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임버스 AU
운명. 그것은 더 무거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그래, 바둑. 토우야 아키라는 단지 주위의 기대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그만큼 재밌는 것이 없었고, 욕심이 드는 것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더 넓은 세계를 만나면서도 나를 사로잡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신도 히카루. 그에게 강하게 이끌렸고, 그 역시도 나에게 이끌려왔다. 알 수 있었다. 그와 내가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몸 위에 새겨진 누군가의 이름은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연이고 갈라놓을 수 없는 하늘이 점지한 운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아 이를 숨기고 싶어하는 사람을 수도 없이 봐왔다. 읽지도 못하는 글자에 관심도 없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끼리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결말을 이룬 사람들도 많다. 이런 세상에서 정말 네임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때도 있었지. 아키라는 왼쪽 쇄골 부근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지금도 네임의 상대가 꼭 특별한 무엇이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분명 츠즈라누키 카오루는 제게 운명이었다.
먼저 운명이라든가 이름이라든가, 그런 얘기 먼저 꺼낸 사람은 카오루였다. 카오루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카이오의 학생회장이 아니라 츠즈라누키 카오루로 있는 것은 아키라와 함께 있을 때 뿐이었으니까. 영원을 바라는 것처럼 굴어놓고서는 왜. 그 생각은 이제 그만하자. 아키라는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웠다. 아키라의 네임을 아는 사람은 아직 누구도 없었다.
츠즈라누키 카오루는 졸업을 하자마자 사라졌다. 학생회장으로서의 유명새와는 대비되게도, 졸업 이후의 카오루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서 봤다는 소문도 종종 돌았지만 그것도 겨우 몇 달이었다. 카오루에 관심은 점점 줄었다. 아키라는 카오루와 친했던 학생들에게 카오루에 관해 물었지만 그둘 중 누구도 학교 밖의 카오루를 알지 못했다.
오히려 카오루에게 집착하는 아키라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가. 생각해보면 카오루와 알고 지낸 것이 일 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카오루와 아키라가 어떤 사이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아키라의 부모조차도 이것 하나는 알지 못했다. 다른 학생들에게 둘은 그저 학교의 햇살이라고 불리는 학생회장과 일 학년 바둑천재 걔.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접점도 없어보이는 것이 당여했다. 이상적인 학생회장은 전교의 모두를 잘 알고 있으니까 지나가며 말 한 마디쯤은 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사이. 아키라는 이름이 새겨진 주위를 가볍게 문질렀다. 차가운 손가락 말고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카오루가 없어도 아키라의 시간은 잘만 흘러갔다. 사실은 바둑만 생각하기도 부족한 하루였다. 운명이라고는 해도, 두 사람은 너무 다른 곳에 속해 있어 서로가 없어도 그 부족함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고, 진심으로 맞붙고 싶은 상대가 있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카오루에 매달리는 것은 시간낭비였다.
하지만 아키라는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도 카오루의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버리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잊은 듯하다가도 문득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또 이렇게 많은 날을 보냈는데, 그동안 그는 더 멀어졌을지도 몰라. 아키라는 덕분에 평생 가져본 적 없는 불안이 들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이 머리를 채우면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으로 손이 갔다. 누군가 묻기도 했다. 그런 행동은 무언가의 의식이냐고. 아키라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선배에게 의지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토우야는 운명을 믿어?
글쎄요. 선배는요?
나는……
그날도 평범하게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치카와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 머리를 식히면서 가겠다는 핑계로 홀로 거리로 나섰다. 마침 눈도 내려 걷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키라는 오늘 두었던 바둑을 되뇌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수는 좋았지 아 하지만 그렇게 반격할줄이야.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저런 모양의 바둑판 그림이 깨끗이 사라졌다. 시선부터, 청각까지 모든 감각을 빼앗는 것이 있었다.
‘선배?’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멀다면 먼 거리였지만, 잘못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연했다. 잘못 본 것이었다면 그의 이름이 새겨진 그곳이, 이렇게 뜨겁게 달아오를 리가 없을 테니. 그가 향하는 곳은 가려던 방향과 반대 방향이었지만, 그런 것은 개의치 않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아키라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모르는지 주위를 신경쓰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겠지. 아키라는 확신했다. 가까이 갈수록 더 뜨겁고, 쑤셔오기까지 하는 이 감각. 그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얼굴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나에게만 보여줬던 약간 어두운, 하지만 자연스러운 그 얼굴. 평범한 한 사람의 얼굴. 아키라는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뿌리칠 수 없도록.
“선배. 선배 맞죠.”
카오루는 놀란 듯한 얼굴로 아키라를 바라봤다. 하지만 금세 시선을 피하곤 아키라에게서 벗어나 저만치 나아갔다. 분명 세게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쉽게 내쳐졌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그가 카오루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으니, 지금 해야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그를 다시 붙잡는 것. 이번에는 정말로 뿌리칠 수 없도록 세게 붙잡는 것.
아키라는 정말 끈질기게 카오루의 뒤를 쫓았다. 카오루는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아키라가 자신을 쫓는 것을 아는 듯 걸음 속도를 점점 올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후배를 피하는 학생회장이라니. 선배는 지금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아키라는 순간 희열감에 휩싸였다. 츠즈라누키 카오루가 이런 인간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오직 나 하나만 아는 사실이다.
선배, 선배. 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던 거예요. 왜 저 무시하는 거예요. 네? 선배 맞잖아요. 선배도 운명을 믿지 못하게 된 거예요? 아니면 이제 저랑 얘기하기도 싫어져서 그래요?
운명을 믿고 오늘은 물러서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누군가 팔을 잡아당겨 방어할 새도 없이 앞으로 끌려갔다. 아키라는 이것은 필시 어떤 예의없는 행인의 짓이겠거니 생각해 따지려고 입을 열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아키라의 손목을 잡고 있는 것은 카오루의 손이었다.
아키라는 입을 꾹 다물고 카오루가 이끄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키라의 기억이 맞다면 카오루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언제나 아키라만이 먼저 카오루를 찾았다. 운명 이야기는 카오루가 먼저 꺼냈대도, 아키라가 자신을 찾을 때까지 아무런 내색도 내비치지 않았던 사람이다. 심장이 쇄골로 자리를 옮긴 것 같았다.
카오루의 손에 이끌려 온 곳은 근처의 공원이었다. 늦은 시간도 아니었는데 위치가 좋지 않은 탓인지 묘하게 인적이 드물었다. 카오루는 아키라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으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키라는 그와 눈을 맞추었지만, 늘 그랬듯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초연한 표정의 그가 꼭 환상 같이 느껴졌다. 아키라는 망설이다가 카오루의 손을 붙잡았다. 이것이 그를 붙잡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아는지 카오루는 더는 아키라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선배. 싫다고 얘기를 해줘야 나는 알아요. 싫다고 하면 앞으로 이런 일로 선배 붙잡는 일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키라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목이 메었다던가, 그런 뻔한 이유가 아니었다. 카오루에게 안기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허리에는 카오루의 팔이 둘러져 있고, 상체는 카오루의 품안에 기댄 상태고.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라 아직도 얼떨떨했다. 역시 지금 꿈속의 일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학창시절 시절 내내 ‘그런’ 사이였음에도 교내에 둘의 사이를 아는 사람이 누구도 없었던 것은, 온전히 카오루를 위해서였다. 그가 직접적으로 알리지 말자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바란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과 특별한 사이가 된다는 것은 카이오의 햇살이라는 이름에 누가 되는 일일 테니까. 카오루가 졸업을 하면 조금 변화가 생길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졸업을 하자마자 갑자기 행적을 감췄으니. 이렇게 몸을 가까이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트인 공간에서! 아키라는 카오루를 마주 안으려고 했지만 아직도 어딘가 버그가 걸린 것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선배, 여기 밖이고.”
“괜찮아. 여기 사람 안 와.”
꼭 그런 의미만은 아니었는데. 아키라가 반박하기도 전 카오루는 아키라의 어깨에 그의 턱을 올린다. 몸이 더 가까이 붙어 네임의 자리가 그의 몸과 닿는다. 정전기가 일어난 듯 따끔한 통증이 아키라를 스쳐갔다. 하지만 카오루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한테만 느껴진 건가. 통증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 카오루가 나지막하게 토우야의 이름을 읊었다.
“떨어지는 게 생각보다 무섭더라. 네게 그 얘기를 한 건, 운명이라는 이름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어. 죽을 듯이 쫓아오라는 말이 아니라. 그런 기대를 받아버리는 건 무서운데, 무서운 만큼 살아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나, 지금 좋아해도 되는 걸까?”
말을 마치고 카오루는 아키라에게서 떨어졌다. 아키라의 얼굴은 눈에 띄게 상기되어 있었다. 카오루의 담담한 이야기는 그 어떤 열렬한 고백보다 더 뜨거웠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그 많은 말들이 뒤섞여 무엇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선배, 선배. 그저 그를 부르고 싶었다.
“선배.”
“언제까지 선배라고 부를 셈이야.”
카오루가 아키라의 왼쪽 쇄골을 검지로 꾹 누르며 말했다. 일년도 더 전에 고작 한 번 본 것이 전부인데, 정확하게 위치를 찾아냈다. 기억력이 좋은 것은 ‘츠즈라누키 카오루’도 마찬가지구나. 아키라는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카오루를 봤다. 그를 선배라고 부르는 것이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인가?
“난 이제 토우야의 선배가 아니잖아.”
아키라는 카오루의 미소를 보고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햇살의 미소가 아니라 카오루의 미소. 지금 아키라의 앞에 있는 사람은 카이오의 학생회장이 아니라……
“츠, 츠즈라누키 상.”
어색한 울림. 그러나 신선함이 가슴을 울렸다. 그것은 카오루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아키라는 짐작했다.
이름에는 힘이 있다. 선배라는 호칭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힘. 이름을 부르자마자, 마음 한켠에 틀어박혀있던 그리움과 반가움이 아키라를 감쌌다. 모든 것이 반가웠다. 자신의 앞에 있는 카오루가, 조금은 달라질 내일이, 그리고 매일 느끼는 선선한 바람마저도.
선배는 운명을 믿어요?
나는…… 증거가 여기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