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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너, 저기 살아?’

 

 

 

*

 

 

 

아, 깜박 잠든 모양이다. 밤늦게 들린 기침소리에 급히 발걸음이 아버지의 침소로 향하고, 확연히 좋지 않은 상태에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자주 불렀던 의원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난 후, 아버지의 상태를 살피던 의원에게서 해가 뜨고 나면 약을 가져다 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안심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채유하는 웅크리고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뻣뻣하게 굳은 몸이 제 생각보다 긴 잠에 빠진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 것치고 여전히 어두운 주변은 아버지의 옅은 숨소리를 제외하면 영 싸늘한 기운이었다. 날이 춥구나. 그런 생각에 유하는 얇은 이불을 찾아 꺼내었다. 이미 덮고 있는 이불 위에 덮는 이불마저 두꺼우면 불편하실테니 고른 이불이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 이불을 덮어드린 다음에 다시 의자 위에 앉았다. 이번에는 다리까지 의자 위에 올려 제 품에 당기며 그대로 끌어안았다. 몸이 약해 돌아가신 어머니와 앓아누운 아버지를 보면 제 명도 그리 길지 않을 거란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아버지도 비슷한 생각이신지 제 혼인을 위해 노력하셨지만 성치않은 몸은 바깥 활동을 오래 하기에 좋지 못하였고, 거느린 하인도 몇 없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당사자가 혼인에 적극적인 모습도 없으니 아버지는 그저 저를 답답하다 여기는 듯하였다. 말 잘 듣는 자식 노릇을 하고 싶어도, 사람 마음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지. 제게 있어 마음에 품은 이는 하나인데, 어찌 그 마음을 버리고 혼인을 다짐하겠는가.

 

 

‘안녕, 너 저기 살아?’

 

 

방금 꿈 속에 들렸던 말을 떠올리며 제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태어나 지금까지 자라길 제가 살던 집은 언제나 이곳 하나였다. 마을과 거리가 조금 있는 외곽을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음에 드셨는지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다. 눈에 띄지 않는다면 숨을 수 있는, 그러나 한 번 눈에 띄면 꼭 고개를 돌리게 되는 집에서 채유하는 살아왔다. 꿈에서 제게 말을 건 이는, 지금은 영 만나기 어려워도 꽤 오랜 시간을 보낸, 제 친우인 손찬오였다. 구불거리는 갈색빛 머리카락과 밝게 빛나는 초록색 눈, 활짝 웃어보이는 입과 제게 내민 손까지. 채유하는 어릴 적에 본 모습이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참, 밝다. 활기차고, 장난스럽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잊을 수 없는 이유는 그저, 아주 어린 날의 사랑이기 때문이었다.

 

 

 

*

 

 

 

손찬오가 화랑이 되었을 때, 그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하했다. 가장 친한 친우의 기쁜 소식이라면 제게도 기쁜 소식인 게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덜컥거린 심장을 괜히 제 손으로 누르며 오로지 축하의 말에 전념하면서도 드는 불안감을,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었다. 결코 드러낼 수 없는 일이었다. 아, 멀어지는구나. 저 사람이 내게서 멀어지는구나. 이 기쁜 날 당장이라도 울고 싶었다. 진골이래봤자 저 사람 하나 잡을 구실 없는 집안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티를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굴 붙잡고 원망해야하는가. 이렇게 태어난 내 자신? 저를 낳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 하다못해 화랑이 된 제 친우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저 자신만 조용히 지낸다면, 아무렇지 않게 지낸다면 그들과 제 사이는 어색하지 않을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화랑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을 바로 등지고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 친우이자 잊지 못할 사랑, 손찬오도 그런 사람이었다. 밝게 웃으며 나한테 반해도 책임 못 진다는 농담을 내뱉던 손찬오였다. 그날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그날이 올 때까지도 그들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었다. 진골이지만 진골 축에 끼지 못한 채 화랑들과 시간을 보내는 건 채유하에게 있어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뒷담은 익숙했고, 친우도 저를 밀어내지 않는다.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손찬오가 어떤 일을 겪고 안대를 착용하기 직전까지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채유하는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밀어내는 건, 적어도 채유하에게 있어서는 갑작스런 일이었다.

 

 

 

‘낭주는 진골이지 않습니까. …나 같은 6두품이랑 놀아서 쓰나. 사람들 눈을 신경 써야지.’

 

 

 

그가 할 말이 아니었다. 채유하가 알고 있는 손찬오는 그러했다. 신라시대, 신분제를 무시하며 살아갈 수 없으나 그는 신분만을 내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달랐다. 김원담에게 말을 거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상대를 신분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렇게 알고 지낸 지, 족히 10년은 넘어가고 있었다. 안녕, 하고 말을 걸어주고 마을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한 저를 이끌어 준 건 다름 아닌 손찬오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제게 신분을 끌고 와 저를 밀어낸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밀어낸다면 순순히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손찬오가 자신을 싫어해서 밀어낸다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는 분명 저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이제 저라고 그를 마냥 친한 척 대할 처지가 아니었다. 가진 것 없이 그를 도와줄 수 없다면, 아무리 진골이라 해도 그의 발목을 붙잡을 뿐이다. 채유하는 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의 앞길을 막는 존재가 되지 않길 바라며, 그가 욕심을 갖고 저를 끊어내는 것이라 생각하며.

 

 

 

아, 밀어낼 거라면 차라리 영영 아는 체 하지 말았어야지.

 

 

 

결단코, 채유하는 손찬오가 제게 안녕이라며 인사했던 어린 시절 이후부터 그를 밀어낸 적이 없었다. 그는 제게 있어 첫사랑이며, 저를 이끌어주는 이였다. 자신이 어떠한 이유로 그를 밀어내는가. 그건 제게 있어 이득이 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저를 그저 버리고 갔다면, 그게 아무리 괴로운 일이라 해도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달라진 게 없었다. 분명 무언가 달라졌는데, 그는 저를 밀어내는데. 여전히 밝게 웃어보이는 웃음과 장난스런 말투, 여전히 제게 닿는 손짓에 반짝이는 초록색의 눈은 이제 비록 하나일지라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는 달라지지 않았으나 우리의 관계는 달라지고 말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지내야했다는 듯이, 손찬오는 제게 선을 그었다.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채유하는 알 수 없었다.

 

 

 

*

 

 

 

“안녕! 너, 저기 살아?”

“응? 응… 저기…”

 

 

짧은 흑발, 짙은 흑안을 가진 채 푸른색의 옷을 걸친 소녀는 한 소년의 말에 제 집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마을 안에는 속해 있으나 거리가 있어 떨어져보이는 그 집이 바로 소녀의 집이었다. 마을 안까지 깊숙히 들어가 놀기에 아직 어린 소녀는 늘 마을과 제 집 중간 사이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다. 이는 소녀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기도 하였고, 거리를 둔 채 바라보는 제 또래에게 쉽게 다가가는 아이들도 거의 없는 탓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 날, 소녀에게 소년이 찾아왔다. 소녀에게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평소와 같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마을을 바라보던 소녀의 위에서 갑작스레 말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소년이었고, 그 아이가 언제 나무 위로 올라갔는지 소녀는 알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소년이 왜 제게 말을 걸었는지, 였다. 소녀는 마을에 가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저를 아는 이가 별로 없을 터였다. 낯선 아이에게 말을 거는 게 저리도 자연스럽다니… 소녀는 소년의 질문에 답을 하면서도 눈을 둥글게 떴다. 저라면 못할 일인데. 소녀의 답에 소년은 활짝 웃으며 손을 뻗었다.

 

 

“어쩐지 잘 못 보던 얼굴이다 싶었어! 난 이 마을에서 모르는 아이가 없거든~”

 

 

그래, 소년은 참으로 눈부신 사람이었다. 그게 햇빛 아래 보이던 모습 때문인지 저를 향해 뻗은 손이 마치 제게 내리던 빛처럼 느껴진 탓인지 소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빠진 순간을 고르자면 분명 그때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름이 뭐야?”

“유하… 채유하.”

“난 손찬오! 찬오라고 불러, 유하!”

 

 

 

*

 

 

 

이제 10년은 족히 흐른 기억이다. 그를 사랑하게 된 일도 마찬가지로 10년은 된 일이다. 처음 만난 이후로도 손찬오는 채유하를 찾아 제 집 근처를 헤매었다. 소년도 소녀를 꽤 마음에 들어했다는 건 후에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알 만한 일이었다. 지금은 저보다 컸어도 어릴 적에는 저와 비슷했던 작은 소년이 집 앞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몇 번이나 숨어서 보았는지. 혹여 소년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결국 제가 먼저 뛰어나가 처음 보았던 나무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기까지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었다.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자면 소년은 여전히 밝은 얼굴로 웃으며 저를 찾아와 안녕, 이라고 인사했었다. 그게 너무 좋아서 인사가 아니라 안녕이라는 말을 그저 따라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렇게 몇 번이고 둘이서만 본 이후에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고 마을로 데려간 적도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전부 지금까지도 연이 닿아있는 이들이었다. 소년은 결국 소녀를 밖으로 이끌었다. 그게 소년이 원했던 일이든, 아니든 소녀는 제게 내리는 따스한 빛을 알고 말았다. 그들은 친우였기에 사이가 좋기도 하였고, 사소한 다툼이나 더 큰 싸움도 있었지만 언제나 다시 마주했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손을 뻗었고, 잡았었다. 그가 화랑이 되어 저와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우리가 손을 잡는 그 시간은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분명 싸우지 않았는데, 누구도 손을 뻗지 않는다. 잡을 수가 없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손찬오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채유하에게 말하지 않았고, 또한 물어볼 수도 없었다. 손 쓸 새도 없이 점점 멀어져가는 빛을 무슨 수로 잡을 수 있을까.

 

 

 

새벽은 그저 흘러간다. 방은 고요하고, 옅어지는 숨소리만 정적에 더해진다. 덮을 만한 이불은 제 아비에게 있으니 찬 기운에 오래 있던 제 몸을 가늘게 떨었다. 아침해가 뜬다고 해도 이 방에 빛이 닿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너는 분명 제게 있어 햇빛과 다름 없었는데, 나는 이 추위에 얼마나 더 몸을 떨고 있어야 하는 걸까.

 

 

 

찬오야, 나는 더 이상 자신이 없어. 네 손을 잡지 않고 밖을 나갈 자신이 없는데. 너는 내게서 멀어지면 전부인 줄 아는구나.

 

 

안녕, 하고 제 안부를 묻는 이는 더 이상 없다.

안녕, 하고 답할 이 또한 이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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