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파이널판타지14의 ‘암흑기사’ 50~80레벨 잡 퀘스트 (글로벌 서버)와, 5.0 ‘칠흑의 반역자’ 까지의 메인 스토리 전체를 관통하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께서는 감상을 재고해주세요!
*칠흑의 반역자 스토리라인 일부 대사 및 나레이션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발이 점차 거리를 덮어간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어떤 이의 발걸음이 멎을지언정 발자취는 결코 끊기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남은 이들에 의해 그의 의지와 기억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 ... 그리고, 산 자가 죽은 자에게 집착할 때, 이미 죽어 없어진 이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용서를 비는 것밖에 할 줄 모르던 푸른 머리 아이가 그걸 증명했다. 열네 갈래로 조각난 당신의 혼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보았던 어떤 아씨엔도 그걸 증명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당신이 끝끝내 간직하고 놓아주지 않던 기억의 파편인 우리는 당신에게 이별을 고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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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세계가 멸망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뒤, 당신은 제일 먼저 성도를 찾아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성도는 시끌벅적했다.
전쟁 이래로 줄곧 폐허뿐이었던 창천 거리는 어느새 실력 있는 장인들의 집합소로 변모했다. 그리다니아와 림사 로민사, 울다하에서, 저 멀리 모르도나와 기라바니아, 오사드에서... 활짝 열린 대심판의 문 너머로 낮선 이들이 쉴새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갖가지 언어들이 다채롭게 뒤섞였다. 재건에 쓰일 각종 부재들을 나르는 소리, 공구 소리며 짐마차 소리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침묵에 휩싸여 있었던 안개 거리를 뒤덮었다. 당신으로부터 비롯된 세상이었다.
당신의 주머니는 이미 디아뎀 제도로 향하는 비공정 티켓들로 가득하다.
혹여 누군가 용시전쟁을 끝낸 영웅을 알아보지는 않을까, 당신은 칙칙한 갑주를 잠깐 벗어두고, 대검 대신 장인의 증표와 도구 일체를 들었다. 간단한 작업복과 앞치마를 두르고, 해방군 쪽에서 -헥스트 사령관 명의로- 선물로 보내온 알라미고 전통 가운을 입고, 재회시장에서 나름 바가지를 쓰고 구입한 -'이 근처 부족이 아니긴 하지만, 당신도 젤라니까 취향은 비슷할 거 아니유? 한 번 믿고 사 보슈, 초원의 전사 양반!- 아짐 대초원 양식의 로브를 슬쩍 뒤집어 써 얼굴을 대강이나마 가렸다.
총천연색의 유목민풍 후드가 성도의 칙칙한 돌 벽과 눈 덮인 바닥과 극명하게 대비될 법한데도, 당신의 옷 자체는 놀랍게도 그닥 시선을 끌지 않았다. 당신의 얼굴 끝자락을 덮는 비늘과, 양쪽 귀가 있을 자리에 길게 돋아난 검은 뿔 또한 마찬가지였다. 창천 거리에 제 이름을 새기기 위해 세상 곳곳에서 걸출한 솜씨를 뽐내는 모험가며 장인들이 몰려왔고, 그 중에는 온갖 특색 있는 장비며 옷들로 넘쳐흐르는 개성을 표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자들도 당신 예상보다 훨씬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눈길을 끈다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키였다. 하여간, 쓸데없이 길어가지고는. 시드와 리엘이 당신 손에 맞는 대검과 그에 어울리는 갑주를 찾아 주기까지 얼마나 생고생을 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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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품 과정에 무슨 문제라도 발생한 건지, 신전기사단 사병 몇몇이 동방에서 온 렌족 장인들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용족을 닮은 뿔과 비늘을 가진 수많은 이들이 이를 대놓고 드러내고 다니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신전기사의 검이 아닌 빼어난 솜씨에 대한 찬사다.
당신도 나도 얼굴을 모르는 안개 거리 아이들 몇몇이 줄지어 달려온다. 도토리를 문 다람쥐처럼 재빠른 녀석들 몇몇은 토대가 되는 돌들 위를 쏜살같이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거나, 나무로 만든 대검을 들고 암흑기사를 흉내낸다.
프레이 미스트의 기억은 안개 거리에 새 모습을 입혀 주고, 굳이 시간까지 들여 이 곳까지 찾아와 준 당신에게 깊은 감사를 느낀다. 당신의 환영은... 글쎄. 내가 당신에게 드는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웅의 환영은 그 곳에서 소년 프레이 미스트와 그의 사형을 본다. 프레이 미스트의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는, 후드를 뒤집어 쓴 땅딸막한 아이의 잔상을 되새겨본다.
구름안개 거리의 고아 프레이 미스트는 그 곳에서 미래를 본다.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지만, 당신이 그를 위해 대신 선사해 준 미래.
암흑기사 프레이 미스트는 그 곳에서 이별을 본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거리에,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어떤 기사가 설 자리는 없다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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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안녕, 반갑되 반갑지 않은 거리여. 안녕, 두 세계의 거리를 걷는 여행자여. 부디 잘 있기를.
이제 과거의 아픔을 잊고 새로이 나아가야 할 때다. 성도가 그랬듯, 당신도.
우리는 여관으로 돌아온 당신의 몸을 잠깐 빌려, 당신의 손으로 펜을 들고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당신의 유려하게 흘려 쓴 필체와도, 프레이 미스트의 삐뚤빼뚤한 필체와도 닮아 있는 글씨 한 자 한 자마다 우리가 전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았다.
오랜만이야, 바샤드.
간결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종결의 편지이자 이별의 편지였다. 시간이 좀 남았길래, 당신이 모험을 간간히 기록해둔 일기장에도 장난을 좀 쳐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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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를 처음 만난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 위, 보라색 붓꽃 한 송이가 바람에 실려 아득한 구름바다 저 너머로 날아갔다. 여행자를 위한, 추모와 이별의 꽃이었다.
아, 나는 당신이 나를 이대로 놓아주길 바랐다. 그렇지만 당신은 이번에도 나와 함께 할 것을 선택했다.
사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어떤 존재보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당신도 그토록 나를 사랑하는데, 당신이 어떻게 나를 포기하고, 내가 어떻게 당신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을까.
잠깐의 타협 후에도, 여전히 미련 넘치도록 나를 붙들고 있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쉽게 포기치 못하는, 당신처럼 선하고 자유로운 이에게 이별은 이름뿐인 것을.
네 여정은 아무 수확 없는 허드렛일일 뿐이라고, 끊임없이 우리의 몸을 혹사하는 당신에게 우리는 소리쳤다. 제발 살아달라고. 당신을 범접할 수 없는 전사로, 무적의 병기로 보는 세상보다 당신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을 더 소중히 여겨달라고.
그러나 우리는 몰랐다- 당신은 알고 있었겠지만. 무한한 선의가 기억을 낳고, 무한한 기억에서 다시 선의가 비롯됨을. 그것이 당신이 여정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음을.
제 뿔과 비늘을 숨기는 데 급급했던 구름안개 거리의 작은 아이가 그리다니아로 도망쳐 나와, 활을 쥐고, 때때로는 창을 잡고, 마침내 대검을 들기까지. 여행을 시작하고, 영웅이라 불리고, 나를 받아들이고, 나와 타협하고... 너무도 강하지만 너무도 여린 그 마음에서 비롯된 걸음이 두 개의 세계를 구해내기까지. 당신의 모든 발자취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세계 저 편의 누군가를 보면서 깨달았다. 노르브란트의 심장에 세워진, 수정처럼 빛나는 반역의 도시. 그 중심에 서 있던 이를.
당신이 엿본, 그의 과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도 일어선 사람이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묵묵히 앞만 보며 나아가는 영웅. 그가 내딛었던 발걸음 하나하나가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이야기가 되어 절망의 시대 곳곳에서 빛나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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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기 뒤의 인간들은 당신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도록 멸망에 저항했다. 끝내 정해진 운명에 반역했다.
기술은 자유를 위해! 문명의 잔해와 이를 둘러싼 야만인들 속에서도 끝끝내 이어져 온 표어 아래, 잊혀진 세계의 마지막 항거자들은 아득한 과거를 향해 수정으로 이루어진 방주를 띄웠다.
저 멀리 빛나는 별과 같은 그 사람에게 우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다 같이 이렇게 말해주자고. 당신이라는 영웅이 걸어간 발자취는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우리들의 희망이었다고.
이백 년, 그리고 백 년의 세월을 넘어 당신을 기다려 온 사람이 있었다. 재해로 무너진 세계의 긴 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로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그리 인도한 건 당신의 발자취였다. 당신은 그들에게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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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유구한 시공을 건너, 시간을 초월하라.
잠에서 깨어난 탑의 주인은 후드를 눌러썼다. 붉디붉은 눈이 당신에게 보이지 않도록.
당신을 향한 부름에 끝은 또 다른 시작이 되었다.
그것은 기계장치 야만신이 수많은 시간선 사이에서 계측해낸 희망의 결론이었고,
별의 바다를 건너 온, 누구보다 고독했던 병기가 한 명의 인간에게 맡긴 미래였다.
생각해 보면, 당신에게 내가 그토록 가르치려 노력했던 암흑기사의 극의를 당신은 처음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신이 만나온 모든 이들과 거쳐온 모든 여행길이 곧 희망이었음을,
'허구에 당신을 숨기고, 죽은 이에게 삶을 불어넣고, 목소리 잃은 자에게 목소리를 주는' 그 사랑의 주체는 나였음을.
영웅이라 칭해질 수 없는 치부, 가장 고통스럽고 슬픈 내면에게조차 손을 내밀어 그를 제 일부로 맞아들인 어느 영웅이라면, 그 날 전초기지에서 내게 답을 주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올곧이 당신의 선의로 인해 존재할 수 있는 당신의 환영은, 지금 여기 남아 있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모든 이들을 수호하며 누구보다 앞서 발걸음을 옮기는 영웅과는 달리, 암흑기사는 오직 지켜야 할 존재만을 지킨다. 우리는 "심연에서 타오르는 불꽃", 즉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들을 위해 품는 사랑에서 힘의 원천을 얻는다. 그것을 암흑이라는 말로 쓸데없이 포장하면서까지 말이다.
프레이 미스트는 그가 지키고자 하던 이들을 사랑했다. 그건 당신도 동일하다. 지키고자 하는 것들에 대가 없는 사랑을 주는 당신은 정말 모범적인 암흑기사다. 당신이 지키려는 존재라는 게 하나(혹은 두 개)의 세계 그 자체라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당신의 사랑은 별의 의지와도 같아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따스하게 보듬는다. 길 잃은 어린 양들을 무사히 집으로 이끄는 목자처럼.
그 사실은 당신이 여행의 첫 걸음을 내딛던 그 날부터, 노르브란트에 밤하늘을 돌려준 지금까지도 변치 않았다. 당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결과물인 내가 그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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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에는 결말이 있다. 종결은 곧 이별이다.
이것은 영웅에게 깃든 그림자의 서툰 사랑 고백 이야기,
종결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달콤 씁쓸한 결말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건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해진 운명을 거역하는, 결코 종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반역자들의 이야기.
과거와 현재의 대치. 완전한 존재에 항거하는 불완전한 이들의 외침과, 그들의 반역이 세계에서 빛을 몰아냈다. 그 중심에 선 나의 유일한 공범자에게, 나는 자랑스러움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이별은 또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다. 당신의 눈물과 분노와 힘이 어떤 망자의 의지와 융합해 응축된 존재는, 그렇게 당신으로 인해 사라지지 않고 이어진다. 심연의 안개(Myste) 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처럼. 그것이 우리의 답이자 타협이고 종결이다.
당신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칠흑 같던 어둠이 끝나고 등불 빛에 이끌려 새벽이 찾아올 때,
증오로 얼룩진 눈이 녹고 창천의 거리에 봄이 올 때,
백 년 만에 돌아온 밤의 장막이 범람을 넘어 세상을 비출 때,
유구한 바람 불어오는 곳으로 당신은 계속 걸어가겠지.
빛으로 가득한 세계에 어둠을 되돌릴 때까지 절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고고한 기사여. 또 함께 여행을 떠나자, 네가 가는 길에 우리는 줄곧 함께 할 테니.
이것은 두 세계에 희망을 가져온 어느 영웅의 모험, 그리고 그 곁에 머무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어둠의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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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가 없는 나는 이제 당신의 몸을 빌리지 않고서도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심연 속에 잠겨있던 나를 (자의로든 타의로든) 불러내는 방법을 깨우쳤더군. 그 푸른 머리 꼬맹이가 당신에게 귀띔해주었거나, 아니면... 당신이 그 정도로 우리를 아끼고 있었다거나. 정말이지, 당신이라는 사람은!
단 몇 분밖에 유지될 수 있는 불완전한 형태지만, 그 순간 나와 당신은 서로의 목소리를,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리라
그대의 아득한 여정도, 길을 양보한 누군가의 존재도.“
크리스타리움의 승전 축하연이 끝난 뒤, 펜던트 거주관. 침대에 눕혀진 당신의 몸에서 슬며시 빠져나온 우리는 펜을 들어 이 기록의 마지막 문장을 적는다.
그러니 잘 지내, 바샤드.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너를 사랑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