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생활을 보내며 졸업과 취직 걱정을 해야하는 4학년이 되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캠퍼스의 로망이라면서 연애도 하고, 밤늦게 술도 먹고,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하며 지내는 듯 보였으나 저는 로망은커녕 하루를 넘기기도 고작이었기에 대학 생활 내내 정말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생활을 보내었다. 과제는 쌓이고, 시험은 시험대로 저를 괴롭히니 편한 마음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런 느낌이었다. 이상하게도 대학에 들어온 이후부터 묘한 답답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물어보니 그게 다 대학을 다녀서 그런 거다, 교수가 괴롭히는 거다, 라는 말만 들었지 명쾌한 답은 듣기 영 어려워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였다. 부모님에게 말하는 건 걱정끼쳐 드릴까 신경 쓰여 관두었고, 병원에 가는 일도 제 증상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지라 당연히 찾아간 적도 없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게 아니니 졸업해야 해결될 거란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던 게 전부였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그저 답답함이 느껴지는 때가 일정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때라도 일정하면 그에 맞춰 쉬면 되는 일인데… 게다가 제일 이상한 건 건물이었다. 건물이라고 해야 하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가슴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때를 꼽자면 학교 안을 돌아다닐 때, 그리고…
“이 건물 근처만 지나가면 제일 답답하단 말이지…”
채유하는 제 앞에 놓인 건물을 바라보았다. 전공별로 다른 건물을 쓰는 학교에서 제 전공 건물과 가장 멀리 있는 건물이었다. 그렇다는 건 저처럼 학교, 자취방, 학교, 자취방만 다니는 학생은 정말 우연치 않은 기회가 아니고서야 좀처럼 들어갈 일이 없다는 걸 의미했다. 가끔 가다 학점을 채울 요량으로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수업을 들을 때 찾아갈 수는 있어도 전공 수업도 겨우 신청하는 제게 있어 이마저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작년에는 무슨 운이었는지 주변에서 평이 좋은 교양 수업을 잡은 적이 있었다. 정작 그 수업도 이 건물만 오면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한 학기를 겨우 들은 수업이었다. 비전공자도 들을만큼 재밌고 쉽다고 해서 겨우 잡은 수업이었는데… 이후로 올 일이 없던 건물이었으나 이 건물에서만 느껴지는 감각이 기분 탓인지 확인하기 위해 몇 차례 더 찾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기분은 확신으로 바뀌어 오늘도 건물 앞에 서서 출입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졸업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오늘이야말로 답답하게 느껴지는 기분을 해결하고 싶었다. 자신있게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불교니까! 나무아미타불이라도 외치며 돌아다니면 귀신을 봤을 때 퇴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 생각하니 오늘따라 건물마저 으스스한 느낌이었다. 괴담은 전부 사람한테서 태어난 이야기라더니. 괜히 밀려오는 두려움에 제 손목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던 염주를 손에 꼭 쥐었다. 수업을 하는 교실도 있을 테니 막상 귀신 따위를 마주해도 소리조차 못 지를 게 분명했다. 이왕이면 아무 것도 마주치지 말자. 채유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
그리고 결과는 당연히 꽝이었다. 살면서 신이라거나 귀신, 영적인 존재 등등 전부 믿는 건 아니었지만, 제게 느껴지는 기분은 분명 그런 류였다. 알 수 없는 힘,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게 저만 보이는, 아무도 믿지 못할 숨겨진 힘이… 당연히 제게 있을리가 없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야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이 학교를 떠나게 되는 걸까. 힘없이 걷던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1층에 놓인 의자에 앉아 시선으로 사람들을 쫓았다. 건물과 바깥에는 몇몇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즐거워보이는 얼굴로 대화하는 모습도 보이고, 서로를 보며 수줍게 웃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그 사람들 속에서도 저는 홀로 이 자리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는 건 태어나서 갖는 성정이라지만, 제게는 무언가 달랐다.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부족한데, 이조차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저를 향해 내밀어주는 손이 있으면 좋겠다, 저를 빛으로 데려가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막연히 그런 생각만 들 뿐이었다. 남에게 기대야 나갈 수 있다는 부분에서 그 감정은 저를 더 헤매게 하였고, 어쩌면 지금 드는 답답한 마음도 이 건물에 숨겨진 걸 찾는 게 아니라 제가 나아갈 길을 찾고 싶어 돌아다녔는지도 몰랐다. 찾은 게 없으니 헛수고였던 건 여전했지만. 제 근처에 지나다니는 이들이 없자 채유하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고요. 과제하기 싫다고 다 던져놓고 나온 게 문제였나? 과제라도 끝냈으면 마음이 덜 불편한 게 당연한 일이었는데. 결국 제 손 안에 굴리던 염주마저 평소처럼 손목에 끼운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토록 얻은 게 없으면 놓여진 현실에 눈 돌리지 말라는 신호인 게 분명했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는 말이 왜 갑자기 생각나는지. 돌아가자, 돌아가서…
“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슴을 누르는 통증에 채유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주변에 있다. 제 가슴을 짓누르고,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하는 존재가 지금, 바로 주변에 있었다. 당연히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갑작스럽게 귀신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지나가던 사람 하나만이… …사람? 설마, 저 사람? 채유하는 가방을 멘 채 걸어가던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답답했던 가슴이 이번에는 소리가 들린다고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두려운 감정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간절함, 후회, 미안함에 가까운 감정이 갑작스럽게 밀려왔다. 그리고 지금 저 사람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이성이 감정을 앞서기도 전에, 채유하는 지나가던 사람을 덥석 붙잡았다. 갑자기 붙잡힌 사람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시선이 마주친 순간,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제 눈에 눈물만이 흘렀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아무런 말도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제 입은 움직여 그를 향하고 있었다. 울음이 가득한, 떨리는 목소리 그대로 저는 그를 불렀다.
“오랜만이야, 찬오야…”
“…저 알아요?”
“아니… 모르겠어요. 모르겠는데…”
그 말에 채유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누군지 모른다.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우는 건 저인데 흐르는 눈물의 의미도, 찬오라는 이름도, 애틋한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저조차 의문인데 왠지 그를 그렇게 불러야만 할 것 같았다. 너를 불러야만 할 것 같았다. 계속 떨어지는 눈물에 눈을 문지르면서도 제 앞에 놓인 이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너는, 나 알아요?”
“아뇨, 모르겠어요…”
“그럼 왜? 넌 왜 우는 거야…?”
“…모르겠어요.”
이상한 일이다. 정말로. 제가 왜 우는지 모르는 것처럼 상대도 왜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모르는 이처럼 보였다. 우리, 왜 울고 있는 걸까. 이 의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 하지만 딱 하나,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를 마주하니 더 이상 제 마음이 답답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누군가 말할 필요없이 저절로 알게 된 기분이었다. 정말 오래 걸렸구나, 우리. 너를 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우리가 만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울음이 나는데, 웃음조차 흘러나온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벅찬 마음과 애틋한 마음을 담아 너에게 하고 싶은 말마저 떠올랐다.
“사랑해, 사랑해. 찬오야… 나, 줄곧 너를…”
*
제가 붙잡은 상대는 한참동안 돌아다녔던 건물에서 전공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이름은 손찬오, 저보다 조금 높은 키에 갈색머리, 짙은 초록색의 눈을 가진 이였다. 둥그런 안경을 쓴 탓에 저보다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제 예상대로 저보다 한 살 어린 사람이었다. 거기까지 설명을 듣고나자 점점 더 익숙한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조금은 다르지만, 제게 있어 소중하고, 줄곧 기다렸던 사람. 당연히 그를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손찬오라고 소개한 이도 저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며 말을 늘어놓았다. 그가 가장 답답함을 느낀 순간은 뻔하게도 제가 자주 다니는 전공 건물이었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이런 걸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그를 만났을 거란 생각이. 붉어진 눈가로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그 또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간다거나 이제 헤어지자고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 저를 놓칠까 겁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면 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제 입을 꾹 누른 채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제가 고개를 돌려도 저를 향한 시선은 그대로 느껴졌다. 그가 무엇이 두려운 건지 가늠되지 않았다. 아마, 당사자인 본인도 잘 모를 것이다. 한참 운 탓에 목을 가다듬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미소를 지었다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내 이름은 알아요?”
“방금 생각났어요. 유하, 채유하. 맞아요?”
“응, 맞아요.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내 이름을 안다는 건 꽤 이상한 기분이네.”
“…아까 내 이름이 들렸을 때, 나도 그런 기분이었을걸요.”
“아하하, 그렇네.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요.”
“왜요?”
“…그냥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말에 제 고개를 절로 기울였다. 전생이란 게 있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난 운명이라면 전생의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저라도 제 연인이 사소한 일에 사과하는 사람이었다면 안 그러길 바랄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확신은 들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 사이에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우리가 정말 운명이라 다시 만난 거라면 서로에게 서서히 스며들 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갑작스럽게 만났고, 혹여 지금마저도 놓칠까 두려워 하고 있었다. 이 우연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기회…인지도 몰라요.”
“기회?”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나한테 기회를 준 기분이 들어요.”
“우리가 만날 기회를 말하는 거예요?”
“아뇨, 아마… 내가 당신한테 인사할 기회인 것 같아요.”
전생을 어떻게 살아왔든, 우리는 결국 지금 만났고 지금을 살아가야 한다. 누군가 제게 손을 뻗어야 나아갈 줄 알았는데, 그를 만나니 손을 먼저 뻗는 건 제 쪽이라고 느껴졌다. 채유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찬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까는 울면서 말하느라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말을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된 지금 제대로 하고 싶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마치 아는 사람처럼 얘기하는 건 여전히 쑥스러웠으나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들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아줄 거란 확신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이야, 찬오야.”
“… …”
“나랑 같이 있어줄래요?”
이름을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그가 제 물음에 웃으며 손을 덥석 잡았다. 어떻게 끝난 이야기라도 해도 상관없다. 내가 네 손을 잡고 빛으로 걸어간 날, 저는 아무래도 좋았다. 너와 있던 모든 순간이 행복이고, 삶 그 자체였다. 그러니 지금은 네가 내 손을 잡고 나와 같이 걸어갔으면 좋겠어. 겪어본 적도 없는 감각이 떠오르고 그에게 전할 말이 생각나는 건 분명 제가 한 선택이 전생의 제가 바란 것이란 의미겠지.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우리는 분명 또다른 우리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
‘안녕, 너 저기 살아?’
‘만나서 반갑다는 말은 거짓이 아냐, 믿어줘.’
‘잘 있어, 찬오야. 나는 네가 있어서…’
만약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 그때가 있다면 난 네게 먼저 건네는 인사가 이별의 인사가 아니길 바라. 우리 참, 오래 돌고 돌았잖아. 그게 우리의 운명이라면 다시 돌고 돌아 만날 수 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생각하면 죽는 게 그리 두렵지 않아. 나, 정말 오래 기다렸어. 네 손을 잡기까지 정말 오래… 그러니 이번에는 네가 기다려줄래? 내가 너를 잡을게. 그때가 오면 우리 다시 웃으며 인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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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찬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