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컨대, 나 세벡 지그볼트는 언제나 말레우스 님의 종자로서 부끄러움이 없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주군께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체력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며, 항상 말레우스 님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릴리아님이 지적하신 ‘감정을 감추는 게 서투르다’는 부분은 개선하지 못했으니.
동아리 활동 후 디어솜니아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반갑지 않은 인물의 존재를 눈치채고 인상을 찌푸렸다.
“네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는 아주 당연한 걸 물었을 뿐인데, 감독생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한쪽 눈썹을 까딱인 녀석은 소파 등받이에 편하게 기댄 상체를 들고 두 팔을 교차해 팔짱을 꼈다.
“말레우스 선배가 초대해 주셔서 왔는데.”
“뭐?”
“사실이야. 안 믿기면 직접 선배 방에 가서 확인하던가.”
말도 안 된다. 도련님이 대체 왜?
하지만 저렇게 당당한 걸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아이렌이라는 인간은 때때로 건방지고 얄미운 행동을 했지만, 허풍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역시 믿어지지 않는다. 밖에서 만나는 것도 아니고, 왜 기숙사 안까지 저 녀석을 초대하신 걸까.
나는 상황을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녀석을 추궁했다.
“그런데, 왜 초대한 도련님과 네가 따로 있는 거지?”
“선배는 잠깐 가지러 갈 게 있다고 방에 가셨거든. 난 여기서 기다리래.”
과연. 방까지는 들이시지 않고 담화실까지만 허락하신 건가. 이건 참으로 다행이다.
그래도 역시 편하게 쉬려고 온 기숙사에서까지 이 녀석의 얼굴을 보고 싶진 않은데. 멜로드 터빈만큼 거슬리는 건 아니지만, 저 녀석은 묘하게 신경 쓰인단 말이지. 대체 도련님은 저런 녀석을 왜 곁에 두려고 하시는 건지, 원.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르는 데다가, 마법도 못 쓰는 하찮은 인간일 뿐인데.
이런 내 못마땅함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조용히 있는가 싶던 아이렌이, 불쑥 불평했다.
“그렇게 내가 온 게 불만이면, 말레우스 선배에게 따지도록 해.”
“불만이라고 한 적은 없다.”
“거짓말하고 있네. 표정에서부터 ‘싫다’라고 쓰여있는데.”
“…….”
어떻게 안 거지. 역시 이 녀석, 독심술 같은 걸 할 줄 아는 건가? 아니면 릴리아 님의 말씀대로, 내 얼굴에 감정이 너무 드러나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분하지만, 역시 감정을 감추는 연습을 좀 더 해야겠다. 입술을 꾹 다물어 치솟는 불쾌함을 감춘 나는 원래 목적대로 담화실 소파에 앉았다.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는 나를 지그시 본 아이렌은 몸을 들썩여 앉은 자세를 고쳤다.
“왜 앉아?”
“나는 디어솜니아 기숙사의 학생인데, 담화실 소파에 당연히 앉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따진 게 아니라, 목적을 물은 거잖아.”
“흥. 그게 왜 궁금하지? 내가 앉아서 불만인가?”
거짓말을 하느니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여긴 건지,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섞인 얼굴로 날 보다가 스마트폰을 꺼낼 뿐이었지.
그래. 차라리 시끄럽게 떠드느니 자기 할 일을 하는 게 낫지. 어차피 나도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으니 오히려 좋다. 도련님께서 돌아오시면 인사나 드리고, 방이 조용해질 즈음이 되면 얼른 안에 들어가 복습이나 해야지. 나도 저 녀석과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지만, 지금 안에 들어가면 같은 방을 쓰는 녀석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게 뻔해 들어가기 싫단 말이다.
그렇게 결심한 내가 편히 쉬기 위해 눈을 감는 순간. 차분한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라, 감독생이네. 안녕.”
이 목소리, 누구였더라.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음성에 한쪽 눈만 떠서 확인하자, 우리 기숙사의 2학년 학생 중 한 명이 아이렌의 뒤로 다가와 말을 걸고 있는 게 보였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실버와 같은 반인 인간으로 아는데. 아이렌과 아는 사이인 건가?
하지만 내 예상은 틀린 건지, 아이렌은 곧장 답하지 않고 멈칫하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누군지 기억 못 하나 보네?”
“……예. 죄송해요. 제가 기억력이 나빠서.”
녀석의 말투는 분명 정중했다. 하지만 눈빛에서는 본능적인 경계심 같은 게 느껴졌다. 마치 숲에서 인간과 마주친 산짐승 같은 꼴이랄까.
그러나 상대는 그 경계심을 읽어내지 못한 모양이다. 녀석은 아이렌을 향해 고개를 숙여 거리를 좀 더 좁힌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괜찮아. 난 2학년이고, 마주칠 일이 잘 없으니 모를 수도 있지.”
“아, 네. 2학년이셨구나.”
“그래. 실버랑 같은 반인데, 기억 안 나? 전에 우리 반에 왔을 때…….”
아, 시끄럽기는. 적어도 아이렌은 말수라도 적지, 저 녀석은 뭘 저렇게 떠드는 건가? 아이렌의 반응을 보니 딱히 반기는 것도 아닌 듯한데. 눈치라는 게 없는 건가? 게다가 같은 기숙사생인 나는 본체만체하고 다른 기숙사 녀석에게만 말을 걸다니. 저런 녀석이 디어솜니아에 있다는 게 짜증이 날 정도다.
‘그냥 들어가야겠군.’
말레우스 님께 인사하는 건 나중이라도 상관없고, 어차피 같은 소음이라면 통제할 수 있는 룸메이트 녀석들의 말소리가 더 낫다. 예의를 모르는 저 녀석에게 한마디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랬다가 감독생까지 끼어들게 되면 골치 아파지니 입을 다물어야지.
‘어차피 내 편을 들어줄 거 같지도 않고.’
아이렌은 정말 온갖 사람을 변호하길 좋아하는 괴짜지만, 내 편을 들어주는 꼴을 본 적은 없다. 평소에도 늘 실버 녀석과 멜로드 터빈의 편을 들어주지, 내겐 목소리를 낮추라는 말 정도만 하지 않나.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고 가면 될 거다. 녀석도 나보다는 친한 척 말을 걸어오는 쪽이 더 좋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
자리를 뜨기 전 마지막으로 아이렌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까는 단순히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던 아이렌이었는데, 지금은 불편해하는 티가 엄청나게 난다. 저건 단순히 어색해하거나 수줍음을 타는 게 아니다. 짧은 대꾸와 자꾸 옆으로 새는 시선은, 명백한 난처함의 신호이지 않나.
‘뭐 하는 거야, 저 녀석.’
그렇게나 싫으면 나한테 하듯 독설이나 던질 거지. 뭐 하러 다 받아주는 건가. 설마 상대가 실버랑 같은 반이라 싫은 티를 못 내는 건가? 아니면, 괜히 초대받아 왔는데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다던가?
‘어느 쪽이든 이해는 가지만, 저건 좀 아니지 않나.’
저 녀석이 저렇게 곤란해 하는 꼴은 본 적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어찌 되었든 아이렌도 여자니까 무례한 추근거림에 시달리게 놔둘 수 없어서일까.
명확히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무시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녀석의 손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앗.”
마치 종잇장처럼 가볍게 일으켜 세워진 아이렌은 내가 잡아 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와 주었다.
등 뒤로 ‘어어.’ 하는 아쉬움 담긴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지.
어찌 되었든 지금은 선배 녀석과 아이렌을 떨어뜨려 놓는 게 1순위다. 무작정 기숙사 복도로 나왔던 나는 앞만 보고 걷다가, 일단 사감의 방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잠깐, 세벡? 지금 무슨…….”
“네 녀석, 뭘 멍하게 있는 거냐! 말레우스 님이 기다리시는데 얼른 가진 못할망정!”
“뭐?”
‘아까 까지는 말레우스 선배랑 만나는 걸 못마땅해하는 거 같더니, 갑자기 왜 도와준다고 난리냐.’ 녀석의 반문은 내 귀에는 마치 그리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 그 말대로, 내 행동은 모순적일지 모르지. 하지만 나 세벡 지그볼트. 곤란해하는 여자를 모른 척할 정도로 미숙하지는 않다. 설령 그 여자가 도련님에게 과분한 관심을 받는 얄미운 인간 녀석일지도 말이다!
“잔말하지 말고 따라와라! 내가 안내해 주는 걸 감사히 여기도록!”
다행스러운 건, 내 신사적인 행동을 녀석도 어느 정도 눈치챈 모양이다.
평소라면 주절주절 대꾸했을 아이렌은 웬일로 입을 다물더니, 곧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와줘서 고마워, 세벡.”
음, 그래. 이 녀석은 적어도 예의라도 아는군. 같은 기숙사 후배에게 아는 척도 않던 선배보다는 백 배 낫다. 이러면 도와준 보람이 있지.
……그래도 역시 이 여자에게 득 되는 일을 했다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내 입은 제멋대로 감사를 부정해 버렸다.
“내가 도와주었다니,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예, 예. 그러시겠죠.”
뭐야, 저 어린애를 대하는 듯한 말투. 차라리 아까처럼 ‘거짓말하고 있네’라고 비웃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 녀석의 반응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낸 나는 당당하게 말레우스 님의 방 앞에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