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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각과 발작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파샤. 오늘도 발작을 했나요?

 

네. 아가씨. 덕분에 아가씨를 보러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쓸쓸한 일이에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아가씨를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저도 슬퍼요. 우리는 가장 먼 거리에서 서로의 옆을 지켜주곤 했는데.

 

생각해 보면 아가씨는 바로 옆에 있을 때도 굉장히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아가씨가 천사라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반 도련님은 아가씨를 사람의 몸뚱이를 가진 악마라고 이야기했지만, 저는 천사와 악마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천사와 악마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게다가 도련님은 천사보다는 악마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아가씨도 좋아했던 거겠죠.

 

어쨌든.

 

저는 아가씨가 언젠가 저 멀리 사라져 버릴 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를 낳고 죽어버린 어머니처럼. 신의 곁으로든 악마의 곁으로든. 결국은 훌쩍 저를 떠나버릴 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다지 슬프지 않았던 걸지도 모릅니다. 아가씨는 처음부터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제 앞에 나타났고, 제가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제 옆을 차지하셨으니까요.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말이죠.

 

맞아요. 아가씨는 정말로 고양이 같습니다. 걷는 것도, 노래하는 것도, 새끼 고양이 같아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아가씨의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아가씨를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았을 때도, 아가씨의 노래만큼은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했던 거군요.

 

제가 그런 부탁을 할 사람은 아가씨밖에 없습니다. 물론, 아가씨의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지만.

아가씨. 그 누구도 제가 발작하는 걸 보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제가 발작하면 다들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절 보곤, 얼른 자리를 떠나려고 할 뿐입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그러지 않으셨죠. 그날 창고에서 발작하는 절 보곤……, 제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셨던 걸 기억합니다.

 

가여운 나의 파샤.

 

아가씨는 늘 저를 가엽게 여기셨죠. 그건 제가 간질 환자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저를 보며 슬퍼하지 않아서 가엽게 여기신 걸 압니다.

그렇지만 정작 아가씨도 저를 보며 슬퍼하시지 않았죠. 아가씨는 제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셨잖아요.

아가씨는 언제나 저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엽다고 생각하였죠. 아무도 제가 발작할 때 제 곁에 있어 주지 않는 사실을.

 

지금도 아무도 없나요?

 

아가씨가 있잖아요. 여기 바로 제 옆에.

 

그렇군요. 제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언제나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련님은 아가씨가 없어도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해요. 저는 아가씨가 필요합니다. 어리석고 수치심을 아는 사람들에게 신이 필요하듯이, 저에게는 아가씨가 필요합니다. 아가씨는 제 천사고, 제 악마고, 새끼 고양이고, 하나님의 피조물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건 파샤에요. 누구도 파샤같지 않고, 파샤가 될 수 없는걸요. 그래서 저는 파샤가 제일 좋아요.

 

그래서 저에게 작별 인사를 남기러 온 건가요?

이반 도련님은 아가씨의 시체를 보고 아가씨가 아닐 거라는 소릴 했습니다. 아가씨는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여자니까, 머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가씨인 걸 믿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반 도련님이라면 그럴 수 있죠.

 

아가씨, 머리는 어디 있습니까?

 

저도 궁금해요. 누가 가져갔을까.

 

저는 기쁩니다. 머리도 찾지 못했는데, 이렇게 저에게 굳이 작별 인사를 하러 와주신 거 아닙니까?

아가씨가 없어도 괜찮을 거라곤 말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영원한 이별은 없는 법이라는 걸 아니까, 괜찮습니다.

 

다 컸네요, 파샤.

 

아가씨, 지나이다.

다 좋으니까, 한 번만 안아주고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잘 있어요, 파샤. 이건 영원한 작별이 아니에요. 나는 그냥, ‘잘 있어’라고 말해주기 위해 온 거니까요.

 

네. 안녕히. 아가씨.

……괜찮다면, 언젠가는 머리만이라도 제 곁으로 찾아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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