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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층 오만 지옥. 사막지대 근처의 작은 도시.

간만에 여유가 생긴 볼프는 피비린내 나는 거리의 악취를 잊기 위해, 카페에 앉아 향이 진한 홍차를 주문했다.

아아. 이 얼마나 평화로운 지옥인가.

얼마 전까지는 대학살 때문에 시끄러웠고, 지금은 주인 잃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악마들끼리 싸우고 있지만, 그건 전부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얼른 조용해지면 좋겠군.”

 

볼프는 여기저기 눈알이 달린 거리를 훑어보았다.

저들은 모두 천사에게 죽어 거리 일부분이 되었지만, 지금의 동족상잔에 휘말린 이들은 죽지도 못하고 잔뜩 고통받고 망신만 당하리라.

물론 그 또한 지옥 태생이 아니며,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악마 중 하나였지만…. 사실 볼프는 좀 사정이 달랐지.

그는 그냥 죄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도 여기에 갓 떨어졌을 땐, 저렇게 치열하게 싸웠던가.’

 

볼프는 꽤 오래전에 명을 달리했었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던 오래전. 능력 있는 여자들은 마녀로 낙인찍혀 죽고, 제대로 된 의료시설도 없어 인간의 수명이 극단적으로 짧던 그런 시대에 말이다.

 

‘오래 살아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다 제가 인간이라 그런 거였다. 장수 자체의 장점은 그다지 없지만, 오래 살아있으면 글을 잔뜩 쓸 수 있지 않은가!

볼프는 죽고 난 후, 진심으로 단명한 것에 감사했다. 살아있을 때는 좋아하는 글을 쓰기도 힘들었는데, 죽고 나선 재미있는 일뿐이지 않나.

산양 악마가 되어, 지옥에서 마음대로 글을 쓰고, 능력을 얻어 힘을 휘두르고, 나태한 창작자들과 계속 계약하여 힘을 불린 끝에 결국 오버로드까지 되다니. 그야말로 걸작 소설의 스토리 같지 않은가! 정말이지 실로 유쾌했다.

물론…, 제 원고를 도용한 쓰레기들에게 불을 지르고 자신도 그 난장판에 뛰어들어 불타 죽었을 때의 고통은 좀 끔찍했지만 말이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옛 추억에 잠겨있던 볼프는 제 옆자리로 다가온 낯선 이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브랜디가 든 차를 들고 다가온 손님은 카우보이 복장을 한 임프였다.

 

“바깥 자리가 꽉 차서 그런데, 동행이 없다면 옆에 앉아도 되나?”

 

마치 뱀의 숨소리같이, 쉭쉭 거리는 소리를 내며 인사한 그는 볼프가 대답하기도 전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저럴 거면 뭐하러 물어본 건가 싶지만, 싫지는 않다.

기품을 중요시하는 볼프 입장에선, 힘과 욕망으로 범벅이 되어 예의도 없는 무례한 악마들보단 허례허식이라도 있는 쪽이 편했으니까.

 

“저에겐 무슨 볼일이지요? 미스터.”

“볼일?”

“시치미 떼지 않아도 됩니다. 설마 저를 모른다고 할 셈은 아니겠지요.”

 

오버로드는 수도 몇 없고, 모두 지독하게 강한 탓에 지옥에서는 악명이 높다. 갓 죽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풋내기 죄인이라면 모를까, 지옥 태생인 임프가 오버로드 중 한 명을 모를 리 없었지.

그렇기에 그는 확신했다. 이 임프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어떤 악마인지도 알 거라고.

 

“큭,”

 

볼프의 태도에 피식 웃은 님프는 알코올의 향이 가득한 차를 단숨에 들이켜더니, 다리를 꼬고 앉았다.

 

“눈치가 빠른데, 아가씨.”

“작가는 관찰력이 좋거든요. 그래서, 미스터의 이름은?”

“스트라이커.”

“훌륭한 이름이군요.”

 

누가 봐도 적당히 강하고 나쁜 놈 이름 같은 게 퍽 마음에 든다. 생김새와 딱 어울리기도 하고 말이다.

볼프는 마음속으로 생각한 내용을 홍차와 함께 삼켰다.

 

“제게 무슨 볼일이지요?”

“댁이 귀한 피를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귀한 피?”

“그래. 축복받은 피를 말이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이던 볼프가 작게 탄식했다.

 

“아. 알겠어. 훌륭한 성서를 쓰겠다고 악마랑 계약한 머저리 추기경의 피 말이군요.”

“바로 그거야.”

“그런데 그건 왜 찾는지? 자해라도 할 셈입니까?”

 

천사의 무기만큼 강력하진 않지만, 성직자의 피는 지옥의 존재들에겐 독이다.

자신 정도 되는 강한 오버로드도 그 피를 잉크병 안에 넣어둔 채 창고에 처박아뒀는데, 고작 임프가 왜 이런 물건을 찾는가.

볼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쓸 곳이 있어. 얼마면 팔 거지?”

“팔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질 물건은 아닌 것 같군요.”

“하, 천한 임프에겐 팔 수 없다는 건가?”

“아뇨. 당신은 명백히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그 피를 원하는 것 같은데,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니 팔고 싶지 않은 것뿐입니다.”

 

볼프는 기품있고 예의 바르지만, 결국 그래봐야 악마였다. 누가 성직자의 피로 죽고 죽이던 제 알 바 아니었지만, 그게 만약 자신과 같은 오버로드나 고위 악마들을 죽이려는 거면 이야기가 달라졌지.

그 어떤 후레자식이라도 팔은 안쪽으로 굽는 법이었고, 그건 지옥에 처박힌 영혼도 마찬가지다.

죄를 짓고 쾌락에 젖어도, 제 이익과 제 주변의 손해는 생각한다는 말이었다.

 

“…그럼, 만약 누굴 죽이려는 건지 알려준다면?”

“그거 흥미롭군요. 꼭 듣고 싶지만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다음에 오지.”

 

‘아가씨가 혼자 있을 때 말이야.’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스트라이커는, 낄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서 반가웠어, 작가 아가씨.”

“이쪽도 반가웠습니다, 미스터.”

 

저 남자, 써먹을 만한 소재인 것 같으니 메모해 둬야지.

볼프는 순식간에 사라진 스트라이커를 곱씹다가, 은은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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