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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미궁에 갇혀버린 건 우리가 아니었을까?"]

 

 

"내가 준 책은 다 읽었어?"

"응. 오는 길에 다 읽어봤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들만의 바캉스가 오늘부로 막을 내린다.

 

둘이서 함께한 3박 4일 여름 바캉스.

 

'목표물' 킨다이치 하지메가 근무하는 [오토와 블랙 PR 회사]에서 조만간 어떤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12신 헤파이스토스의 전언에 따라 각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곳에 숨어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는 '그'가 현시점 정체된 상황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여보겠다는 나름의 포부를 비춘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올림포스 12신 제도에 대해 재정비를 원하는 아레스의 의견을 수용하여 내년부터 휴가는 불가능, 올해의 마지막 바캉스가 될 거라 예상한 안나는 급조한 일정으로 항공권을 예약하여 일본을 떠나기로 하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파스텔 색상의 하늘, 보석같이 반짝거리는 비취색 바다, 그림에 그린 듯한 야자수와 모래사장. 일본에서는 먹을 수 없는 이국적인 진귀한 음식들, 국적 불문의 여행자들.

모두 모두 안나가 마음속에 그려둔 동화책에 나올법한 여행 풍경이었다.

남는 건 사진이라며 온갖 각도를 재가며 이 포즈, 저 포즈. 이 표정 저 표정, 출발한 순간부터 바캉스룩을 입은 채 서른 장 이상 셀카를 찍은 듯한 그녀는 휴대전화 배터리 소모를 핑계로 급기야는 켄의 휴대전화까지 빌려 추억으로 삼을 사진을 잔뜩 찍어대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휴양지에서 빠질 수 없는 폴라로이드 사진도 한 장.

남는 건 먹는 것과 사진뿐이라 주장하는 안나와 릴렉스한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켄.

서로 간 상반되는 두 사람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관계다. 닮은 면이라고는 하나도 없기에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끌린 거라 할 수 있겠지.

 

마지막 날,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길. 읽을거리가 없다며 면세점 팸플릿의 자투리 퍼즐을 심심풀이로 풀고 있던 그에게 '그러고 보니'라며 안나가 여행 가방에서 꺼내 든 것은 프랑스어로 쓰여 있는 양장본이었다.

숙소 근처를 탐방하다 발견한 자그마한 서점에서 구매한 따끈따끈한 신간 도서. 마침, 그녀가 좋아하는 작품의 신간 발매일이 여행 날과 겹친 것이다.

'럭키!'라 외치고는 책을 손에 쥐고 서둘러 계산대를 향한 그녀와 대조적으로 구석진 가판대에서 오래된 베스트셀러 책들을 훑어보다 몇 가지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는지 출판사를 꼼꼼히 체크하며 책을 구매한 그.

무언가를 구매하는 모습에서부터도 이 둘은 참으로 대조적인 커플이기도 하였다.

 

"심심풀이로 재미없는 퍼즐이라도 풀 바에는 이거라도 읽어보지 그래?"

 

'난 다 읽었으니까.'라며 아무렇지 않게 건네준 도서를 켄은 잠시 고민하다가 순순히 받아들였다.

도착할 때까지 묵묵히 독서 중인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안나는 이내 그 또한 질렸는지 휴대전화로 찍은 엄청난 양의 사진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이건 아니야.', '저건 아니야'라며 한참 동안 쓸만한 사진을 찾기 위한 분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이후, 서로 간 별다른 말 없이 공항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끝마친 후 귀가.

모든 에너지를 소모해 버린 그들은 짐은 내일 정리하는 거로 결정하고는 유유자적한 하루의 마무리를 지냈다.

시간은 어느샌가 어두컴컴한 심야를 향해갔다.

 

* * *

 

"어때? 이번 신작도 그냥저냥?"

"뭐… 그렇다고 할까?"

 

거실 소파에 앉은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휴가의 마무리는 여행 이야기가 아닌 귀갓길에 읽은 어느 도서의 이야기였다.

 

"그럴 것 같더라. 나는 좋아하는 결말인데 켄은 그렇지 않잖아"

 

안나는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화제의 그 책을 손에 쥐고는 차르륵 소리 내 페이지를 넘긴 후 책을 덮었다.

한 글자 한 글자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머릿속에 넣어둔 상태. 가벼운 단편선 모음집이라 굳이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좋게 말해 복잡하지 않은 대중적인 내용, 나쁘게 말하면 킬링타임 용도의 도서.

 

"여전히 모호하다고 할지. 횡설수설한다고 할지. 매번 결말마다 복선 회수를 못 하고 끝나버리는 느낌"

"…. 그렇군. 켄은 변함이 없네"

 

그의 혹평에 대해서 안나는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해당 시리즈가 발매될 때마다 독자들이 꾸준히 제기하는 대표적인 혹평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은 그런데 너한테는 취향이라는 거겠지"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혹여나 자기 연인의 기분이 상한 건 아닌지 살짝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안나는 추리 미스터리물을 선호하지도 않고 쓸데없이 잔인하고 자극적인 내용의 베스트셀러 작품 또한 읽지 않는 성향이다.

 

'마음이 동해야 볼 수 있는 게 좋아'

 

오래된 기억 속 과거, 세일러 교복을 입은 앳된 소녀가 그렇게 말했던 걸 그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요 몇 년 새, 미스터리 작품에도 흥미를 느끼고 조금씩 도전하게 된 것은 커다란 변화라 할 수 있겠지.

그 근본에는 켄 본인의 영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 작가'와의 만남이 가장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여류 추리 작가 [카네다 후미]의 작품을 읽고 처음으로 추리물에 흥미를 느끼게 된 안나는 그 후, 몇 차례 미스터리 고전 추리물에 도전해 봤지만 아무래도 본인의 성향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가 최근, 새로운 작가의 이름을 언급하기 시작한 거다.

그녀의 고향이기도 한 프랑스 출신의 작가. 유명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마니아층이 붙어있는 작가.

켄한테는 그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새롭게 와닿는 부분이 있는 듯싶었다.

 

"응. 난 이 사람들이 그려내는 일상 묘사가 좋더라"

 

'이 사람들'이라고 말한 이유는 작가가 두 명이기 때문이다. 무려, '쌍둥이'가 작가로 활동하며 서로서로 릴레이 소설처럼 이어서 쓰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독특한 활동 경력을 자랑하였다.

작품은 [미궁 시리즈]라는 이름의 시리즈물로 [미스터리 다크 판타지]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지만 이는 안나의 취향이기도 하였다.

 

"…. 묘사력 자체는 나쁘지 않아. 평소에는 쓰지 않는 참신한 단어를 채택해서 쓰는 경우도 있어서 재밌기도 하고"

"그렇지? 원래라면 그런 장면에 쓸 일이 없는 단어인데 대체를 시켜버리니까 내가 아는 일상과는 다른 느낌이 들더라고"

"…. '읽다 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라는 리뷰 평도 이해할 것 같아"

"그렇다니까. 동화책 읽는 느낌이라 재밌어"

 

그녀에게 있어 확하고 꽂히는 포인트 중 하나란 이런 부분인 거겠지

 

"…. 새삼 생각해 보니 마지막 단편이 가장 기억에 남더라."

"앗, 켄도 그렇게 느꼈어?! 나도 그래!"

 

'그도 그럴만한 게….' 라며 소녀는 중얼거리며 자그맣게 웃었다.

 

마지막 단편 소설. [미궁 시리즈]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리스·로마 신화를 본뜬 다크 판타지 스토리가 매 시리즈 전혀 다른 방향성으로 연재되고 있었다.

이 또한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있어서 시리즈물을 구매하게 만드는 커다란 이유라 할 수 있겠지.

 

"[크노소스 궁전이여, 무너져라.]라니 읽는 내내 떠오르게 없었다면 거짓말이지"

"…."

 

수십 년간 미궁에 갇혀 장애가 있는 채로 살아가는 왕자와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여 그로 인한 형벌로 미궁에 갇히게 된 주인공의 운명 같은 만남.

주인공은 왕자를 구하기 위해 미궁 속에서 수년간을 노력해 간신히 탈출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이 함께 탈출할 수 있는 탈출구가 아닌 오로지 단 한 명만을 위한 탈출구.

서로를 탈출시키기 위해 며칠간 반복되는 대화를 벌이다가 결국 둘이 함께 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 인 듯 보이나.

 

"실상은 잔인하다는 거야. 탈출구를 눈앞에 두고 두 사람은 자기가 살기 위해 어느 한쪽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거니까"

"…. 처음부터 그런 의도였으면 그렇게 전개를 시켰으면 좋은데 [둘이서 반드시 살아서 나갈 거다]라는 복선을 첫 장부터 잔뜩 뿌리고는 나중에 가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너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라며 역설하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식의 추악한 인간관계를 다룬 이야기는 켄 본인이 즐겨 읽는 부류 중의 하나이기는 하나 전 챕터 환상과 몽상을 다루던 시리즈물에서 갑작스럽게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그려버리니 오히려 그런 낙차가 불편했던 것 같았다.

 

"…. 나도 마지막 한 페이지를 남겨놓고 '둘이 함께 죽었구나!'라며 눈물이 핑 돌았는데…."

 

그런 게 아녔던 거다.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한 줄에는 [미궁을 탈출한 유일한 생존자가 눈부신 햇빛을 마주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이렇게 쓰여있는 게 다였으니까.

 

"…. 크노소스 궁전이여, 무너져라…. 나름 인상 깊은 마지막 한마디였어."

"그걸로 끝. 누가 죽었는지 누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채 그 미궁은 결국 무너져버린 건지, 아니면 지금도 남아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채. 모든 진실은 고양이 상자 속."

"…. 인상 깊다면 깊겠지. 다만 내 취향은 아니야."

 

만약 다음 시리즈가 나와서 안나가 읽어보라고 말한다 해도 그는 결코 손을 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성격의 남자인 거다.

 

"…. 있잖아. 이 대사 읽자마자 켄이 떠오른 거 알아?"

"나?"

"…. 그러니까"

 

켄이 아니라 아레스 쪽.

 

안나의 목소리 톤이 한 단계 낮춰졌다. 결코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녀의 말에 켄은 '아….'라며 무언가 말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듯 보였지만 이내 침묵을 지켰다.

 

"…. 켄이. 아니, 12신의 아레스가 [최면]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 그건…. 그러니까"

 

그야 당연하다. 그건 비밀 사항이니까. 평범한 인간에게, 심지어 켄 본인을 알고 있는 가까운 입지의 상대에게는 쭉 비밀로 해왔던 사항.

그가 가진 능력은 12신 내에서도 [기밀]로 통하고 있는 능력.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능력인 것이다.

그렇기에 안나에게도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12신과 관련이 없던 평범했던 시절의 그녀에게도 이제는 12신의 일원 [코레]로써 함께하는 현시점에도 그는 결코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아 했다.

어차피 알려질 거면 그녀에게 한마디 말은 해뒀어야 했다. 하지만 아레스는 그조차도 거절해 버린 것이다.

 

"…. 알고 있어. 어차피 [업무] 관련의 기밀 사항인 거고 그에 따른 명령을 받은 거겠지!"

"…."

 

명령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 다만 그렇다고 해서 같은 조직에서 일을 하게 됐음에도 그 사항을 함구한 것은 아레스 본인의 판단이었다.

 

"그래도, 그냥…. 나한테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 미안"

 

그 당시,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른다.

몰래 그를 따라와 멀찌감치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안나는 있을 수 없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레스로서 플랜을 완수하고 그 마무리를 위해 안나가 사랑하던 그 남자는 사뭇 당연하다는 듯 재킷 주머니 섶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어 상대방을 향해 흔들었다.

안나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닌 이상, 그것은 그저 회중시계로밖에 보이지 않은 물건. 칼도 총기도 수류탄도 폭탄도 그 무엇도 아닌 그저 평범한 시계에 지나지 않았던 거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상대가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아레스는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때 일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만 안나의 마음속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폭풍우가 몰아쳤다.

 

'어떻게 나만 모를 수 있지?'

'언제부터? 내가 아는 켄은 최면에는 흥미가 없었는데'

'그러면 대체 어디서? 누구한테?'

'…. 누구라니? 몰라서 물어? 그거야 당연히….'

 

아, 차라리 숨겨진 연인이 존재했다는 비밀이 나았을걸. 안나는 어디까지나 심심풀이 땅콩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고 선언하는 게 나았을걸.

이런 식의 [비밀]을 그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 12신에 들어간 이유도 정해져 있잖아'

 

켄을 알고 싶다. 오랫동안 그에 대해 알고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멋대로 장담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나는 알게 되었다.

안나는 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의 숨겨진 본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스스로[올림포스]라는 조직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간 것이다.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보여주지 않은 내면을 알기 위해 안나는 [코레]가 되어 조직에,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상대의 밑에 들어가 부하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처음으로 [전쟁의 신] 아레스라는 남자를 마주해버린 기분이었다.

두려움과 슬픔과 분노의 감정 그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망진창 질척질척

 

- 그거…. 어디서 배웠어? 내가 알고 있는 '켄'은 최면 따윈 비과학적, 비현실적이라며 믿지 않는 사람이었어 -

-…. 대체 누구한테 들어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알게 된 거 어쩔 수 없네. -

 

'실은….'이라며 주저하며 그는 자신이 숨기고 있던 그 무언가에 대해서 몇 가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첫 번째, 최면 기술을 가르쳐준 상대는 제우스. 그는 오래전 전설적인 매지션의 진정한 후계자였다.

두 번째, 업무에 최면이라는 기술을 활용하기 시작한 건 [아레스]로서 활동하고 나서. 그러니까 얼마 되지 않았다.

세 번째, 12신의 [아레스]는 최면을 사용할 수 있는 자.

 

금시초문의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

안나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아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은 채 그가 사실이라고 말한 세 가지 내용을 여러 번 마음속으로 곱씹었다.

 

'최면을 가르쳐준 상대? 글쎄. 과연 그럴까? 제우스가 아니지 않을까?'

'혹시 켄은 12신에 들어오기 이전에 최면술에 능했었던 걸까'

'그러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 관심 없는 척해왔던 걸까'

'아레스로서의 활동이라는 건…. 내가 아는 한, 시기적으로 얼마 안 됐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게 아닌 걸까?'

'…. 언제부터 최면을 써온 거지? 적어도 내가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내용들뿐. 그가 말한 세 가지 사실조차 과연 사실이 맞는지 아닌지 의심스럽다.

켄은 안나의 하나뿐인 유일무이한 연인이지만 [아레스]로서의 그는 안나의 연인이 아니다. 안나가 [코레]인 이상[아레스]와 [코레]는 그저 한 조직에 몸을 담은 동료에 지나지 않는다.

켄이 직접적으로 말을 해둔 적은 없지만 안나는 본인 스스로 눈치껏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의 방해를 하기 위해 12신에 들어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긴 안나를 그는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바라보다 나지막이 한마디를 전했다.

 

"네 앞에서는…. 12신 얘기는 꺼내고 싶지 않아"

"…. 그렇겠지"

"네 앞에서만큼은 [아레스]로서 있을 생각은 없어"

"….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대꾸하려던 안나는 이내 그의 눈빛에 가득 차 있는 결의의 감정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거다. 다르다. 안나의 어중간한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결의.

마찬가지는 무슨, 동급일 수가 없는 그 나름의 12신에 대한, 제우스에 대한 충성심.

 

"…. 이해했어"

"그러면 됐어. 이 얘기는 더는 그만하자"

 

모처럼 즐겁게 여행까지 갔다 왔는데 이 늦은 시간에 서로 이런 이야기를 해서 무슨 의미가 있어?

그의 눈빛은 '여기서 끝내자'라고 부드럽게 타이르고 있었다.

 

"…. 알겠어. 나도 딱히 싸우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

 

안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소파에서 일어나 '시원한 것 좀 마시고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주방을 향했다.

이는 잠시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그녀가 자주 쓰는 표현.

그러자 그도 '나도 좀 씻어야겠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했던 거실 소파에는 여행 중 구매한 도서 한 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만약, 만약 말이야….'

 

만약에, 여기 나온 책 내용처럼 나와 켄, 둘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공간에 갇히게 된다면, 만에 하나 '미노타우로스'가 숨어있는 미궁에 빠지게 된다면 그는….

 

"…. 나를 살릴까…. 과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정수기 앞에 서서 물이 컵에 담기는 모습을 천천히 관찰하였다.

 

아니, 예시가 잘못됐다.

그는, 아레스는 제우스와 자신이 갇혀있는 상태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자신을 희생하여 제우스를 살릴 남자다.

그렇다면 반대로 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켄은 어떨까?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다. 자신은 켄을 위해 목숨을 걸고 그는 안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겠지.

다만, 다만 말이다….

 

'…. 만약 제우스와 내가 동시에 갇혀버리면? 그때는…?'

'만약 켄이 아닌 [아레스]와 내가 갇혀버리면? 그때는…?'

 

안 좋은 상상 밖의 들지 않는다. 이미 머릿속에 정답이 나와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끝까지 거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 띠링 -

 

정신을 차려보니 머그잔에 담긴 물이 넘쳐버려 정수기 물이 주변 이곳저곳에 튀어버렸다.

안나는 서둘러 벽에 걸려있는 새 행주를 꺼내 물로 젖은 주변을 닦아냈다.

 

'…. 모르겠어. 내가 아는 [켄]과 [아레스]는 너무나도 다른 인물이야.'

 

켄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남자. 나를 위해 목숨을 거는 남자.

아레스는…. 아레스는….

 

"…. 아레스에게는 제우스뿐이야…."

 

이미 나와버린 결말 속 이야기를 안나는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내뱉어 버린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에오스도 아프로디테도 다른 여신들도 아닌 그의 진정한 상대란 건….

 

"…. 어쩜 좋지?난 [켄]을 소유할 수 있어도 [아레스]는 소유할 수 없어"

 

왜냐하면 '전쟁의 신'은 나를 받아주지 않으니까.

그를 '소유'하고 있는 상대가 있으니까. 그 상대라는 건 12신의 유일신이자 최고신

 

안나는 냉수로 가득 찬 머그잔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아무 고지도 없이 갑작스럽게 체내에 들어온 냉기는 그녀의 머리를 한순간 아프게 만들었지만, 그조차도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마음속, 엉망진창으로 불어대는 이 '허리케인'에 비할 수 있을까.

텅 빈 머그잔. 옆에 대충 놓여있는 싱크대 행주. 아무도 없는 적막함 속 모퉁이 끝 화장실에서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샤워 소리. 그가 씻는 소리. 그 남자가 그로써 존재할 수 있는 생활함.

 

"…. [아레스]를 소유하려면 [유일신]에게 도전하면 되는 법"

 

그래, 책에서도 그렇게 나와 있잖아. 미궁 시리즈의 또 다른 단편선.

사랑하는 남자를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여신의 이야기. 사랑하는 여자를 몇백 번이고 되살려 잔혹하게 죽여 소유해 버리는 능력자의 이야기.

처음부터 나는 그러기 위해서 12신에 들어온 게 아니었던가. 사랑하는 그의 [유일신]을 향한 분노와 질투의 감정을 끌어안고서.

 

"…. 그리고는 둘이서 같이 [미궁]에서 영원히 살면 돼"

 

뭐 하러 나갈 필요가 있어?

뭣 때문에 밖으로 탈출할 필요가 있어?

우리는 둘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둘이 함께 영원히….

사랑하는 켄과 함께하는 일평생은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한 나날로 가득 차 있을 거야.

 

그녀의 마음속 소용돌이는 다시금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사각 거울을 마주하고는 싱긋하고 미소 지었다.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웃을 수 있어. 그러니 조금 전 대화는 없던 일로 치자.'

 

머릿속의 쓸데없는 상상도 망상도, 전부 다. 기억에서 지워버리자.

샤워를 끝마친 듯 그가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 씻은 거야? 나도 들어가려고"

 

소녀는 방금 전의 대화 따윈 없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가운 차림의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그 또한 조금 전의 대화 따윈 없었다는 듯 젖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아내며 미소 지었다.

 

"씻고 나니 피곤하네. 시간도 벌써 이렇고"

"나는 샤워보다 목욕하고 싶어"

"그래? 그렇게 하던가. 그러면 나 먼저 들어간다."

 

평소대로의 대화.

평소대로의 일상.

서로 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비일상] 따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있잖아"

"응?"

"…. 내가 켄 사랑하는 거. 켄도 알지?"

"…."

 

갑작스러운 연인의 고백에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 어. 내가 모를 줄 알아?"

"켄은? 켄은 어떤데?"

"…. 좋아해. 너도 알잖아""

"사랑해는?"

"…. 사랑해. 됐지?"

"응!"

 

행복하다는 듯한 소녀의 미소에 그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 두 사람만의 평범한 일상 -

- 실은 이조차 누군가가 만들어낸 미궁 속 일상이었다면? -

- 그렇다면 여기서 갇힌 채 영원히 함께하는 게 좋지 않아?-

 

실은 미궁에 갇혀버린 건 나와 당신이 아닌, 나 혼자였던 것만은 아닐까?

 

 

***

 

"…. 그래, 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로부터의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앞의 소녀, 안나. 아니, 12신의 [코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가져다 대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웃었다.

 

안녕, 잘 가. Bye Bye.

 

사랑하는 나의….

 

 

[....미궁 속에 갇힌다면 끝까지 너만의 '코레'로 남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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