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샤, 이거 받아주시겠어요?”
스메르쟈코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앞에 놓인 상자와 꽃을 살펴보는 그는, 지금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나이다는 언제나 제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제 모든 것을 받아들여 주었고, 이해해 주었고, 때로는 지고한 존경까지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지나이다가 제게 품은 감정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를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사랑’을 말할 만큼. 지나이다는 제게 가장 친절한 사람이고, 지극히 다정한 사람이었다.
분명 그리 알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일까.
머리와 가슴의 부조화. 이성과 감정은 따로 논다는 걸 알려주듯, 거칠게 뛰는 심장과 달리 뇌는 과부하가 걸려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스메르쟈코프는 자신을 고장 나게 한 원인, 선물 상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가씨, 이건?”
“오늘은 밸런타인데이니까요. 별거 아니지만, 전해주고 싶었어요.”
제가 누군가에게 밸런타인데이 선물을 받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어떤 의미로는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자신을 가엽게 여기는 양모 마르파도 제게 다정하긴 했지만, 이런 선물을 챙겨주진 않았는데.
들고 있는 빗자루를 잠시 내려놓은 스메르쟈코프는 상자를 받아들고 뚜껑을 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도 잊어버린 그였지만, 지나이다는 언제나 그러하듯 상대의 행동을 개의치 않았다.
“와아.”
상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달콤한 향기가 아찔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감탄하고, 내용물을 만지작거렸다. 잘 다듬어 꽃 부분만 남긴 장미꽃과 초콜릿. 그리고 곱게 접힌 편지까지.
정성이 느껴지는 내용물에 눈앞이 아찔해진 스메르쟈코프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내 답했다.
“정, 정말 제가 이걸 받아도 될까요.”
“당연하죠. 파샤를 위해서 준비한 거니까요.”
“저만을, 위해.”
지나이다의 말대로, 그의 손에는 다른 선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른 시간에 왔으니 다른 누군가에게 이미 선물을 전달했다고 보긴 힘들 테니, 정말 제 것만 준비해 온 게 맞겠지.
달콤한 향이 날아갈까 봐 두렵기라도 한 걸까. 얼른 상자 뚜껑을 닫은 스메르쟈코프는 열이 오른 양 뺨을 손등으로 훔쳤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뭘요. 이런 건 처음 준비해 봐서, 마음에 들어 해줘서 기뻐요.”
“처음?”
“네. 밸런타인데이엔 늘 꽃만 팔았지, 제가 선물을 준비할 일이 없었거든요.”
수줍게 웃은 지나이다는 상처투성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오늘은 꽃이 많이 나갈 날이니, 밤새 판매용 꽃을 다듬다가 저리된 게 분명했다.
손가락 여기저기에 붙은 반창고, 굳은살, 검게 변색 된 피딱지.
제가 다치는 건 익숙하고 남의 상처를 보는 일도 전혀 개의치 않는 스메르쟈코프였지만, 어째서일까. 그는 저 작은 손을 뒤덮은 생계의 흔적을 바라보는 게 꺼림칙했다.
언젠가 부엌칼에 베인 상처가 욱신거리는 착각이 들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저렇게 손이 엉망이 될 때까지 일하면서도 제 선물을 챙겨준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좋아서 그런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그는 제게 주어진 행복을 품에 꼭 안았다. 훅 끼쳐오는 장미 향기와 초콜릿의 단내가, 복잡한 머릿속을 말랑하게 녹여주는 기분이 들었다.
‘나만의 것이구나.’
그는 이 불편함조차도 제게만 허락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저 손에서 성실함과 근면함, 그리고 동정심을 느끼겠지만. 제 마음속에는 그런 감정이 파고들 틈이 없었다. 이 마음속에 흘러넘치는 건 오직 야릇한 불편함 뿐.
너덜너덜해진 손으로 챙겨준 애정의 뜨거움에 데어 발을 구르는 이 마음을, 지나이다는 알까.
이러다간 초콜릿이 녹아버릴지도 모르겠다. 온몸을 도는 뜨거운 피를 진정할 수 없는 그는 지하실로 도망치기 전, 비장하게 다짐했다.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어요. 제가 좋아서 챙겨준 거니까요.”
“저도 아가씨가 좋아서 챙겨주고 싶은 거예요.”
자신답지 않게 낯부끄러운 소릴 지껄이고 있다는 걸 안다. 아마 표도르가 이 꼴을 보았다면, 요란하게 웃으며 손가락질하지 않았을까.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 스메르쟈코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실로 향했다. 우당탕 소리가 날 정도로 요란하게 계단을 내려와, 방을 밝히는 촛불 앞에 주저앉은 그는 상자를 내려놓고 심호흡했다.
언제나 자신을 반겨주는 어둠과 습기는, 데워진 몸을 식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머리가 식고 이성이 돌아온 그는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고작 밸런타인데이 선물을 받았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 자신이 어이없었지만, 이건 제 아가씨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제게 지대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기념일에 선물을 받지 못해 서운해하는 나이는 이제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크리스마스 날, 인심 쓴다는 듯 표도르가 물건이나 돈을 챙겨주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상이 가슴을 옥죈다. 제가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익숙한 공간에서 마음을 다스린 스메르쟈코프는, 손에 난 상처가 욱신거리지 않을 때 즈음에야 다시 상자를 열어보았다. 곧 일하러 가야 하니, 편지는 지금 읽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파샤에게.”
소리 내어 첫 문장을 읽자, 혀가 바싹 마른다. 목구멍이 뜨거워져 입을 다문 그는 조용히 눈만으로 글자를 읽어내려갔다.
사랑하는 나의 파샤에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무엇부터 써야 할지 망설여지네요. 저는 글재주가 없는 편이라, 어떤 표현을 써야 받는 이가 감동할지 어떤 비유를 해야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문장이 나올지는 잘 모른답니다. 그러나 이런 제게도 딱 하나 특출난 게 있다면, 그건 솔직함이겠죠. 말하지 않아도 될 건 말하지 않고, 듣고 싶은 건 뭐든 들려주는 제게 진실함은 없을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답니다. 파샤가 저를 좋게 봐주는 것도 제가 솔직해서라 생각하는데, 제 말이 맞을까요?
오늘은 밸런타인데이네요. 언젠가 들은 이야기인데, 밸런타인데이의 유래는 성 발렌티노 축일에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신을 믿지 않는 제가 성인의 축일에서 유래 된 행사 날,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는 건 아이러니 한 일일까요? 하지만 저는 얼굴 모를 성자를 축복하기 위해, 밤새 장미의 목을 잘라 온 건 아니랍니다. 유래가 어찌 되었든, 저는 제게 주어진 모든 걸 기회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지요. 제게 있어 오늘은 그저 사랑하는 파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기회의 날일 뿐이랍니다. 제게 기회를 주는 이가 있다면 그게 성자라도 악마라도 상관이 없어요. 그저 감사할 뿐.
신기하기도 하죠. 평소에 주는 꽃과 오늘 주는 꽃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
인간은 어쩜 이렇게 귀찮게도, 핑계와 기회가 필요한 걸까요. 그건 인간만이 수치심과 창피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지만 저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답니다. 이런 날이 없더라도, 저는 파샤에게 뭐든 줄 수 있는걸요.
하지만 그런 제가 굳이 이런 선물을 준비한 건, 이런 날 파샤가 빈손인 걸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사실 그게 제일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종이에 다 담기엔 편지지가 모자라네요.
남은 이야기들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요.
2월 14일, 지나이다 니콜라예브나 코즐로바가.
꾹꾹 눌러 쓴 글씨는 단정하고 정갈했다. 사람의 글씨는 본인을 닮는다던데,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손끝으로 글자들을 더듬으며 필압이 남긴 자국들을 느끼던 그는 베시시 웃었다.
‘아가씨의 온기…….’
고작 종잇조각일 뿐인데. 지나이다의 글씨가 담겨있다는 이유로 온기가 느껴지다니.
두 장짜리 편지지를 잉크가 번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던 그는, 슬쩍 편지에 입 맞추었다.
어떤 걸로 보답해야 이 마음이 전해질까.
그건 스메르쟈코프에겐 너무 어려운 숙제였지만, 그는 고민으로부터 도망치진 않았다.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야 말로 아름다운 거라고, 가르쳐 준 사람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