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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어, 찬오야. 나는 네가 있어서…’

 

 

*

 

 

손찬오는 느리게 눈을 꿈벅거렸다. 눈을 뜨고 보이는 게 잠에 들기 전과 똑같은 풍경이었으나 평소 보이던 분위기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화랑이 된 이후, 좀 더 바쁜 삶과 부지런한 생활에 맞춰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데도 요즘따라 더 이른 새벽에 눈을 뜨는 날이 많았다. 이에 대한 이유는 알기 어려웠다. 불안감에 휩싸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혼자 착각에 빠진 걸지도 모른다. 새벽에 눈을 뜨던 시기에 맞춰 꿈에 너의 모습이 나온다. 보이는 모습은 지금 알고 있는 모습과 다를 게 없었지만,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는 모습이나 저를 올려다 보며 수줍게 웃는 얼굴은 제가 너를 보고 처음 반한 순간과도 같았다. 그 꿈에서 너는 말을 한다. 다만 네가 꿈에 나타나 내뱉는 말은 끝맺은 적이 없었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두고 가는 건 너의 일이 아니라 저의 몫이었기에. 너를 밀어내는 게 제게도 고통인 걸 알면서도, 결국 너를 밀어내야하기에. 손찬오는 저를 두고 떠나는 채유하의 모습은 한순간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

 

 

“요즘 상태가 전보다 더 나빠졌다는데.”

“…소식은 들었어.”

“그거야 그렇겠지. 형님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세민은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에, 이제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인데 상대에게 몸상태를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겠지. 서로에 대한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당사자의 성격이 어떻든, 주변인들 눈에도 뻔히 보이는 모습을 가장 잘 아는 이에게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습관처럼 좁혀진 미간은 최세민의 기분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었다.

 

 

“처음부터 알았잖아.”

“… …”

“형님.”

“알았다고 해서…”

 

 

알고 있었다고 해서 다가오는 이별에 아무렇지 않을 수 없잖아. 손찬오는 의자에 앉아 입을 다물었다. 오늘만 해서 세번째, 채유하가 길에서 쓰러진 일이 벌써 세번째였다. 몸이 좋지 않아 저를 낳자마자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와 비슷하게 앓아누워 수발을 들어야 했던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이가 오래 살지 못할 거란 운명은 꽤 뻔한 이야기였다.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진 것도 아니었다. 낌새는 있었고, 그의 외출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그가 발걸음을 하는 대신 손찬오가 찾아가 다가오는 순간을 외면했을 뿐이었다. 손찬오는 책상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꽉 쥐었다.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괜찮지 않으면 어떡할 건데. 너도, 나도…

 

 

‘왜 피해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기다렸어요.’

 

 

그를 사랑한 뒤에 처음으로 내뱉은 진실과 고백이었다. 저는 6두품이고, 무늬라고 해도 진골인 너라서 피했다는 것도 거짓은 아니었다. 신분에 맞지 않는 사랑의 결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손찬오였다. 그게 네가 살 길이고, 내가 널 하루라도 더 오래 볼 수 있는 법이었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놓을수록 다가오는 걸음에 멀어지길 포기하는 일도 손찬오의 선택이었다. 다가가는 일은 지금까지 저의 몫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일이 너의 몫이 되어서 더 이상 너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면, 혹여 너를 죽음으로 몰아 넣을까 걱정된 일이 되려 우리가 같이 보낼 시간이 짧아지는 행위였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상태에 대해 외면하고 있던 건, 오로지 저 자신 하나 뿐이었을 줄은.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제 신분을 바꾸는 일도, 네게 약을 권하는 일도, 한계가 있고 평생을 약속할 수 없는… 힘을 준 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푼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처지가 저를 가장 비참하게 만든다.

 

 

 

*

 

 

“몸은 좀 어때.”

“…어제보다는 좀 나아졌어요.”

 

 

채유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말하였다. 원체 남 속이기에 재주가 없는 이가 흔히 보이는 습관이었다. 거짓말인 거네. 손찬오는 그리 생각하며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그가 내뱉은 거짓말에 저도 거짓으로 대응하는 꼴이다. 상태가 나아졌다는 말이 거짓인 건 그의 습관을 보지 않았어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의 방에 들어서기 전, 몇 없는 하인에게 물어봐 상태를 물어본 참이었으니. 기침소리가 잦아졌고, 피 묻은 천 따위를 숨기려 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괜찮은 상태일 리가 없었다. 왜 거짓을 말하냐고 되묻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 중에 거짓을 가장 많이 내뱉은 이는 손찬오였고, 스스로도 알만큼 거짓을 말하는 이유 또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이 죄라면, 그에 맞는 형벌을 받고 있는 셈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거짓으로 제게서 멀어진다. 네가 겪은 게 바로 이 기분이었는가. 손찬오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오늘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최세민이 또 제게 대들었다거나 이제 길가에는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들. 거짓된 하루가 또다시 지나간다.

 

 

*

 

 

아, 또다시 그 꿈이다. 흑색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저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이며, 말을 건넨다. 무어라 내뱉은 말이 끝을 내고 입술이 닫히면 기다렸다는 듯이 새벽녘에 눈을 뜬다. 차가운 공기가 제 주위를 감싸고, 불안감에 휩싸이면 손찬오는 팔로 제 눈을 덮었다. 언젠가 듣게 될 마지막 말을 끝내 듣고만 탓이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리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려도 흐르는 눈물은 가려지지 않는다. 나는 괜찮아, 괜찮아야 해. 괜찮지 않으면… 생각과 달리 한평생 진실된 말을 해본 적 없는 이가 제 진심을 담아 중얼거린다.

 

 

괜찮지 않아,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빠르게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최세민이 문을 열면 어느새 자리에 일어나 침상에 앉은 손찬오가 그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 붉게 물든 눈가가 보이지 않겠으나 침전된 분위기가 손찬오의 상태를 알려준다.

 

 

“형님, 누님이…”

“그래, …이미 알고 있었잖아.”

 

 

너도, 나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이들도. 괜찮지 않았어. 너를 밀어내던 순간들과 거짓을 내뱉던 순간들. 하나하나 전부 괜찮지 않았어. 눈을 뜨지 못하는 이에게 전하지 못한 진실은 영영 닿을 길이 없다. 만약에 말야, 아주 만약에. 우리에게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 네게 제대로 전하지 못한 진실을 전할 수 있을까. 그 삶에 거짓이란 없을까.

 

 

*

 

 

‘잘 있어, 찬오야. 나는 네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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