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2월 14일은 화요일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화요일이라면 다이무스 홀든은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그날이 발렌타인 데이라는 점이 그에게 아스피린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두통을 안겨주고 말았다.
성(聖) 발렌티노 축일이라고도 불리는 이날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위해 몰래 결혼을 성사시켜준 발렌티노 신부를 기리기 위한 날이었다. 수많은 성자(聖者)를 기리는 기독교 문화권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은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직도 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연인들이 있으니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다이무스는 생각했다. 사랑하거나, 존경하거나, 고마운 사람들에게 진심을 표현하기에도 훌륭한 기회였다. 일부러 발렌타인 데이에 마음을 고백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최근에는-많고 많은 선물 중에서-초콜릿을 주는 유행이 번지기 시작하면서, 다이무스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다이무스는 빈말로라도 친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를 동경하는 마를렌이나 다이무스와 결혼한 소피아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의 과묵함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오죽하면 그의 친동생 이글도 큰형의 침묵에 진저리가 난다고 할까.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면모나 정확성을 요구하는 업무태도도 주변 사람들과의 거리감을 좁히는 데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다이무스 홀든은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와 한 번이라도 같이 일을 진행한 사람이라면, 그의 능력과 합리적인 판단력, 그리고 침착한 성격을 높이 평가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무스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그를 편안하게 대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드물다는, 지극히 흥미로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기념일을 틈타서 마음을 표현하려는 이가 없다는 점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런 의도가 결코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이무스는 제게 감사와 신뢰를 드러내는 이들에게 마찬가지로 고마움을 표하곤 했다. 문제는 다이무스가 단 걸 못 먹는다는 점에 있었다. 애초에 그는 소년 시절부터 단맛을 특별하게 좋아하지 않았고, 눅진하게 녹아내리는 그 뒷맛은 늘 입안에 남아 그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 부담스러운 자극이 곤란해서 굳이 찾아 먹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남의 성의를 면전에서 거절할 정도로 무례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이무스는 이 시기가 되면 각오를 단단하게 다졌다. 이번 발렌타인 데이도, 이런저런 마음을 담은 초콜릿 산이 그의 책상 위에 솟아올랐다.
소피아는 그런 남편이 조금은 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 고지식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물에 담긴 호의를 고려해서 하나도 남김없이 먹는, 그 요령 없는 모습이 귀여웠다. 누가 듣는다면 소피아의 시력을 의심할만한 발언이었지만. 품에 한가득 초콜릿을 들고 귀가해, 고뇌에 얼룩진 손길로도 꾸준히 초콜릿을 까먹는 남편을 지켜보고 있다가도 소피아는 어느새 진하게 커피를 내려서 가져다주었다. 다이무스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산미(酸味)와 고소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원두를 이용해 뜨겁게 우려낸 커피였다. 그러면 다이무스는 아내가 준비한 커피를 마시면서,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고행길을 걸어갔다.
소피아라고 발렌타인 데이에 맞춘 선물을 주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기념일을 꼬박꼬박 챙기는 타입은 아닐지라도, 주변의 들뜬 분위기에 소피아도 반응하게 되니. 작년까지만 해도 다이무스가 초콜릿을 버거워하는 줄 몰라서 줬지만, 그와 결혼한 지 2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굳이 남편이 받을 초콜릿에 짐을 더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소피아는 이미 다이무스의 발렌타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물을 내민다면 다이무스가 얼마든지 받아주리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에, 하루 정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즐거움을 조금 나눠주고자 했다. 제법 사려 깊은 아내라고 자부하며, 소피아는 혼자 뿌듯해했다.
하지만 소피아는 다이무스를 간과하고 말았다. 발렌타인 데이라는 사실에도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은 탓에 조금 당황하며 다이무스가 안겨준 상자를 살펴본 소피아는 겉에 인쇄된 로고를 보고 내용물을 알아차렸다. 윤기 나는 붉은 리본으로 장식된 뚜껑에 인쇄된 로고는 유서 깊은 초콜릿 공방의 상징이었다. 가게 주인이 강퍅(剛愎)하기 짝이 없다는 소문을 들어서 직접 살 엄두도 나지 않던 초콜릿이었다. 예기치 못한 선물에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아내를 뒤로 한 채, 다이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상자를 소피아에게 건네주고 출근했다.
* * *
소피아는 거울을 통해 보이는 제 모습을 한번 확인하다가 모자를 끄트머리에 달린 깃털이 꼬꾸라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고쳐 썼다. 보통 헬리오스에 다이무스를 찾아올 때는 미리 자신의 일정을 일러주었지만, 오늘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 반, 남편을 은근히 놀라게 하고픈 마음 반으로 소피아는 걸음을 옮겼다. 이미 안면을 익힌 경비원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소피아는 손가방에서 작은 초콜릿 상자를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해피 발렌타인 데이!”
다이무스의 사무실은 그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듯이 깔끔하고 실용적이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이곳에 가끔 찾아올 꼬마 손님들을 위해 책상 위에 놓인 사탕 그릇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남편을 찾아오는 소피아를 위해 준비한 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본인에게는 필요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해두는 그 배려가 소피아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다이무스는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아내에게 들어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무슨 일인가. 의문을 매단 시선이 소피아의 낯에 닿았다.
“아내가 남편이 보고 싶어서 오는 게 뭐가 문제 되나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하는 아내의 말에 다이무스가 작게 미소 지었다. 분명, 소피아는 아침에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기 위해 왔을 것이다. 그는 짐짓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그럼 왔으니 점심이라도 같이 들지.”
“…아, 그럴 시간은 없고……. 사실은 당신 선물을 사러 가는 길에 들렀어요. 그래도 엄밀히 따지면 당신이 보고 싶어서 온 것도 맞죠? 아쉽게도 점심을 먹을 시간은 안 날 거 같네요.”
아니나 다를까, 소피아가 미안하다는 목소리로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손가락을 잠시 꼼지락거리던 소피아는 다이무스의 주변에 널브러진 초콜릿 한 조각을 집었다. 은박지에 싸인 초콜릿은 동그란 구 모양이었다. 그 초콜릿을 손가락 사이에 굴리던 소피아가 중얼거렸다.
“아직 뭘 줘야 할지 고민이에요. 근데 초콜릿은 이미 많이 받은 거 같으니까, 그 대신 나는 나만 해줄 수 있는 걸 해줄게요.”
가볍게 껍질을 까서 초콜릿을 입에 문 소피아가 허리를 숙여서 다이무스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평소보다 눈높이가 아래에 놓인 남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반듯한 이마와 짙은 갈색 눈동자를 담은 눈매, 그리고 선이 우아한 이목구비를 지나 볼에 난 흉터까지 시선이 닿았다. 흉터마저도 훈장처럼 보이게 하는 남자였다. 소피아는 속으로 감탄을 흘리고 제 입술을 남편의 입술 위로 가볍게 포갰다.
느릿하고 다정한 키스였다. 아내가 휘청이지 않도록 그녀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아준 다이무스는 고개를 비틀어 조금 더 가까이 입술을 겹쳤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물리더니 눌리면서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다이무스가 혀를 얽히려고 들자, 소피아는 한숨을 내쉬었다가 물고 있던 초콜릿을 그에게로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남편의 입가에 짧은 입맞춤을 흩뿌리면서 속삭였다. 촉촉하게 젖어 든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있었다.
“…나중에 집에서 봐요.”
인사를 남긴 소피아는 미련이 새어 나오는 남편의 품에서 벗어나, 사무실을 조용히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