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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습니다, 낭주. 이렇게 보니 또 반갑네요.”

“…정말 반가운 게 맞나요? 찬오랑.”

 

 

저를 보며 손을 흔드는 모습에 채유하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손찬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 일방적으로 화를 낸 후, 지금 이렇게 만난 건 벌써 일주일은 지난 일이었다. 그러니까, 손찬오가 채유하를 일부러 피해다닌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왜 그를 피해다니는지 상대도, 다른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스스로는 잘 알기에 제 행동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도 알고 있었다. 대놓고 피했으면서, 제 쪽에서 보고싶다고 상대를 불쑥 찾아오는 일까지도. 그러니 지금의 저는 제 말에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이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모르겠지. 내가 왜 이러는지. 알아서도 안된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반가워서 반갑다 말하는데 왜 못 믿어?”

“거짓말쟁이 말을 누가 믿어요…”

“섭한 소리를 하시네. 전 거짓말은 한 적 없습니다만?”

 

 

말을 안 한 건 있을지 몰라도. 손찬오는 특유의 뻔뻔스런 표정을 지으며 채유하를 바라보았다. 거짓을 고할 생각이었다면 너 따위는 정말 싫다고 말했을 텐데.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게 지금의 제 꼴 아니던가. 제게서 고개를 돌린 채유하를 보며 손찬오는 시선을 내렸다. 지금 상황에서 미안하다 말하는 건 쉬운 일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미안하기도 했으니까. 다만, 상대가 사과를 받아줄 지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가 상대에게 화를 낸 건 복잡한 사정은 아니었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이후부터 손찬오는 채유하와 멀어질 생각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래야 했는지도 몰랐다. 제 주제보다 더한 신분을 얻었다 욕 먹는 이라도 진골은 진골이었다. 자신은 6두품이었고, 둘 사이에는 어떠한 것으로 메꿀 수 없었다. 당연히 서로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순순히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왜 몰랐지? 왜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지? 감정에 취해 두 눈을 가리고 다닌 꼴이었다. 평소라면 채유하가 자신을 보러 오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오는 정도로 화를 내지 않았을 일이었다. 거리를 둔다고 해도 능청스럽게 구는 손찬오의 특기였다. 적당히 대화만 하고 보냈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날은 좀 피곤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채유하가 들고 온 간식거리가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고, 그를 보며 둘이 사이좋다고 좋아하던 형님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형님의 말에 수줍은 듯 웃어보이는 얼굴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손찬오가 채유하에게 화낸 이유는 오로지 그 이유였다. 그가 선을 넘었다, 고 혼자 생각했기 때문에. …투정이 아니면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손찬오는 미간을 찌푸렸고, 채유하를 보며 비꼬는 말을 늘어놓았다. 진골이면서 몸가짐이 가볍다거나 어떤 소문이 돌아다닐지 상상하기 싫다는 말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그러한 말을 듣고도 화낸 건 채유하가 아니라 손찬오의 형이었다. 손님을 향해 무례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선을 넘은 건 제 쪽인 걸 알 수 있었다. 채유하는 언제나처럼 웃어보이며 실례했다는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고, 그게 벌써 일주일은 지난 일이었다. 나라고 화내고 싶었던 건 아냐. 나라고…

 

 

“왜 피해요?”

 

 

손찬오가 저를 두고 머뭇거리자 채유하는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왜냐고 묻는 말에 손찬오를 향한 시선은 순수한 의문이었다. 소문이 날까 봐? 제가 욕먹을까 봐? 뒤따라오는 말은 전부 손찬오가 채유하에게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그 질문들이 홧김에 내뱉은 말로 일주일 동안 고민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채유하가 내린 결론은 둘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였다. 손찬오도 알 수 있었다. 채유하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진실을 원하는 눈이며, 저는 그 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사과할 마음이 든 이상 그가 제게 기회를 줬을 때, 원하는 답을 주는 게 가장 현명한 길이었다. 그런데도 손찬오는 망설이고 만다.

 

 

“…그날은 내가 말이 심했어, 미안해.”

“사과는 받아줄게요. 진심이 아니었던 것도 알아. 근데 왜…”

 

 

왜 평소처럼 다음날 보러 오지 않은 거야? 채유하는 울음을 참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 그게 이상했어. 손찬오가 갑자기 화를 내서 이해할 수 없던 게 아니었다. 화내는 걸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고, 친분이 있다고 이제 성인이 된 자가 연인도 아닌 이의 집을 찾아가는 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내뱉은 말이 심했어도 제 잘못마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소한 장난이라도, 정말 심한 말을 내뱉었어도 다음 날이면 저를 찾아와 오히려 뻔뻔스럽게 화해하던 게 바로 손찬오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를 피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일주일이란 시간은 제 삶에서 가장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가 점점 자신을 일방적으로 피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알지도 못한 채, 하루이틀은 인사할 틈조자 주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는 결국 제게 돌아온다. 채유하가 믿을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그랬던 이가 일주일 동안 보이지 않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채유하는 그가 제게 화를 냈다는 사실보다 더 이상 손찬오를 만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피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서라벌에서 그를 찾는 일은 채유하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기다렸어요.”

 

 

어렸을 때에도, 시간이 지난 지금도, 채유하는 언제나 손찬오를 기다렸다. 벗어나지 못하는 집에서 손을 잡아줄 사람이라곤 손찬오 밖에 없는 탓이었다. 네가 이끌었잖아요. 네가 내게 빛을 보여줬었어. 안녕, 이라고 말했던 그날을 한순간도 잊은 적 없었는데. 왜 오지 않았던 거야. 채유하는 고개를 숙였다. 왜 너만 나를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적어도 내가 싫어서, 이제 보고 싶지 않아서 피하는 거라면 말해줘야지. 나도 네게서 멀어질 시간을 줬어야지. 그 무엇도 주지 않은 채 왜 이별을 겪고 있어야 해. 떨리는 목소리에도 단어들이 이어져 문장을 내뱉는다. …사랑하는 이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넘어갈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손찬오는 다급히 그를 제 품에 두었다. 미안해, 하고 내뱉는 말은 아까와 달리 간절함이 담겨있다. 피해서 미안, 혼자 둬서 미안해. 터지기 시작한 울음을 멈추기에 완벽한 말은 아니었으나 채유하는 그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를 다시 봐서 반갑다는 말은 거짓이 아냐. 믿어줘.”

“…피하지 않을거죠?”

“…응, 미안.”

 

 

결국 이렇게 되는 일이었다.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피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는데. 알면서도 제 마음은 여전히 흔들리고 만다. 너를 두고 어찌 해야 하는지 저는 평생 알 수 없겠지. 무엇이 옳은 답인지, 너를 위한 답인지, 고민하고 헤매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저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는 너를 떠올리면 틀린 답이라도 괜찮다 여기게 되겠지. 그게 내가 너에게 보여줄 수 있는 답이니까. 제 품에 얌전히 안겨있는 채유하를 보며 손찬오는 그를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앞으로도 이겨내야 할 게 많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인사를 나눌 수 있을지 그는 자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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