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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파이널판타지14의 ‘암흑기사’ 레벨 30-50 잡 퀘스트 일부 스포일러와 ‘창천의 이슈가르드’ 스토리의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벨 30 잡 퀘스트 스크립트 일부가 그대로 인용되어 있습니다.

*모험가는 아우라 젤라 종족이며 이름은 딱히 나오지 않습니다.

 

 

 

너는 영웅이 영웅이라 불리기 아주 오래 전 그와 마주친 적이 있다.

‘빛의 전사’, 어머니 크리스탈의 목소리를 듣는 자. 별의 의지를 이어받은 자. 바일사르 군단장을 격퇴하고 수많은 신들을 살해한 자- 그의 이름 뒤에 무수한 칭호들이 따라붙기 전에.

‘내’가 아직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을 때. 네가 형체 없는 에테르 덩어리가 아니라 아직 실체 있는 몸뚱이였을 때, 우리의 만남이 있기 전.

네가 대검을 들기 전, 네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어떤 스승과 어떤 사형을 여즉 만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네가 이단자 검사가 아니라, 목적도 신념도 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소년이었을 때 얘기다.

 

너는 길에서 태어나 길바닥에 내던져진 아이였다. 굳게 닫힌 대심판의 문과 그 너머로 보이는 커르다스의 나지막한 언덕. 차디찬 길바닥과 군데군데 금이 간 돌 벽에 둘러싸인 거리가 네가 아는 풍경의 전부였다.

구름안개 거리를 한없이 배회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안개 거리의 골칫덩이요 부산물이라 여겨지던 그런 녀석들은 언제부턴가 한데 묶여 미스트Myste라 칭해지기 시작했다.

미스트들은 이름도, 연고지도, 저를 세상에 내보낸 부모의 정체도 모른 채 -혹은 기억에서 싸그리 지워버린 채- 풍경 속으로 흘러 들어와, 있는 듯 없는 듯 성도의 가장 낮은 곳으로 스며들다가, 어느 순간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다. 제게 부여된 성도, 이름도 없는 아이들은 이 곳에서 스스로의 이름을 정한다.

상실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공포감은 무뎌지다 못해 비정하고 비관적인 무력감이 되었다.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부터 너는 그 세상에서 살아남고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

 

그 아이는, 여느 미스트들이 그러하듯, 갑작스레 안개 거리에 나타났다. 버려졌다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릴 듯 싶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길바닥을 굴러다니는 짐짝과도 같은 신세였다. 그 누구도 그 애가 어디서 왔는지, 무얼 하다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는지 캐묻지 않았다. 모든 존재가 덧없고 위태로운 이 곳에서 생판 모르는 남의 과거사까지 굳이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많아봤자 대여섯 살, 유달리 몸집이 작은 아이는 군데군데 이국적인 문양이 수놓아진 큼지막한 로브로 온 몸을 가리고 있었다. 밑부분이 다 해진 낡은 천 쪼가리를 ‘로브’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얼굴 태반을 가린 천 밑으로 덤불처럼 이리저리 자라난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삐죽 튀어나왔다.

조그만 아이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이내 너와 눈이 마주쳤다. 숯 검댕인지, 드래곤의 비늘인지 모를 검은 조각들이 그 애의 얼굴 끝자락을 덮고 있었다.

 

안녕? 제 쪽을 빤히 쳐다보는 네 시선을 느낀 듯 아이는 말을 걸어왔다. 기가 막힐 정도로 너무나 정석적인 공용어 표준 억양에 또렷한 발음. 그가 입을 뗌과 동시에 울린 한 마디는 단순한 발화를 초월해 네 마음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네 육신을 이루는 수많은 입자 하나 하나에 인사말이 아로새겨졌다.

소심하게 인사를 건넨 그 애는 네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서서히 뒷걸음질치는 네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 네가 몸에 대강 두른 다 해진 거적데기 – 네가 걸치고 있는 그걸 차마 옷이라 부르진 못할 테니 – 를 차례로 바라본다. 맑은 날의 밤하늘을 닮은 짙은 푸른빛 눈동자와 그 주변에서 반짝이는 괴이한 안광이, 이름 모를 의지가 담긴 듯한 낯선 시선이 너를 훑고 지나간다. 네 죄악을 낱낱이 까발리는 이단 심문관의 눈빛과도, 성도의 문 너머에서 울부짖는 무자비하고 극악무도한 용족의 눈빛과도 닮아 있었다.

아이는 얼굴을 덮은 로브를 슬쩍 벗었고, 그 애의 얼키설키 뒤엉킨 검은 더벅머리 사이로….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누가 봐도 뿔처럼 생긴 검은 뭉텅이 한 쌍이 튀어나와 있었다.

뭐야? 사람과 드래곤을 반씩 섞어놓은 것처럼 생긴, 그 조막만한 애에게 네가 처음 느낀 건 당혹감이었다. 다음으로 느낀 건 공포였다. 그 다음으로 느낀 게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조그만 녀석의 시선에 네 마음을 싸그리 읽히지 않으려고, 안개 거리에서 태어난 애들이 가장 잘 하는 걸 했기 때문이다.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는 것 말이다. (네가 그의 힘을- 언어와 마음을 뛰어넘는, 인지의 장벽을 초월하는 힘을 지겹도록 느끼게 되는 건 이로부터 십 년도 더 지난 뒤의 일이다.)

 

사룡의 졸개가 인간으로 변해 우리 사이에 숨어들었다는 소문이 며칠 밤낮으로 돌다가 사라졌다.

누더기 로브 차림으로 하염없이 떠돌던 그 애는 여느 미스트들이 그러하듯 갑작스레 자취를 감췄다. 성도를 떠나 그리다니아 귀곡 부대로 향하는 보급 짐마차 구석에 조그만 불청객이 한 명 숨어들어가 있던 건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다.

이슈가르드는 언제나 그렇듯 여신의 이름 하에 온갖 더러운 일들이 자행되는 생지옥이었다. 지옥도에서 벗어나고자 아무리 몸부림쳐도 너는 안개 거리에서 태어나 바로 그 곳에서 종말을 맞이할 형편없는 소년일 뿐이었다. 네가 지키고 싶었던 사람을 지키지 못했던 그 날 너는 처음으로 네 안의 암흑과 마주했고, 심연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네게 스승이 생겼다.

성도 한복판을 버젓이 걸어다니다 사라진 드래곤족 소문을 들은 신전기사단은 이와 같은 불찰이 재차 벌어지지 않도록 방비를 강화했고, 몇 년 뒤 비슷한 생김새를 지닌 집단이 오랜 여행 끝에 성도의 문을 찾아오자 그들을 싸그리 베어 넘겼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그 날 네게 사형이 생겼다.

 

영웅이 세계를 구해내자 세계는 그를 저버렸다.

여왕 시해자. 배신자. 이단자. 온갖 누명이란 누명은 다 뒤집어쓴 채, 그 사람은 도망치듯 흘러 들어왔다. 그가 지키지 못한 모든 것들이 족쇄가 되어 그를 옭아매었고, 그가 지켜야 할 모든 것들이 켜켜이 쌓여 짐짝처럼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영웅은 커르다스의 한랭화된 기후를 견디기엔 다소 부족해 보이는, 얇은 망토 한 벌을 달랑 머리에 뒤집어쓴 채 중앙고지 벌판을 걸었다. 하얀 눈 위로, 새 여정을 시작하는 발자취들이 움푹 패였다.

새벽의 영웅은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불이 되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시선은 심판의 문 너머 창천을 향했다.

기억마저 끝없는 황혼에 집어삼켜진 저녁, 일각수 문양의 방패가 섭리의 창에 꿰뚫렸고, 지키고 싶었던 이를 잃은 영웅은 절망에 몸부림쳤다. 그가 품고 있었던 슬픔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를 집어삼켰다. 나 – 영웅의 환영 - 는 그 운명적인 날 온전해졌다. 그의 일부이자 그림자였던 내게 비로소 자의식과 의지가 부여되었다.

 

……실은 방금 전에 '결투재판'을 보고 왔다네.

이단 혐의를 받은 검사와 그를 고발한 신전기사님이 전쟁신 '할로네' 앞에서 진정한 정의를 가리기 위해 싸웠지.

너울대는 암흑을 두르고 사람 키만 한 대검을 든 이단자 검사는 끊임없이 신전기사님을 향해 덤벼들었고……. 그리고 죽었어.

도중에 항복했다면 목숨만은 건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검을 거두지 않았지.

 

칠흑 같은 갑옷을 입고 거대한 양손검을 든 채 성도의 쓰레기들을 잔악무도하게 처단하는 기사에 대한 소문이 돈다.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방패를 들지도 않고, 그 누구를 위해서 맹세를 읊으며 검을 쥐지도 않는 이. 심연의 불꽃 속 그 자신의 의지만을 굳건히 다지는 자. 안개 거리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한 수호성인이지만 신전기사단에게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던 존재.

그 중심에 너와 네 사형이 있었다.

죽음보다 깊은 어둠에 감싸인 채, 너는 마지막으로 대검을 든다. 가장 어두운 밤(黑夜)속을 걷는다.

 

‘암흑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작위나 혈통이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약자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든 자들이니…….”

 

약자를 수호하며 죄인을 단죄하는 자, 결의, 암흑기사의 극의 어쩌구, 스승님께 배운 수많은 지식들이 머릿속에 메아리쳤지만 지금은 상관없었다. 너는 그냥 살고 싶었다. 살아서 돌아가고 싶었다. 네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곁으로.

고매하신 이슈가르드 귀족 나리들께서 할로네 앞에 맹세하며 네 죄목을 낱낱이 읊어줄 때 너는 죽도록 살고 싶었다.

 

그래서 '암흑기사'는 방패를 들지 않습니다. 기사의 방패에는 권력의 상징인 문장이 그려져 있으니까요. 오직 '양손검' 하나만을 쥐고 스스로 약자의 방패가 되지요.

 

네 무딘 칼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을 견고한 갑옷으로 온 몸을 둘러싼 신전기사의 검이 네 몸통을 후벼팠을 때, 끝내 중심을 잃은 네 몸이 결투 재판장의 차가운 돌바닥을 향해 무너졌을 때, 감기는 눈과 무뎌지는 감각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너는 죽도록 살고 싶었다.

보라, 또 한 명의 이단자에게 여신의 정의가 실현되었도다! 결투에서 승리한 기사를 향해 경탄의 함성이 울릴 때, 네 몸이 안개 거리 길목에 내던져졌을 때, 죽음과 삶의 경계 속에서 너는 죽도록 살고 싶었다.

 

그래도 궁금증이 안 풀리면 시체라도 구경해보겠나? '구름안개 거리' 쪽으로 옮기던 것 같으니, 그리로 가보게.

 

천 년의 침묵과 천 년의 거짓. 성도의 이면이 품은 추악함이 어느 영웅에 의해 낱낱이 까발려졌을 때, 너는 그 곳에 없었다.

네 기억과 신념이 내 분노와 눈물에 맞물렸고, 네 죽어가는 육신에 네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깃들었고, 그렇게… 너는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 안녕, 시드. 안녕, 리엘. 안녕, ---. 이제 내 목소리를 들어, 내 심장 소리를 들어.

 

자, 제 검과 소울 크리스탈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맹세하십시오. 어떠한 힘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갈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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