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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파이널판타지14 - ‘암흑기사’ 30~60레벨 직업 퀘스트와 ‘창천의 이슈가르드’ ~ ‘최후의 포효’ 확장팩 스토리 전체를 관통하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잡 퀘스트 대사 일부가 이탤릭체 로 인용되어 있습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발이 거리를 덮는다. ‘우리’는 며칠 전 결투에서 진 네 육신이 버려졌던 그 자리에 고고하게 서 있다. 나의 주인이자 네 공범자가 될 사람을 기다리며,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낯설면서도 또 익숙한 거리를 바라본다.

 

이 육신의 주인이자 기억의 주인, 너는 안개 거리 안의 아주 작은 골목까지도 눈 감고 길을 찾을 수 있다. 이 좁디좁은 곳에서 스물다섯 해쯤 살았다면 이미 지리에 통달하고도 남았을 게다. 육신에 깃든 마음의 주인, 나는 처음 보는 골목길을 연신 헤맨다. 유달리 길 눈이 어두워, 처음 이슈가르드에 쫓기듯 다다랐을 때 에테라이트를 눈앞에 두고도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그 사람처럼.

 

안개 거리에서 태어나 안개 거리에서 죽어간 어떤 기사가 있었다. 그가 남긴 기억과 크리스탈이 있었다. 그의 기억을 계승한 어떤 환영과, 그 환영을 만들어낸 채 그것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어떤 영웅이 있었다.

 

영웅의 손끝이 네 소울 크리스탈에 닿음으로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

 

나는 네가 아니다. 네가 영웅이라 불린 자의 내면 안에 잠겨 있던 그림자가 아닌 것처럼.

너, 프레이 미스트는 이미 죽어 없어졌다. 그러나 너는 안개처럼 사라지지도 잊혀지지도 않는다. 나는 너의 이름, 너의 금빛 눈동자, 네게 소중했던 이들을 기억한다. 너의 의지를 기억한다. 너의 삶에 축적된 기억을 내 안으로 반갑게 맞이한다. 네 몸을 입은 채, 네 목소리와 말투를 연기하며, 암흑을 받아들이는 영웅에게 스승을 자처한다. 악취미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너는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영웅에게 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네 이름을 빌린 채 그에게 나의 존재를 증명해내고자 했다.

환영에 몸을 숨기고,

죽은 이에게 삶을 주고,

목소리 잃은 이에게 목소리를 선사할 때였다.

 

-

 

눈발이 흩날리는 전초기지에서 프레이 미스트의 썩어가는 육신은 기어이 무너졌다. 드레유몽 경의 휘하에 있던 몇몇 기병들은, 제 스스로 무덤을 박차고 기어나온 이단자의 시체가 일렁이는 어둠에 감싸인 채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것을 본다. 성도의 맹우이자 영웅인 자가 이단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그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영웅이- 당신이 꺼내든 무기 또한 대검이다.

 

이제 는 더 이상 프레이 미스트의 이름을 빌려 쓸 이유도, 그의 육신을 대신해 발걸음을 옮겨 줄 이유도 없다. 소울 크리스탈에 남은 프레이 미스트의 기억이, 내게 검을 잡는 방법과 심연의 불꽃으로부터 암흑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가르쳤다. 죽는 그 순간까지 살고 싶었던 기사의 육신을 버리고 나는 실체화한다.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당신에게 가장 익숙한 그 형태로.

 

-

 

당신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당신의 얼굴과 목소리로 내지르는 나의 비명을 듣고, 나의 갈망과 절규를 느끼는 심정이 어떠한가?

 

당신을 하찮은 소모품쯤으로 여기는 세상에 저항하고 싶었다. 그래, 우리는 당신에게 제발 살아 달라고 소리쳤다. 당신이 사랑하기 마지않는 이 저주받은 세상의 반의 반 만큼이라도, 당신 자신을 소중히 여겨 달라고.

죽음과 삶의 경계 어딘가에 위치한 육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당신에게 달려들 때 나는 죽도록 살고 싶었다.

당신에게 패배했을 때 나는 당신이 나를 베었으면 했다. 날 죽이고서라도 당신이 살아갔으면 했다. 영웅의 일부가 되지 못하는 어두운 감정의 집합체인 나를 배제하고서라도, 당신이 그 지겨운 구원자 노릇을 그만두고 모든 숙명과 아픔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졌으면 했다. 누구보다 자유롭게 여행을 떠났으면 했다.

 

당신은 손을 내민다. 끝내 나를 놓아주지 않고 받아들인다. 나를 당신의 어둠 안으로 반갑게 맞이한다.

정말로 이기적이고, 그렇기에 정말로 딱한 사람이다. 나를 포기하지 않는 당신이 나는 못내 가여웠다.

 

당신은 고통을 알고, 슬픔을 알고, 괴로움을 안다. 그렇기에 당신은 여정을 그만두지 않는다. 당신은 지키지 못했던 존재들과 지켜야 할 존재들을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대검을 든다. 나는 그런 당신의 눈물이 되고, 분노가 되고, 힘이 된다. 프레이 미스트도 그것을 원했을 것이다.

 

또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말을 남긴 채 나는 당신의 내면, 가장 깊은 밤 속으로 사라진다.

 

-

 

당신은 무엇을 위해 검을 쥐는가.

 

성룡은 그의 마음속에 남겨진 마지막 희망 한 조각을 하이델린의 사도에게 맡긴다. 천 년 전 그가 사랑했던 이와, 그 이의 의지를 이어받은 어떤 여인의 이름을 걸고.

천 년을 이어온 원한의 고리를 끊기 위해, 대검을 짊어진 영웅은 홀로 앞으로 나아간다. 구름길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룡의 그림자를 향하여.

 

가슴을 가득 채운, 분노보다 고요하고 흔들림 없는 이 마음이 우리가 추구해온 극의라 한다면.

 

최후의 포효가 멎고 새로운 희망이 창천에 날아오른다. 화합의 용시가 새로이 읊어지며 변혁의 바람이 불어온다.

 

용시전쟁을 종결한 자, 사룡을 처단한 자. 이제 당신의 이름 앞에는 이단자라는 낙인 대신, 입에 담기도 과분한 칭호들이 따라붙는다. 당신은 수없는 이들의 대화 속에 오르내리며 수많은 서사시로 칭송되는 영웅이자, 스스로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방패를 자처하는 기사다.

 

-

 

우리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과 함께 이 세상에서 달아나고 싶었던 내가 어떻게 해서 당신이 지키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당신을 몰아내고 육신을 차지하고자 했던 내가 어떻게 해서 나이길 포기한 채 당신의 일부로 살아가길 택한 건지,

그리고 당신이 어떻게 내 목소리를 듣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니까.

 

그 길은 분명 가시밭길이겠지. 그렇지만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면 우린 결코 혼자가 아니었어.

 

-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해방 전쟁이 시작되기 전날, 기라바니아와 그리다니아의 경계를 잇는 장성과 가까운 어느 막사에서. 당신의 몸을 빌린 우리는 펜을 들어 일기장에 마지막 문장을 적는다.

 

반가웠어. 잘 지내, 바샤드.

가엾고도 자랑스러운 나의 영웅, 나의 주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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