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이별, 비, 그리고…."]
- 끝나지 않은 사랑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그런 건 없다고 믿었지.
비가 오고 있으니 젖어도 좋아. 눈물인 줄 아무도 모를 테니까 -
멀찌감치 영업 마감 중인 카페 창문에서 들려오는 건 귓가에 익숙한 한참 전의 유행가.
차갑게 우수수 떨어지는 소낙비 속 날씨는 초겨울을 연상시키는 갑작스러운 추위로 가득 찼다.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움 속 여자는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있는 힘껏 목까지 여몄지만 그럼에도 사이사이 파고드는 추위만큼은 견디기 어려웠다.
"....헤어지자는 소리인 거지?"
빗방울이 무자비하게 떨어지는 가운데 무미건조한 여자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슬픔도 서글픔도 애절함도 그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남자 또한 오로지 사실만은 고했다.
"네."
긍정의 의미를 뜻하는 단 한마디.
정장 차림의 남자는 검정 장우산을 든 채 자신의 반대편에 서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듯했지만, 그는 입 밖으로 무엇 하나 내뱉지 않은 채 침묵하였다.
무언의 시선.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여자의 표정
눈앞에 있는 건 문을 닫은 지 오래된 술집의 네온사인으로 가득 찬 간판
빨주노초파남보
정신없이 점멸되는 간판
건너편 도로에서는 비에 젖은 차량의 클랙슨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여자 쪽이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어"
"….그렇군요"
서로 간 들고 있던 장우산 너머로 격한 빗방울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맴돈다.
격해지는 빗방울과 더불어 차가운 바람 소리가 맴도는 가운데 여자 측에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유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있어?"
"….이유라. 이유라는 게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남자는 조심조심 말을 고르는 듯, 신중하게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대답하였다.
그의 신중한 태도를 바라보던 여자는 그제야 처음으로 웃음을 보이며 대꾸하였다.
"그렇네. 이유라는 건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걸"
자조에 가까운 미소
해탈에 가까운 말투
그녀는 왜인지 모르지만 아주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듯 웃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헤어짐이란 건 당연히 존재하는 법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면 이별이란 언제나 기본적으로 붙는 법
하물며 사랑이라는 일회성 감정으로 서로 간 이끌려 만난 연인들은 어떠할까?
활활 불타오르는 것은 한순간
불타오르는 씨앗을 오래오래 간직하여 끝까지 평생을 함께하는 반려자가 되는 것은 극소수
대부분의 연인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두 소진 후, 결국에는 서로 간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셀레네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진득하고 열렬한 연애에는 그와 반대되는 부작용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알고 있었어. 나, 이별이라는 거 많이 겪어봤으니까"
"…. 그렇군요"
"이별하기 직전의 분위기? 그런 거. 특히나 최근 당신에게 많이 전해져왔으니까"
"…."
언젠가는 분명 오게 될 [이별]이라는 것을 그녀는 머릿속으로 받아들이며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퇴근 후에 맞이한 둘만의 추억이 가득한 바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그것]은 분명 곧 있으면 다가온다며,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들려온 건 예상했던 대로의 [이별 이야기]
"…. 아아, 나는 또 이렇게 차이는 거네"
그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
최대한의 웃음.
최대한의…. 허세.
"…. 미안하게 됐습니다."
"됐어. 미안할 게 뭐 있어. 애당초 말이야…."
당신, 다른 여자가 생겨서 나를 버리기 위해서 헤어지자고 말하는 게 아니잖아.
여자의 말에 남자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차갑게 내뱉었다.
"설마요. 제가 그렇게 무책임한 남자로 보입니까?"
"….그냥. 그렇다고. 어차피 헤어지는 판국에 무슨 말이든 던져보는 거지"
만약 당신이 정말로 그런 식으로 나를 배신한 거면, 나는 당신에게 앙갚음해 버릴지도?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당신이 그런 식의 남자였으면 처음부터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 의외군요"
"…. 뭐가?"
그는 예상외라는 표정으로 셀레네를 내려다보았다.
"…. 보통 이런 경우, 당신 성격상 싫다며 울고불고 매달리라 생각했습니다만…."
그렇기에 더욱더 오래 고민했던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가장 스마트 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가장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게끔 끝맺음을 질 수 있을까.
그는, 케르베로스는 그녀에게 '이별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상당한 고민을 반복했었다.
이렇게 된 거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는 건 그만둘까?
아니, 그건 안 된다.
자신의 마음에 거짓을 남기고 싶지도, 무엇보다도 이런 식의 질질 끄는 관계는 그녀에게도 너무나도 무례한 행동인 거다.
그 후, 몇 차례 다짐 끝에 간신히 전한 말이었으나 그녀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네. 어린 시절의 나였으면 그랬을 거야"
처음 겪었던 이별,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상대.
언제였을까 그건. 아무튼 수십 년 전의 이야기이지.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만남이라는 인연이 있으면 이별이라는 것도 반드시 존재하는 거지"
"…. 그렇군요."
남자는 이해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간 자신이 모르는 그녀만의 인생과 과거가 존재하는 거겠지.
"…. 있잖아. 그러면….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뭐든지요.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뭐든지"
이게 마지막이다. 서로 간 [연인]으로서의 마지막.
사랑을 하는 것도 마지막
키스하는 것도 마지막
섹스하는 것도 마지막
그 모든 것이 끝맺음 되는 관계성
이 모든 것이 정리되면 그것은 그야말로 철저한 [타인]이 되는 셈이다.
남자의 한마디에 그녀는 이해했다는 듯 잠시 눈을 감고는 들고 있던 장우산을 허공으로 내던졌다.
이전, 백화점 명품 코너에서 샀던 고가의 브랜드.
고급스러운 골드의 체크무늬 장우산.
함께 쇼핑하며 식사하던 추억.
그녀가 들고 있던 장우산은 눈앞의 남자가 선물했던 우산인 거다.
추억이 가득 담긴 우산이 하늘을 향해 한차례 빙그르르 맴돌며 비로 젖은 진흙탕 속 아스팔트 길에 떨어진다.
예상치 못한 여자의 행동을 지켜보던 그는 어느샌가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금발의 여성을, 있는 힘껏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그가 들고 있던 검정 장우산의 손잡이가 엇나가, 우산은 한 바퀴 돌아 도로 옆으로 떨어진다.
"…. 리아…?"
"….이게 마지막. 마지막 부탁"
그녀는 양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며 웃어 보였다.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방울 속 진한 화장이 물기에 젖어 지워진다.
그녀의 눈가에는 빗방울이 뚝뚝
그럼에도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이거면…? 되는 건가요?"
"..쉿. 조용히"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양손으로 매만졌다.
머리, 이마, 눈, 코, 입가, 턱.
조심조심 그야말로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이라도 접하는 것처럼 그야말로 소중히
"…. 이게, 당신인 거네…."
"…. 네. 이게 저입니다."
여자의 의도를 깨달은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그녀와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 지어 보였다.
"…. 있지, 마지막으로 키스…. 해도…. 될까?"
"…. 키스만? 그 이상을 원한다면 언제든지."
오늘 밤, 하루 종일. 당신이 원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어줄 수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아직은 나는 [당신만의 남자]로 있어 줄 수 있어. 라고.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이상은 안돼"
"…. 왜? 그 이상을 하면 헤어지기 어려워져?"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이별의 말을 내뱉은 남자는 이렇게 되묻는다.
어쩜 이리 잔인한 남자일까.
어쩜 이리 얄미운 남자일까.
셀레네는 울컥하는 마음과 동시에 그에 대한 사랑스러운 감정에 견딜 수 없어져 지금 당장 그의 탄탄한 품에 안기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 나, 당신 앞에서만큼은 추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그래? 난 당신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든 상관없어"
어차피 이게 마지막이니까.
오늘 밤이 마지막이니까.
당신과 나의 마지막이니까.
"…. 얄미운 남자네. 당신 눈동자 속 내 얼굴도 이미 추하게 일그러진 지 오래일 텐데"
"그렇지 않아. 내 눈동자 속 당신은 언제나 아름다운 여자야"
"…. 입만 산 얄미운 남자"
어차피 헤어질 거면 잔인하고 차가운 말을 뱉어버리면 그만일 텐데 이게 뭐람, 대체.
셀레네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키스해 줘. 가벼운 입맞춤도, 진한 입맞춤도. 혀와 혀가 얽혀서 몸이 뜨거워져도 상관없어도 좋을 정도로. 쭉"
"…. 당신이 원한다면 뭐든지"
- 당신이 원한다면 뭐든지….-
그 한마디가 셀레네의 가슴팍을 들쑤셔 끝끝내 그녀는 눈물을 참지 못한 채 그의 머리를 붙잡고 입술을 탐하였다.
원한다면 뭐든지라는 말은, 나에게는 무엇 하나 필요 없는 말이었어.
삐딱한 성격의 당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순응적인 예스맨이 된 거야?
금요일 심야의 밤.
누구도 지나가지 않는 격한 빗줄기 속 한 남녀는 오래되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낡은 술집 앞에서 몇 차례고 몇 차례고 키스를 반복했다.
내던져버린 한 쌍의 장우산은 여전히 빗방울에 젖은 채 길바닥에 뒹굴고 있을 뿐
차로의 차들은 그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는 듯 쌩쌩 소리 내 천둥번개가 칠 것 같은 날씨에 서둘러 귀가하려 한다.
- 만남이란 건 갑자기 찾아오는 거니까 끝이란 것도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르겠어. 비가 내린 탓으로 하고 잊어버리자 -
'…. 당신과 처음 만난 날도 [비]가 왔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분명…. 이 또한 운명이라 생각했을 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비는 오지 않았어
그렇다면 눈이 왔으면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눈이 오는 계절도 아니었어.
그저…. 평범한…. 평범한…. 맑은 날씨의 어느 평일, 나는 당신을 마주하고 [사랑]에 빠져버린 거야.
'바보 같지? 바보 같은 여자라고 매도해 줘'
- 아아, 비가 내린 탓으로 하고 잊어버리자.
거리의 노이즈와 Rainy DANCE
차갑지 않은 가랑비 씻어 내버려 -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