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 새틴 커튼의 부드러운 감촉이 팔에서 느껴진다. 영화에서 자주 본 듯한 분위기의 무겁고 웅장한 그 커튼은 야외 테라스의 문 옆에 걷힌 채 마찬가지로 고풍스러운 금색 로프로 고정되어 있었다. 비록 무척이나 아름답기는 하나, 어딘가 비위생적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 소녀는 서둘러 팔을 떼어낸다. 찝찝함과 언뜻 보기엔 이상하게 보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위해 소녀는 무심코 팔을 탁탁 털어낸다. 다행히도, 어른들은 음료 한 잔을 손에 든 채 서로 안부를 나누느라,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어른들을 기함하게 할 생각하지도 못할 놀이를 하느라 바빠 아무도 소녀를 보지 못한 듯하다.
‘다행이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딱히 사람들에게 대놓고 보여주고 싶은 행동은 아니었으니까. 옷이 더 돋보이게 해야 한다며 집안 식구 전원의 식사량을 줄인 어머니 탓에, 허기를 달래고자 몰래 펀치와 핑거 쿠키 따위가 위치한 곳으로 온 참이었다. 가족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어서 돌아가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서두르는 그 순간- 회장(hall) 전체가 서서히 암전되기 시작했다. 특별히 초청한 가수의 아리아가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워지는 시야, 소녀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든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던가? 아직 시간이 남은 줄 알았는데. 분명 가족들에게 혼나겠지. 소녀의 바쁘게 돌아가는 머릿속에서 눈물을 보이는 유약한 어머니, 자신을 꾸짖는 아버지의 그림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일어난 일인데. 여기서 급하게 허둥거리다간 다칠 수도 있었고, 수준낮게 무슨 짓이냐며 아버지에게 더 혼날 수도 있었다. 미래가 두렵긴 했지만, 소녀는 그냥 이 자리에서 가수의 노래가 끝나고 다시 회장이 밝아지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으윽- 안 그래도 빈속에 두통까지 있는데…! 소녀는 자신을 퍽 치고 간 처음 보는 낯선 이를 향해 째려보는 대신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고자 스스로를 꽉 끌어안았다. 머리가 어지러워 실신할 것 같았다. 소녀는 식은땀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아래로 내린 채 심호흡을 했다. 바닥을 향해 고정된 시야로 검은색 구두가 보였다, 누군가, 어떤 남자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누구지? 마치 다른 사람들과는 분리된 공간에 있기라도 한 듯, 그는 고요하게 그곳에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다만 심지어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영화와 책이 이야기하듯, 자기도 모르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감색 눈동자가 소년과 어른 사이의 모호한 시기를 겪는 중인 어느 청년을 바라본다.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해 내는 자를.
모든 게 멈추고, 세상이 무너진다. 젠가의 중심이 되던 블록을 뺀 것처럼, 커튼이 내려오고 눈 깜짝할 새에 무대가 바뀐 것처럼, 세상은 어느 순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어느 극장으로 변했다. 주홍빛이 그녀를 물들이려는 듯 맹렬하게 빛난다, 다가온다, 그 시인성 높은 그 색이, 쨍하게 내려치는 햇살, 아니면 일몰의 가장 눈 부신 빛처럼 발광하는 그 주홍색-아니 갈색이었나- 이 그녀의 뇌가 담긴 그 신체 부위 전체를 꽉 채운다. 비켜, 꺼져! 당장 나가버려! 그녀는 눈을 감고 소리친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뒷걸음질 친다. 아-
프리드리히!
……………………
- 그럼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마, 보건 선생님께도 미리 말씀드려둘 테니 오전 중으로 만나 뵈렴. 내일 보자, 샤를로테.
뚜뚜뚜-.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슴푸레한 하늘, 그 아래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이 간간이 보일 뿐 그녀의 각막에 들어오는 것의 대부분은 광활한 자연의 일부분이었다.
“하…….”
털썩, 그대로 침대에 푹 쓰러지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이 바람 빠진 풍선마냥 폐에서부터 꽉 쥐어짜내진다. 그 괴랄하고 불쾌한 꿈에서 깨어난 지 한 시간쯤 되었을까,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진 두통에 이제야 조금 편안한 기분이다. 샤를로테는 뜨끈뜨끈한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린다. 몸살감기라니, 그녀는 본체 열이 잘 나지 않는 체질인데, 참 우스운 일이다.
룸메이트는 실험실로 떠난 지 오래였기에 그녀는 혼자였다-잠꼬대나 하는 꼴을 보이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고 그녀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새삼 온몸이 마른 식은땀으로 인해 찐득한 걸 깨닫는다. 정신도 차릴 겸 어서 샤워를 하는 편이 좋겠다, 결석을 하면 오히려 할 일이 많아지니까. 먼저 오늘 새벽에 완성할 예정이었던 자체 실험 보고서부터 얼른 마무리하고 그 다음은 잠시 후 시작될 수업에서 나갈 진도를 자습하고, 또 C반이랑 합동해서 수업하고 있는……
아, 제기랄
“빌어먹을….” 결국 또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그 번쩍거리는 주황색을.
그녀가 꿈속에서 생각한 비현실적으로 발광하는 주황색은 높은 확률로 그날 공연장의 조명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의 내면세계의 무의식이 반영한 내용은… 아닐 것이다-그래, 그녀가 여기서 다소 편향에 치우쳐 판단한 것은 사실이다- 그저 그… 하, 기가 막히는 운명의 농간이 우스웠기에, 그랬기에 그랬던 것임이 유력하다. 첫 학기의 마지막 날 멱살을 쥐고 퍽, 퍽 주먹질을 했던 이와 우연히, 사석에서, 먼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는 게… 어이가 없으니깐.
되돌아보면 그와 그녀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아슬아슬하게 더 많았다.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에서. 그들은 낙제생을 꺼리지 않았고-되려 꺼리는 이들을 같잖게 본다면 모를까-, 이름 모를 불특정 다수의 학생에게 에세이가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가치관이 비슷했고, 교수에게 ‘분위기가 닮았다’라는 소리를 들어볼 정도로 풍기는 아우라가 비슷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같을 수가 없었다. 수백만 년 전 같은 공통 조상에서 뻗어 나와 각각 다르게 진화한 인간과 원숭이처럼, 본질적으로 그들은 같을 수 없다. 적어도, 서로를 좋아할 순 없었다. 그들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상대를 향해 이끌리는 동시에 상대방에게 매 순간 실망하고 있다. 하! 그래…. 실망. 계속해서 서로에게 화가 났다 서로를 다시 봤다 결국 다시 실망하고 언성을 높이고, 그 역시도 그러한 피곤한 미래가 그려졌기에 일부러 그녀에게 참을성 있게 굴고 피해 다니는 것일 거다.
“…….”
샤를로테가 부스럭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느샌가 떠오른 태양이 하늘을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매운 그 색으로 시야를 침범했기 때문이었다. 일출의 강력한 주황색 빛이 그녀를 물들였다. 감색의 눈을 제외하고, 그녀의 전신은 주황색의 빛으로 칠해져있었다. -당연하게도- 완전히 구겨진 그녀의 얼굴이 신경질스럽게 블라인드를 내렸다. 어서 할 일이나 해야지,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남몰래 타오르는 어떤 이를 향한 승부욕을 본인을 포함한 아무도 모르게 덮어버리곤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정신을 맑게하고 싶었다. 그 찝찝한 꿈이 결국엔 일종의 동기부여가 되어줬으니… 이건 악(惡)몽인지 아닌지, 참 모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