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전 애인과 친구 할 수 있나요? 예/아니오]

 

주토피아의 유능한 변호사, 카타리나 ‘카리’ 폴라리스는 툰드라타운에서도 꽤 좋은 아파트에 살았다. 하얀 털 북극여우의 체격에 맞춘 침대와 책상, 책장과 탁자. 그리고, 6남매와 부모님까지 함께 찍은 작은 가족사진. 네 것, 내 것 명확히 구분하는 그녀의 집에 가족들 물건은 물론, 타인의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친구 선물이나 20살 독립 기념 선물 외에는, 대부분 그녀의 힘으로 산 것뿐이었다. ‘내 돈으로 내가 산’ 물건. 그런데 딱 하나 남겨둔 책 한 권이 사랑싸움의 원인이 될 줄은 그녀도, 그녀의 애인 게리 드 스네이크도 몰랐을 터였다.

 

‘열차 안에서’, -다프네 리스본. 주토피아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시작되는, 다양한 동물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이 소설은 카타리나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였다. 다양한 장르를 다루는 단편집. 카타리나는 이 책에 밑줄을 치고, 간단한 감상을 담은 메모까지 붙여놓았다. 특히, 3편의 <서리는 녹지 않아>의 주인공 아우렐리우스와 칼릭세네의 애틋한 사랑은 어릴 적 그녀가 꿈꾸었던 그런 연애를 닮아있었다. 물론 현실은 사막의 정오만큼이나 뜨겁고, 툰드라 타운의 흰 눈만큼 시렸지만 말이다. 그녀는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로 한동안 그 장을 펼치지 않았다. 오늘 게리가 우연히 펼치기 전까지.

“카리, 오래 걸려요? 주말인데도 일해요?”

“간단한 거예요, 게리. 미안해요. 편하게 있어요. 뭐든 해도 좋고요. 금방, 금방 끝낼게요.”

친구인 캔디스가 막무가내로 주선한 소개팅에서 게리를 만난 지 세 달. 그들은 행복한 연인이었다. 아침부터 밤, 또는 평일부터 주말까지 평화로운 나날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우당탕 물 끓이듯 해결된 후로, 둘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집에 방문하고, 차를 타고 데이트를 나가는 일도 하나의 루틴으로 자리 잡았고. 카리는 파충류와의 연애도 처음인 데다. 여우라 그런지 집에 손님을 잘 안 데려온다고 했다. 덕분에 자주 오지 못하는 그녀의 집이 게리의 눈에는 신기한 물건투성이였다. 장르의 구분이 아닌 책 색깔이나 크기 별로 정리된 거실 책장도.

‘뭐든 해도 된다고 했지….’

게리는 많고 많은 책 중에서, 조금 낡고 흥미로워 보이는 책을 집어 들었다. [열차 안에서]. 그는 책장 위에 올려진 카리의 안경을 쓴 채 책을 들여다보았다.

‘이 안경, 도수가 없네? 하긴 카리 씨는 시력이 좋으니까.’

게리는 카리가 서재에서 잠시 급한 업무를 처리하는 틈을 타 책을 읽었다. 그저 무심결에 첫 장을 읽던 게리의 파란 머리가 조금씩 숙여지고 이내 거의 책 안으로 들어갈 듯했다. 페이지가 파르르 넘어갔다.

‘말도 안 돼. 연결된 내용이 아닌데 왜 이렇게 재미있지?’

이윽고 3편. 북극곰 아우렐리우스와 푸른 털을 가진 북극여우 칼릭세네의 사랑. 카리는 하얀 털을 가졌지만, 그래도 북극여우였다. 북극여우는 푸른 털을 가진 종도 있으니까. 책상에 놓여있는 폴라리스 가족의 사진을 흘깃, 쳐다본 게리는 다시 글 속으로 빠져 들었다. 뱀이 뱀 굴로 들어가는 듯이 깊게.

“넌 꼭 빙하 같아. 난 너 없으면 죽어, 카리.”

주인공인 북극곰 아우렐리우스가 여주인공 칼릭세네에게 내뱉는 절절한 고백. ‘KARI’. 다른 이름, 동일한 애칭. 게리는 그의 연인이 들어가 있는 서재 방을 흘끔 쳐다보았다. 카리는 그 대사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써놓고, 작은 크기의 하트를 그려놓기까지 했다. 아마 자신과 같은 애칭을 쓰는 여주인공이 받는 고백이라서 그런 걸까? 그리고 붙은 메모지에 쓰인 짧은 감상. [아우렐리우스와 칼릭세네는 비극에서도 행복을 피워 올리는 연인들이다.] 카리의 정갈하면서도 살짝 흘려 쓰는 글씨체다. 그 옆에 확연히 그녀의 필체가 아닌 글씨로, 큼직한 문장이 하나 적혀 있었다.

[넌 칼릭세네보다 아름다워, 내 눈송이. 그리고 난 아우렐리우스보다 낫고. 안 그래?- J.]

‘J?’

눈살을 찌푸린 게리가 한 페이지를 더 넘기자, 톡,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북극곰 남성의 품에 폭 안긴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카타리나. [0225. 8주년 기념. 넌 최고야, 내 눈송이. 사랑해.]

‘생일, 생일이잖아. 8주년? 8년이나?’

북극곰과 북극여우가 나오는 소설. 그리고 그녀의 전 애인으로 보이는 북극곰 남성, ‘눈송이’라는 애칭. 게리가 묘한 기분에 꼬리를 탁, 탁, 카펫 위로 두드리며 사진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서재 문이 열리고 카타리나가 나타났다.

“다 끝났어요, 게리 씨. 책 읽고 있었어요? 나 그 책 진짜 좋아하는 건데.”

“혹시, 있잖아요, 카리….”

“네? 무슨 일이에요. 새파란 얼굴이 더 파랗게 보이는 것 같은데.”

짧은 농담이 들린다. 게리는 메모가 붙은 책과, 폴라로이드 사진을 꼬리로 들어 보인다.

“이 북극곰이 J예요?”

카타리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저게 왜? 내가 저걸 안 버렸네? 아, 그래. 저 책, 재커라이어, 재키, 그러니까, J.가 준 거였지. 툰드라타운 제일 가는 변호사는 이 찰나에 온갖 생각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네. 그 남자가 J 맞아요. 제 전 애인이고요.”

재커라이어는 카타리나의 첫사랑이자 8년 만난 전 애인인 동시에, 최악의 이별 사유 중 하나를 선물한 남자였다. 문제는 소꿉친구인 탓에 1년에 두 번은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맙소사, 빌어먹을 재키! 도움이 안 된다니까!

그녀는 눈치를 슬쩍 보다가 한 마디 더 붙인다. 친구 맞으니까. 젠장,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신경 쓰지 말아요. 지금은 그냥 친구거든요.”

“친구요?”

게리의 노란 눈동자가 번뜩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최악이다. 가지가지도 이런 게 또 없다. 카리는 꼬리 털이 바짝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어떡하면 좋아!?

© 2025-2026. ALL RIGHTS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