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자의 주인은 누구?
-
엘리너는 심각한 얼굴로 세베루스의 책상 위를 응시했다. 펼쳐진 양피지들 옆 구석에 웬 푸른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온갖 책들과 마법약 재료들로 탁하고 어두운 색채가 가득한 방 안에서 상자는 단박에 눈길을 끌었다. 그것뿐이라면 이렇게 무거운 표정까지 지을 일은 없었다. 문제는 오늘이 밸런타인 데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두 사람이 사귄 후 첫 번째의 밸런타인이다. 그 탓에 엘리너는 며칠 전부터 세베루스에게 초콜릿을 줄지 말지, 이런 번거로운 기념일을 챙긴다면 그가 받아줄지 말지, 준다면 어떤 선물을 줄지 쓸데없이 다양한 번민에 빠져야 했다. 결론은 하나였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손에는 녹색 벨벳 리본으로 묶인 작은 잿빛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렇게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사무실까지 찾아왔건만 세베루스는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문만 열려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초콜릿처럼 보이는 수상한 상자만이 선객의 위치를 빼앗은 채였다.
“초콜릿……이겠지?”
일단 세베루스가 개인적으로 시킨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상자를 너무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요리조리 살펴보아도 단서가 될 만한 이름 같은 건 없었다. 안에는 카드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세베루스가 받은 선물을 몰래 열어볼 정도로 집요하게 도둑 같은 짓을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엘리너는 상자와 눈싸움을 하다가 한심한 기분이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누가 보낸 걸까? 솔직히 세베루스가 초콜릿을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차였다. 연인을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게 온당치 못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녀의 애정과는 별개로 세베루스 스네이프는 주변에서 그렇게 인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지, 한 사람이 그의 다른 면을 알아보았다면 다른 사람도 알아볼 법 했다. 그는 젊고, 똑똑하고, 특출하게 잘생긴 외모는 아니어도 말하고 움직이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곁에서 오래 머문다면 알 수 있을 숨은 여러 가지의 장점들을 헤아려보다가 엘리너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누구든 해가 지나며 마음이 바뀔 수 있고 올해에는 트리위저드를 맞아 다른 학교의 학생들까지 머무는 상태였다. 어쩌면 타교의 학생들이 낯선 이에게 끌리게 된 건 아닐까?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던 걸 깨닫고 잿빛 상자가 구겨지기 전에 손가락을 느슨히 풀었다. 실상 세베루스가 고작 밸런타인 초콜릿을 받았다고 다른 사람에게 끌릴 가능성은 몹시 낮았다. 그럼에도 숨겨둔 보물을 들킨 것처럼 초조해지고 만다.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다른 이가 빼앗아가지 않을 거라고 누군가 안심시켜주었으면 싶었다. 정말이지 바보 같은 감상이었다.
“엘리너?”
어디서나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살짝 조급하게 몸을 돌리자 역시 세베루스가 문간에 서 있었다. 눈썹을 조금 치켜세운 세베루스가 팔짱을 풀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아, 잠깐……들렀습니다. 어디 다녀오셨나요?”
“도서관에 들렀다 왔어. 오래 기다렸느냐?”
“아뇨, 그다지요.”
엘리너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그가 책상 위의 상자를 건드릴 순간을 기다렸다. 두꺼운 책을 내려놓은 손이 양피지를 정리하고, 깃펜을 꽂고, 빌려온 책을 다시 옮긴다. 무심한 손끝이 마침내 상자에 닿으려던 순간 세베루스가 딱 동작을 멈추고는 묘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
엘리너는 코앞에서 가려던 문이 닫혀버린 기분에 젖어 입술을 깨물었다. 미완의 긴장감이 관자놀이를 잡아당겨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애써 태연한 투로 툭 말을 뱉어냈다.
“그건 선물 받으신 겁니까?”
세베루스는 잠시 뭘 얘기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깨달은 듯 슥 손가락으로 상자를 책상 모서리 쪽으로 밀어냈다.
“이거 말이냐? 보바통에서 준비했더군.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사서 하는지 나로서는 모르겠다만 교수들에게 전부 선물한다던데, 몰랐던 모양이구나. 교수 휴게실에 가면 받기 싫어도 떠안게 될 거다.”
알았을 리 없었다. 교수 휴게실에 발을 들이기는커녕 아침부터 오간 곳이라고는 교실과 그녀의 사무실과 세베루스의 사무실이 끝이었다. 긴장이 탁 풀려 어깨가 느슨해지고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엘리너는 헛웃음을 짓고 책상 끝의 상자를 떨어지지 않게 도로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보니 그 겉면의 푸른빛은 보바통의 교복과 같은 색이었다.
“네……. 몰랐습니다.”
“그냥 네가 이걸 가져가도 난 상관없다만.”
“아뇨, 그래도 당신이 받으셨는데 저한테 떠넘기시면 안 되죠.”
바보 같은 오해를 떨쳐내니 안심된 탓인지 왜 아무도 세베루스에게 초콜릿을 주지 않은 걸까, 역시 싸늘하게 거절할까봐 그러는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설마 내 선물까지 그렇게 거절하시진 않겠지. 아직도 들고 있던 작은 상자가 새삼스럽게 의식되었다. 아직 세베루스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건네든 숨기든 빨리 결정해야만 했다.
“그런데……너야말로 손에 뭘 들고 있는 거냐?”
아니, 이미 늦었다. 세베루스의 시선은 명확하게 그녀의 손 안의 수상한 상자를 향하고 있었다. 엘리너는 다소 허둥거리면서 무심코 상자를 품에 끌어당겼다. 어쩐지 세베루스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들고 온 걸 보면 제법 자랑스러웠던 모양이지. 아무리 오늘이 그런……날이라고 해도 네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
명백한 빈정거림 뒤로 급속도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엘리너는 입술을 앙다물고 세베루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반쯤은 노려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시선이었다. 밸런타인 같은 행사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으나 선물을 준비한 사람 앞에서 이렇게까지 신랄하게 말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냥 다음부터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걸로 충분히 알아들었을 텐데. 눈앞의 세베루스의 표정도 그녀만큼이나 불편해보여 더 목구멍이 쓰렸다. 그래도 이런 작은 번거로움을 즐거움으로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는 사이가 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을 그랬듯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제가 드리는 게 싫으시면 그냥 그렇다고 말씀하세요.”
“대체 누구에게 받았기에 그러는 거냐?”
울컥 내뱉은 말 위로 묘하게 애가 타는 추궁이 겹쳐졌다. 이쪽으로 몸을 훅 기울였던 세베루스의 눈이 순간적인 의문을 담고 그녀와 마주쳤다. 서로의 눈빛이 마치 거울 같았다. 엘리너는 느리게 손가락의 힘을 풀어 상자를 내보이면서 당혹스럽게 한 단어씩 입술을 달싹였다.
“누구에게……받았……냐고요?”
“……주는 거라고?”
세베루스가 엘리너 못지않게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그의 광대뼈 위로 확 핏기가 올랐다. 매끄러운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말을 이어냈다.
“왜 그렇게 들고만 있는 거냐? 그러니까 오해했잖느냐.”
“저 상자가……아니, 그보다, 당신에게 드릴 선물인 게 당연하잖습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너 말고 누구에게 내가 밸런타인 선물 따위를 받는다고 저걸 신경 써?”
일부러 흐려낸 부분을 굳이 명확하게 꼬집는 말에 그녀의 얼굴도 홧홧해졌다. 그냥 상자를 내밀기만 하면 되는 작은 일인데 왜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엘리너는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 세베루스의 가슴팍에 상자를 팍 밀어붙였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손이 잿빛 상자를 받아내는 걸 확인하고 얼렁뚱땅 꼬이는 혀를 움직였다.
“그건 어쨌든, 지금 드렸으니까 됐잖아요. 받으십시오. ……받으실 거죠?”
“그럼 버리기라도 하겠냐?”
“다른 사람에게 넘기신다든가.”
“내가 왜 그런 짓을 하지?”
턱도 없는 소리 말라는 양 준엄하게 찡그린 낯이 오히려 안심되었다. 제대로 그의 손에 초콜릿이 올라간 것을 보자 뻣뻣하던 목이 부드러워지고 몸에 힘이 빠졌다. 그제야 느슨한 미소와 함께 가벼운 대꾸가 나왔다.
“저건 저한테 넘기려고 하셨으면서.”
“그건……이것과 다르지. 한 번 말실수를 했다고 너무 놀리는 것 아니냐?”
“그런 건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세베루스가 퉁명스럽게 내쏘면서 책상 서랍을 열고는 초콜릿 상자를 쏙 넣어버렸다. 엘리너는 어처구니없음 반, 기꺼움 반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놀리는 것 아니냐’니, 그녀가 긴장한 모습을 뻔히 봤으면서 이거야말로 놀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엘리너는 책상 모서리에 살며시 몸을 기대어 세베루스의 눈을 뚱하게 들여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도 잔뜩 빈정댄 사람이 누구인데 어째서 당신이 더 마음 졸인 사람처럼 말을 하는 거야. 살짝 심술이 솟아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눈앞에서 드시기 전까지는 안심 못 하겠습니다.”
“대체, 방금 전까지 내가 한 얘기는 귓등으로 들은 모양이군.”
“당신은 오늘이 ‘그런’ 날인 걸 싫어하시는 모양이니까. 제 초콜릿이 이대로 서랍 속에서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할 지도 모르잖아요?”
금방 화를 낼 것처럼 찌푸려졌던 마른 얼굴이 문득 엘리너를 한동안 들여다보고는 오묘하게 뒤섞인 표정으로 변했다. 긴 손가락이 입가를 한 번 난감하게 매만지고 서랍 속으로 들어가 상자를 도로 꺼내어 리본을 잡아당겼다. 상자 안에는 여섯 조각의 다크 초콜릿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첫 번째 조각을 집어든 손가락이 천천히 입술로 올라갔다.
“만족했느냐?”
살갗에 묻은 코코아 파우더를 털어내며 세베루스가 비죽거리는 입매로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어쩐지 배로 안절부절 못하더니 몇 번 입안에서 초콜릿을 굴려 삼킬 시간이 지나고야 검은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세베루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숨결에서 희미하게 다크 초콜릿의 향이 번졌다.
“……예전부터 밸런타인을 좋아한 역사는 없다만……네가 선물을 하는 것까지 싫어하지는 않아.”
“아.”
작은 탄성이 새어나갔다. 결국 긴장한 걸 알아보시긴 했구나. 뒤늦게 부끄러우면서도 이 말을 위해 그렇게 뜸을 들였던 걸까 싶어 저절로 입꼬리가 풀렸다. 그의 이런 서툰 다정이 좋았다. 화가 나고 답답하고 서운하다가도 어설프게 건네는 한 마디에 모두가 녹아버렸다.
“도대체 그걸 말을 해야 아는 거냐?”
“당신이 이렇게 뾰족하게 구시니까 그렇죠.”
툴툴거리는 소리에는 가시가 없었다. 뻔히 알면서 타박하는 대꾸 또한 마찬가지였다. 엘리너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에 손을 짚고 몸을 뻗어 세베루스의 얇은 입가에 입을 맞췄다. 언뜻 벌어진 입술 틈으로 달고 쌉싸름한 초콜릿과 속을 채운 홍차 가나슈의 잔향이 흘러들었다. 엘리너는 부드럽게 눌렀던 입술을 떼어 그와 다시 눈을 맞췄다. 속에 차오른 말을 머뭇머뭇 속삭였다.
“당신이 아니면 이런 것,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아요.”
세베루스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직 코코아 파우더가 남은 검지가 살며시 엘리너의 입술 선을 누르고 떨어져 희미한 얼룩을 남겼다. 어느새 그가 고개를 숙여 입술 가까이에서 그래, 하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나도 마찬가지다. 얇은 피부와 피부 사이로 작은 속삭임이 겹쳐졌다. 그의 혀 밑에는 아직 초콜릿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혀끝으로 전해 받은 녹은 초콜릿은 그녀가 고르며 맛보았을 때보다 훨씬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