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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에게는 요즘 큰 고민이 하나 있다. 좀처럼 카오루의 집에 갈 시간이 나질 않았다. 아직 부모님에게는 그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으므로 수상한 행동을 보일 수는 없었다. 카오루와의 관계가 알려지는 것 자체는 괜찮았다. 다만 그가 원치 않는데 ‘어쩔 수 없이’ 밝히게 되는 상황이 오는 것은 원치 않았다. 알리게 된다면 제대로 날을 잡고 정식으로 소개하고 싶었다.

 

 

 

 

 

“여어, 토우야.”

 

어깨를 두드리는 누군가의 손길에 아키라는 뒤를 돌아봤다. 반가운 얼굴이었다.

 

“야시로!”

“오랜만이네.”

“그러게. 여기는 어쩐 일이야?”

 

그도 바둑을 하는 사람이니 이곳에 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것조차 신기할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휴대전화가 생기면서 서로 사적인 연락은 종종 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역시 관서의 사람은 쉽게 얼굴을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시시콜콜한 근황 이야기를 나누다가 야시로가 갑자기 말을 끊고 아키라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다. 아키라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야시로는 개의치 않는 듯 아키라를 빤히 보다가 아키라의 어깨에 손을 턱 얹고 말한다.

 

“무슨 일 있구나! 설마 요즘 슬럼프? 아니지,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응?”

“아하하, 아니, 표정이 어둡길래.”

 

아키라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더 끌어올려 웃었다. 의미 없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야시로의 표정은 마치 자신에게 전부 털어놓으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비밀을 무심코 말할 것 같은 타입이라는 인상이었는데, 어쩐지 지금은 그에게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서 제일 이런 쪽에 능통할 것 같달까. 그리고 카오루를 본 적은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잘 알지는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아키라는 잠시 고민하더니 야시로를 이끌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뭐길래 이렇게 진지해?”

 

아키라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일단은 이 문제를 의논할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해 끌고 오기는 했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는 고민이니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카오루와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도 한몫했다.

카오루는 ‘나는 이제 아키라의 선배가 아니’라고 선언했지만, 아키라는 너무 익숙해진 호칭을 쉬이 버리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입이 먼저 움직여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선언을 한 당사자도 별다른 말이 없다. 그래서 카오루는 다시 선배가 되었다. 그것이 아키라가 아직도 카오루를 그저 선배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선배가 아니면 나의…… 무엇이지? 그래서 그를 카오루라고 부르는 것에 브레이크가 걸려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선배와 나의 카오루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 야시로는 연애해 본 적 있어?”

“토우야, 너, 너 설마…….”

“왜?”

“틀림없이 바둑이랑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구나. 너도 이런 고민 하는구나. 역시 토우야 아키라도 여자 앞에서는 평범한 남자애였어.”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닐 텐데.”

 

야시로는 자꾸만 아키라를 곁눈질하며 실실 웃었다. 아키라가 그만하라는 듯 눈치를 줘도 야시로의 입가의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카오루와는 연인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가장 편하게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는 관계를 골랐을 뿐이다.

 

“좋아, 토우야 아키라의 연애 상담이라면 기꺼이 맡아주지. 그래서 어떤 여자인데?”

 

(……)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때 그……?”

“음, 그렇게 되나?”

“그런데 그 사람…….”

 

야시로는 태연한 아키라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연애 상담이라길래 화면 밖의 토우야 아키라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자신이 더 들떠 있었다. 아키라가 먼저 도움을 청했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할 정도로 빠져 당장이라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아는 사람 얘기’보다 더 타인의 이야기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이럴 때도 토우야는 토우야인가. 야시로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왜?”

“너 설마 그때도 좋아했던 건 아니지?”

“으응,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아키라는 여전히 태연했다. 야시로는 아키라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우연히 한 번 얼굴을 봤을 뿐이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야시로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평생 함구하고 둘만의 비밀로 간직할 것이라는 확신은 더욱더 없고. 이상할 만큼 아키라의 침착한 모습은 이미 고백했다가 차인 건 아닐까 – 그런 생각까지 들게 했다.

야시로는 조언의 말도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다. 담담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아키라의 표정은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평소 같았으면 겉치레의 말이라도 늘어놓았을 텐데, 지금은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니가 고생이 많다며 어색하게 웃기나 했다.

 

아키라는 또다시 네임이 새겨진 부위를 문질렀다. 카오루의 이야기를 하니 이 순간만큼은 그가 무엇보다도 그리웠다. 하지만 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무작정 만나러 갈 수는 없었다. 아마 일주일은 더 지나야 할 것이다. 매일 전화를 하는 것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살면서 당연히 무언가를 강렬히 원한 적은 있었지만, 카오루를 원하는 것은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야시로는 갑자기 입을 다문 아키라를 힐끔힐끔 훔쳐봤다. 아키라는 그의 시선이 느껴짐에도 자신의 쇄골을 쓰다듬는 손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럼 네임이랑 운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그러다가 무심코 그런 말이 나왔다. 야시로는 조금, 아니, 꽤 놀란 얼굴로 아키라를 보다가 소매를 걷어 팔꿈치 쪽을 보여줬다. 야시로의 팔꿈치 밑쪽, 아주 연해서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글씨로 Angel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글씨가 연해지기도 한다는 거 사실이었구나. 아키라가 네임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야시로는 민망한 듯 소매를 도로 내리며 말했다.

 

“죽었어.”

“아…….”

“별로, 괜찮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랬는데, 이 사람이 죽었다는 건 알았어. 그냥 알게 됐어. 이 글씨도 처음 생겼을 때는 엄청 진했는데 점점 연해져서 지금은 이렇게 됐다?”

 

야시로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아키라는 겉치레로도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둘 중에 한 사람이 먼저 죽는다면 네임은 점점 연해지다가 결국 사라지게 되는 것인가? 네임에서 해방되는 것인가?

야시로의 팔에 적힌 글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군가의 이름이 그곳에 적혀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연해져 있었다. 아마도, 아직 아주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아키라는 벌써 초조함에 휩싸였다.

야시로는 아키라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간다.

 

“죽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슬펐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인데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다니까.”

 

야시로는 팔꿈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곳을 바라보는 눈빛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운명은 그런 게 아닐까. 떨어져 있어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거. 그러니깐, 이어져 있는 거지. 실제로 아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야시로는 헛기침을 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였다. 아키라도 그 의도를 알곤 심각하게 굳어있던 표정을 풀곤 미소를 짓는다.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는 야시로의 손길이 나쁘지 않았다.

 

“그 사람이랑 페어야?”

“응.”

“뭐야, 잘됐네! 이대로 팍팍 밀어붙이면 되잖아.”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아키라는 야시로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듣지는 않았따.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 하나만으로 밀어붙이기는 싫었다. 안 그래도 거절을 못 하는 사람이다.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는 일이고.

 

“그래도 페어끼리만 알 수 있는 게 있다니까? 지금 아키라가 사랑의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도 몰라.”

“그걸 어떻게 알아.”

“야, 나도 전에는 네임이었거든? 가끔 그쪽이 간지러울 때가 있잖아. 진짜로 간지러운 게 아닌데도. 그러면 얘한테 무슨 일이 생겼구나! 그렇게 아는 거지. 몇 번 느끼고 나니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대충 알겠더라.”

 

아키라는 야시로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임에 통증이 느껴진 날이 생각났다. 아키라에게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결국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아마 카오루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라는 확신을 떨쳐내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카오루는 평소에 너무 자극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 작은 자극도 크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야시로의 말을 들으니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물론 아키라가 네임으로 카오루의 마음을 알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카오루는 이미 아키라의 마음을 전달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확신할 수도 있었다.

 

 

 

야시로라면 어떻게 할래?

음, …………게 좋지 않을까?

 

 

[4시에는 도착할 것 같아요]

아키라는 메시지 입력란에 그 말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오늘 간다는 말은 이미 전했다. 하지만 카오루는 6시가 넘어서 도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부러 잘못 알려준 것은 아니고, 일이 잘 풀려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끝낼 수 있었다. 카오루에게는 비밀로 하고 일찍 도착해 서프라이즈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과 불쑥 찾아가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여기서는 야시로의 말을 믿어보도록 할까. 아키라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카오루의 집으로 향했다.

 

 

“토우야? 일찍 왔네?”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요. 잘 있었어요?”

 

현관에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간다. 카오루답게 놀란 기색은 그다지 없었지만, 평소였으면 얼굴만 보고는 원래의 일로 돌아갔을 카오루가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찾아 신는 것을 기다려줬다. 오랜만에 와서 누릴 수 있는 특혜인 걸까.

오랜만에 오는 집은 바뀐 것이 거의 없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아키라가 저녁때쯤 오면 카오루는 늘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는데, 오늘은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는지 소파 위에는 담요와 몇 개의 DVD가 흩어져 있었고, 텔레비전 속의 남녀 주인공은 격정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쩐지 카오루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아키라는 무심결에 웃어버렸다.

아키라의 방은 거실을 지나 가장 안쪽에 있다. 카오루는 영화는 어찌 되어도 좋다는 듯 아키라의 방문 앞까지 따라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 키도 덩치도 비슷한데도, 심지어 나이는 더 많은데도 카오루를 볼 때면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쉬고 있어요.”

“응, 그래. 나오면 얘기하자. 아직 장도 못 봤거든.”

 

카오루는 아키라의 마지막 모습까지 지키려는지 바로 거실로 나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어느덧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키라는 웃는 얼굴로 카오루를 마주 보며 방문을 닫았다.

 

 

“오랜만이야, 토우야. 보고 싶었어…….”

 

문을 닫기 직전 배경으로 흩어지는 카오루의 속삭임이 아키라의 –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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