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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셴그로토의 50가지 그림자

 

 

1.

아즐 아셴그로토는 우울하다.

2.

그건 감독생 때문이다.

아니다, 그녀를 과연 감독생이라고 하는 게 옳은 일인지는 제쳐두고, 정확히는 근래 알게 된 하나의 사실 때문이다.

 

 

3.

아즐 아셴그로토는 몇 달 전, 오버블롯을 했다. 그 순간에 아즐을 향해 그녀가 말하길.

 

“당신이 쌓아온 노력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아즐은 문득, 그 순간 기이한 기시감을 느꼈다.

4.

그 말은 그녀, 유우야의 것은 아니었다. 우선 유우야는 당신(아나타)보단 댁(안타)라고 그들을 칭했고, 무엇보다도 아즐 아셴그로토가 아는 유우야는 그런 말을 할 위인이 아니다. 그 전까지 그럭저럭 잘 지내던 사이였기에 알 수 있는 일이다.

 

 

5.

그는 그에게 말을 걸어온 유우야의 첫마디를 기억한다.

 

“당신의 유니크마법을 이용하면 나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나?”

 

그 한마디 이후로 눈을 가늘게 뜨던 유우야는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 때 오겠다며 멋대로 돌아가 버렸다.

6.

아즐 아셴그로토가 아는 유우야는 그런 여자다. 한낮의 북풍처럼, 혹자는 그믐달처럼. 그리고 아즐이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생각할지까지는 생각지도 않은 것처럼, 혹은 모든 걸 알고서 해주는 조언처럼.

 

7.

그렇게 다가오는... 재해다.

 

 

8.

그에 반해 그 말은 북풍보단 따스히 내려쬐는 봄날의 햇볕같지 않았던가.

9.

그건 그 한마디 만은 아니었다. 유우야는 종종 본인의 평소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나레이션이라도 되는 듯 딱딱하게 들려줄 때가 있는 것이다. 차라리 대본에 적힌 대사를 대충 읊는 것처럼..........

 

10.

이때까지 아즐이 본 유우야라면 차라리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딴 몇 년 전 사진보다 오버블롯한 지금의 당신이 당장 내일의 흑역사일걸?’

 

아즐은 자연스럽게 유우야의 서툰 발음으로 구성된 목소리가 떠올라서 머리를 싸맸다.

 

 

11.

그럼 결국 생각의 끝에 남게 되는 건 의문은 단 하나다.

12.

유우야의 말이 아니라면 누구의 말이지?

이 말의 원주인은 누구였는가.

13.

아마도 유우야는 누군지 모를 그 말의 원래 주인을 흉내내 연기하고 있다. 그건 평소 남을 관찰하는 아즐이니까 알 수 있었다.

 

14.

아즐 아셴그로토의 고뇌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15.

유우야는 그러니까, 평소처럼 말했을 뿐이다.

 

“아셴그로트 선배, 도와줄 수 있어?”

 

그래, ‘감독생’이라면 이렇게 말했던가. 그리고 나서 아즐 아셴그로토는 분명…….

 

“싫습니다.”

 

“그래, 그럼… …뭐?”

 

유우야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왜?”

 

“지금의 유우야씨는 제게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죠? 돈? 마법?”

 

“…….”

 

 

16.

아즐의 태도가 변했다. 원래 ‘감독생’에게 같이 협력하고 도움을 주는 ‘캐릭터’였던 그가. 최근엔 유우야의 부탁을 도통 들어주지 않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남들에겐 안 보이는 순간엔 유우야를 피하거나, 불편한 티를 내기도 했다.

 

이건 그녀가 아는 아즐 아셴그로토의 태도는 아니었다. 스크립트 대로라면 아즐은 이렇게 말해선 안되기도 했고. 사실 아즐이 유우야가 아는 감독생과 아즐간의 스크립트에서 벗어나는 대사를 치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7.

어떻게 아느냐고 하면, 2N살의 나이에 한국서버가 없는 모 가챠겜을 하다가 강제로 전이당하고 회춘해서 플레이어의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누군가의 백스토리를 늘어놓아야 하기에 줄인다.

 

애초에 유우야라는 이름도, 한국 이름을 쓸 수 없었던 그녀가 “나는 유우...야.” 라고 인게임 이름을 말한 것을 크로울리가 ‘유우야’라고 불러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만.

 

 

18.

아마도 메인스토리 3장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그래, 그 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던가? ‘감독생’을 제법 성공적으로 흉내냈던 거 같다. 게다가 저 대사는 외웠던 것이기도 하기에 거리낌없이 내뱉을 수 있었다.

19

문득 그 대사를 내뱉고 나서야, 나라면 절대 안 할 말이긴 하다며, 생각하는 바가 생기긴 했다.

 

 

20

그런데, 뭐가 문제였는지. 그날부터 아즐의 태도가 변했다. 아마도 경계심같기도 하고, 의문이라 할 수도 있겠는... 두루뭉실한 상태로.

21.

그럼에도 그녀가 지지부진한 모른척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은 아즐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22.

혹시나 나 때문에 자기가 게임 캐릭터라고 깨닫기라도 한다면... 아즐에겐 너무 큰 재앙을 안겨주는 셈이 되지 않나. 그런 상황이라면 유우야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아즐의 의미심장한 태도를 겉으로 모른 척 하며 방치하고 있었다.

 

23.

그래서 유우야는 최근 곤란했다.

24.

아즐 아셴그로토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25.

아즐이 유우야의 부탁을 들어보지도 않고 지나간 이후, 유우야의 고민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묻혀졌다. 어차피 중요한 부탁도 아니었다. 그녀가 전이되기 전 세계에 있는 음식이 궁금하단 내용이었으니.

26.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다. 아즐도 유우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라기 역시 유우야에게 ‘제육볶음’을 만들어 줄 수 있으니, 그걸 부탁할 사람이 굳이 아즐일 필요는 없다.

27.

그래, 아즐이 적합한 이유는 있었지만, 아즐이 아니면 안되는 이유는 없다. 특히 아즐 측에서만 보자면 유우야를 찾을만한 일이라곤 없는 것이다.

28.

유우야는 그 사실이 아니꼬왔다. 비록 마법은 못쓸지 언정 나름대로 게임의 지식을 이용해서 적어도 원래의 감독생보다도 유능하게 살아온 유우야라서, 내릴 수 있는 합리적 판결이었다.

29.

아즐 아셴그로토는 유우야에게 필요치 않은 존재다.

30.

유우야의 난제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31.

여기까지가 유우야가 낼 수 있는 가장 객관적 결론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만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메인스토리를 ‘미는’ 행위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32.

그러나, 감독생의 알맹이는 꽤나 서운할 수 밖에 없다. 그전까지만 해도 잘 대하던 선배가 갑자기 태로를 싹 바꾸어 쌀쌀맞게 대해오게 되었으니. 게다가, 객관적으론 둘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으나, 주관적으로 유우야에게 아즐은 의미있는 존재였다.

33.

아주 일방적인 방식으로 유우야는 아즐을 알고있다.

34.

아즐은 탐욕스럽고, 동시에 그 탐욕을 적극적으로 진취하려 들지 않는가. 게다가 종종 자신의 흑역사를 아주 싫어하고, 인기가 많아지고 싶은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언제나 발전하려고 하는 성장기의 남자고등학생이다.

35.

유우야는 그런 아즐을 존경했다.

36.

게임을 하면서 게임캐릭터의 어떤 점이 닮고 싶어진 적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태초부터 남들에 비해 무욕적이며, 아주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인한 무기력을 달고 살았었다.

37.

그러니 자신의 대척점에 서있는 아즐을 존경했다. 나는 어떤 목표에 저렇게 열정적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보게 되었으니까. 돌이켜보면 유우야는 매번 문턱을 하나 내버려두고 돌아가버릴 만한 겁쟁이로만 살아왔으니까.

38.

자기자신과도 쉽게 타협해버린 입장에서 보자면, 저 문어인어가 가진 탐욕이 제법 부럽다고.

39.

이건 아마도 존경이 아니라 동경일거다.

그리고 동경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40.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말로는 아즐을 구원할 수 없고, 그렇기에 더욱 ‘감독생’의 대사를 따라한것이다. 아즐에게 본심을 내보이기보다, 아즐이 구원받을 수 있는 정답을 골랐다. 그야 당연하다. 언제나 신의 생각보다 답지가 더 중요하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41.

유우야가 아니라 감독생으로 살아야하는 순간이다.

42.

그리고 어느날, 아마도 누군가의 생일파티가 모스트로 라운지에서 성대하게 열렸고, 유우야가 그 뒷처리를 돕게 되었던 날. 아즐과 우연히 둘이서만 남았다. 유우야와 아즐의 거리는 두어걸음 띄워져 있었다. 유우야가 식탁을 닦으면 아즐이 냅킨이나 수저를 리필하는 공동작업이었다.

“그러고보면, 아셴그로토 선배랑 둘이 남는 건 오랜만이네요.”

 

 

“아아, 플로이드가 또 시프트 변경을 요청했기 떄문에.”

“흐음…. 의외로 응석을 받아주는구나.”

“네, 뭐…그게 의외의 행운을 물고 올 때도 꽤 있고요. 황금알을 낳는 메추리의 배를 가를 필요는 없죠.”

“아, 그거 내 고향에선 메추리가 아니라 거위고요. 여기도 역시 비슷한 것들은 다 공유되어있네.”

아즐은 맑은 눈동자로 유우야의 속을 꿰뚫는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렇다면 감독생 씨는요?”

“아니 방금…….”

유우야의 말은 잠깐 멈췄다. 아즐은 3장 이후로 유우야를 한번도 감독생이라고 부른 적 없다. 유우야와 아즐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이번엔 아즐은 가늠하는듯, 여유롭게 웃고 있었지만, 눈은 동시에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네, 감독생씨의 고향 말입니다.”

그건 마치 유우야와 감독생이란 존재를 따로 놓고 구분지어 부르는 듯한 어조였다. 유우야는 말을 돌렸다.

“그니까 뭘 묻는 거야. 내 고향?”

그게 아니란 걸 알지 않냐는 듯, 아즐은 안경을 한번 추켜올리며 입을 닫았다. 그 때 라운지로 플로이드가 아즐을 부르러 왔기에 그날 일은 그렇게 끝났다.

44.

유우야에겐 끝나지 않은 일이다.

45.

아즐이 어떻게 감독생을 아는 걸까. 유우야가 아닌 다른 감독생의 정체를.

46.

유우야에게 생긴 두번째 고뇌였다.

47.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해방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단 한명, 유우야가 감독생이 아님을 아는 누군가가 있다. 유우야의 모든 행동을 연기라고 알아챈 한 인어가 있다.

48.

유우야의 행동 중, 감독생에 대한 연기와 그녀 자신의 행동을 구분해내서 짐작할 수 있는 단 한명의 누군가.

49.

비록 아즐 아셴그로토는 그 사실을 알아챔으로 인해서 구원받지 못했겠지만…….

50.

그리하여 아즐 아셴그로토의 우울은 비로소 유우야의 존재증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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