숨으로 쌓인 감정을 털어낸 원시천존은 제 제자에게 명했다.

 

“후우. 뭐, 어찌 되었든 잘 왔느니라. 나는 용길공주와 할 말이 있으니, 저 아이에게 주변 구경이라도 시켜주거라. 공주의 제자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고.”

“뭐? 내가 왜….”

 

반사적으로 스승의 말을 거역하려던 왕혁은, 제게 바짝 다가오는 작은 그림자 때문에 말을 멈추었다.

기대감으로 가득 찬 새까만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담운은 어떻게 해서든 이 주변을 구경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별처럼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를 차마 무시할 수 없었던 왕혁은 입만 뻐끔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와아!”

 

바보같이 좋아하며 자신을 따라오는 발걸음은 경쾌하다. 왕혁은 그 천진난만한 몸짓에 절로 골이 아파졌지만, 한편으로는 자꾸 고개를 돌리게 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곱상하게 생겼으면서, 겁도 없네.’

 

보면 볼수록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공주의 제자 아니라고 할까 봐 묘하게 우아한 분위기도 있는 것이, 주변의 이목을 사로잡게 만든다.

 

“응?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맞다, 네 이름이 왕혁이야? 혁이라고 불러도 돼?”

“뭐?”

 

대뜸 별칭으로 부르겠다니, 제정신인가. 왕혁은 어이가 없어 반문했지만, 상대의 악의 없는 얼굴을 보곤 포기한 듯 답했다.

 

“…알아서 해.”

“응! 너도 편하게 불러도 돼!”

“아, 그래.”

 

어차피 자신은 애칭을 붙이거나 하는 살가운 짓에는 자신이 없다. 기껏 상대를 부르게 되더라도 이름을 부르는 게 다겠지.

왕혁은 제 뒤를 바짝 쫓아오는 방문객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몇 번 정도 되뇌다가, 이내 걷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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