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으신 분들은 본디 외출이 자유로울 수 없었다.
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대처할 사람이 없는 이의 목숨에는 늘 책임이 따르는 법이었다.
저 자신뿐만이 아니라 추종자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본인이 가진 권위의 토대가 되는 것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 것. 그게 권력의 무게였고, 말레우스 또한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얼마나 강하든 종자들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고, 말없이 사라져서는 안 되는 법이었지. 오래전부터 가시나무 골짜기 차기 당주로서 키워진 말레우스는 이걸 당연한 이치로 여겼지만, 때로는 이 모든 게 너무나도 번거롭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 지금처럼 누군가와 단둘이 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순간 같을 때 말이다.
“아이렌, 혹시 불편하진 않나?”
말레우스는 제 오른쪽에서 나란히 걷는 동행자에게 물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그를 따라가느라 평소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아이렌은 조금 천천히 걷자고 말하는 대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저는 괜찮은데, 선배는 불편하신가요?”
“아니. 네가 괜찮다면 나는 상관없다. 익숙하거든.”
그렇게 말한 말레우스가 등 뒤를 돌아본다. 서너 걸음 정도 뒤에서 따라오는 세벡과 실버를 훑어본 시선은 곧바로 아이렌에게 돌아왔다.
“그래도 릴리아까지 따라오지 않았으니 다행인가.”
“그런가요? 어차피 한 명 정도 차이는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인원이 아주 많을 때야 그렇지. 하지만 둘과 셋의 차이는 큰 편이라서.”
그건 그렇다. 100에서 1을 뺀 것보단 10에서 1을 뺀 게 더 크지. 애초에 누군가에게 호위받아 본 적이 없어서 생각지 못했는데, 이건 말레우스 말이 옳은 거 같다.
아이렌이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보자, 아까와는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어이, 아이렌. 너무 가까운 것 아닌가? 말레우스 님께서 걷기 불편하시잖나!”
아까 말레우스가 볼 때는 조용히 있더니. 갑자기 시비를 걸 줄이야.
다소 유치한 딴죽에 코웃음 친 아이렌은 당사자에게 직접 물었다.
“떨어질까요?”
“그럴 필요는 없다. 불편하지 않으니.”
“들었지, 세벡?”
짓궂게 웃으며 확인시켜주자 세벡의 눈썹 끝이 하늘까지 솟구칠 정도로 올라간다.
‘으윽!’ 얄미움에 호통치고 싶어도 바로 옆에 말레우스가 있기에 최대한 인내하는 세벡은 최대한 입을 꾹 다물어 자신을 제어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아이렌은 제 옆에 있는 말레우스는 내버려 두고 몇 걸음 떨어진 세벡에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너랑 실버 선배는 좀 더 붙어 걸어도 될 거 같은데.”
“하. 이 이상 어떻게 붙어 걸으라는 거지?”
“아니, 너랑 선배 말고. 우리 쪽으로 더 붙어도 되지 않냐는 거야.”
‘그건 호위답지 않은 행동 같은데.’ 그런 생각이 불쑥 든 것도 잠깐일 뿐. 세벡의 눈동자가 황급히 말레우스 쪽으로 향했다.
본래 말레우스만 외출한 것이라면, 당연히 가까이 걷는 게 정답이겠지.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모시는 이의 요청을 빠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제삼자도 있는 상황. 심지어 말레우스가 단둘이 있고 싶은 기색을 보였으니, 최대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거였는데. 정말 다가서도 되는 걸까.
“말레우스 님, 괜찮습니까?”
“음. 허하지.”
잔뜩 기대하는 종자의 표정을 본 말레우스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따라온 이들을 억지로 못 본 척하느니, 다같이 어울리는 게 낫다고 결론 내린 거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더 망설일 게 없는지, 세벡은 실버를 놔두고 혼자 말레우스의 옆에 다가섰다. 그 맹렬한 기세에 슬쩍 자리를 비켜준 아이렌은 한 걸음 정도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도련님, 저기 저거. 가고일 아닙니까?”
“호오. 이젠 구분을 꽤 잘하는 군, 세벡. 맞다. 모양은 좀 특이하지만 가고일의 특성은 다 갖추고 있군. 빗물받이도 있고.”
세벡이 가리킨 곳을 확인한 말레우스는 흡족해하며 턱을 매만졌다. 낡고 허물어져 원래 모습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폐허 속. 지붕 끝에 남아있는 낡은 석상은 조금 독특한 생김새였지만, 분명 가고일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봐도 헷갈리는데.’
눈썰미가 좋은 걸까, 아니면 말레우스가 좋아하는 거니 어떻게든 배워서 구분할 수 있게 된 걸까. 두 눈을 빛내며 말레우스의 설명을 듣는 세벡을 눈을 가늘게 뜨고 보던 아이렌은 조금 더 물러서 실버의 옆에 섰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상대를 눈짓으로 반긴 실버는 잠깐 아무 말이 없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괜찮나, 아이렌?”
“예? 무슨 뜻이에요?”
“말레우스 님과 세벡이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말이야.”
방금까지는 저 자리에 본인이 있었는데, 이젠 다른 사람이 차지하지 않았나. 본인은 이런 일에 둔감해도 다른 이들은 빼앗기는 것에 민감하다는 걸 아는 실버는 혹 아이렌이 상심하지 않았을지 걱정하며 물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아이렌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었다.
“딱히 상관없어요. 세벡이 즐거워 보이니까 내버려 두죠. 이왕 다 같이 온 거, 즐기다 가야지요. 호위하러 왔다고 즐기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옳은 말이다. 실버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세심함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아이렌은, 그 호의를 돌려주듯 똑같은 방법으로 상대를 챙겼다.
“실버 선배는 지루하지 않아요? 저는 원래 이런 걸 좋아해서 따라온 거지만, 선배는 일 때문에 온 거잖아요.”
“지루하지 않다. 산책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고, 다 같이 있는 시간은 소중하니까.”
정직하게 답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대로 된 산책로는커녕 잘 닦아 놓은 길도 없는 폐허는 쓸쓸하기 그지없지만, 말레우스가 좋아하는 건 아마 그 적막함이겠지. 그리고 아마 아이렌도 마찬가지일 거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일이 많지만, 본디 조용한 걸 좋아하는 아이렌이지 않나.
마침 자신도 고요한 건 싫어하지 않으니, 지금 이 상황이 반갑지 않을 리 없다. 굳이 따지자면 일이 있어서 빠진 릴리아도 함께였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건 이 평온한 시간에 흠집을 낼 정도로 큰 아쉬움은 아니었다.
“어라.”
천천히 걸으며 주변 풍경과 소중한 사람들을 둘러보던 실버는 옆에서 들리는 감탄사에 발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한눈을 팔고 있는 아이렌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나무 그늘 속을 보고 있었다.
볕을 피해 그림자 속에 쉬고 있는 건, 맑은 눈의 사슴이었다.
낯선 존재를 구경하듯 근처를 서성이는 사슴을 바라보던 아이렌은 아이같이 웃고 있었다.
“귀엽다~. 아직 새끼인 걸까요? 크기가 좀 작은데.”
“그런 것 같기도.”
사슴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성체라고 하기엔 덩치가 작아 보인다. 하지만 만약 새끼라고 하면, 부모는 어디에 있는 걸까.
“아.”
아이렌과 함께 사슴을 지켜보던 실버는 서서히 다가오는 작은 그림자에 탄식했다.
무구한 눈동자를 가진 어린 짐승은 실버의 곁을 어슬렁거리더니, 그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너무나도 쉽게 경계심을 거두는 사슴을 보고 감탄한 아이렌이 작게 중얼거렸다.
“동물들은 미남을 알아본다더니. 과연, 그렇네요.”
“그건 아닐 거다. 나는 유독 동물이 잘 따르곤 해서. 체질 같은 거겠지.”
“아니, 그게 미남을 알아본다는 증거 아녜요?”
솔직히 제가 사슴이라도 모른 척 실버에게 치댈 거다. 그런 솔직한 마음을 삼킨 채 아기 사슴을 구경하고 있자니, 조금 더 큰 사슴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천진난만한 새끼와 달리 경계심이 남아있는 어미 사슴은 한참 곁에서 주춤거리더니, 곧 실버의 곁에 앉아 쉬었다. ‘이 인간들은 제 새끼를 해치지 않는다.’ 그런 확신이 든 모양이었다.
“얘가 어미인가 봐요.”
“그런 것 같군. 아비는 없는 건가?”
“사냥이라도 하러 간 걸까요. ……아니다, 사슴은 초식동물이지. 그럼 풀 뜯으러 갔나?”
풀을 뜯는다고 해도 그걸 굳이 자식 앞으로 가져오진 않을 텐데. 아이렌도 그 정도는 알 것 같은데 저런 소릴 하다니. 역시 아이렌은 순수한 면이 있다. 쟈밀이나 제이드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간 의문스러워 할 테지만, 실버는 제 생각이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적어도, 제 앞에서 아이렌은 늘 이런 모습이었으니까.
“부럽다. 나도 사슴이 치근거려 주면 좋을 텐데.”
마치 실버의 생각에 확신이라도 주듯, 어미 사슴의 등을 쓰다듬던 아이렌이 부러움 담은 불평을 투덜거린다.
제게 머리를 비비는 아기 사슴을 바라만 보던 실버는 마치 아이렌을 흉내 내듯, 작은 생명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런 게 부러운 건가?”
“저는 동물을 좋아하니까요.”
“으음.”
그렇다면 제가 옆에 있어 주는 게 도움이 될 거 같다. 깊은 교류가 가능할지 아닌지 모르지만, 적어도 같은 장소에 함께 있도록 도울 수는 있지 않나.
애초에 움직일 생각도 없었지만, 더더욱 다른 곳으로 갈 수 없게 된 실버는 우두커니 서서 눈동자만 둘렸다. 그런 그의 노력 덕분인지 아이렌은 모처럼 동물과 교감하는 시간을 가지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쓰다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건 아쉽네요. 사슴 전병 같은 게 있다면 좋을 텐데.”
“사슴 전병?”
“제가 살던 세계의 사슴 공원에선 사슴 전용 먹이를 팔았거든요. 납작한 과자처럼 생겼는데…….”
손짓까지 곁들이며 열심히 설명하던 아이렌이었지만, 그 말은 중간에 끊어져 버렸다. 조금 전까진 얌전하게 있던 사슴들이, 돌연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아!”
단순히 질려서 떠나는 게 아니다. 저건 명백하게 도망가는 모양새다.
부리나케 달려가는 사슴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던 아이렌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실버 또한 갑작스러운 사슴들의 행동에 조금 놀랐지만, 아이렌과 달리 그 이유를 금방 눈치챘다.
“아이렌, 실버. 여기 있었나?”
뒤로 다가와 악의 없이 묻는 말레우스의 행동에 실버가 소리 없이 탄식한다.
자신들에게 다가온 이 압도적인 존재감. 강자 특유의 기백과 넘치는 마력.
압도적으로 강한 마법사인 가시나무 골짜기의 차기 당주의 행차란 예리한 야생동물들에겐 너무나도 자극적일 테지.
뒤늦게 이유를 알게 된 아이렌은 묻는 말에 답하지도 못하고 입만 뻥긋거렸다.
어색한 분위기와 점점 멀어져가는 사슴의 모습에 금방 상황을 파악한 말레우스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나 때문에 도망간 건가?”
“그, 그건 아닐걸요. 선배라서 도망간 게 아니라,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니 놀란 거 아닐까요?”
누가 보아도 변명 같은 대답이다. 말레우스는 아이렌이 일부러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진실을 들춰내진 않았다.
팔짱을 낀 그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니, 뒤늦게 따라온 세벡이 아이렌에게 버럭 화를 냈다.
“네 녀석! 홀로 떨어져 있으니 말레우스 님께서 걱정하지 않나!”
“혼자 아니었는데? 실버 선배랑 있었는데? 세벡은 숫자 못 세?”
“뭐라고?!”
결국 참지 못한 세벡이 버럭 소리치자 아이렌이 소리 내어 웃어버린다.
옥신각신하는 1학년들과 달리 조용히 후배들을 바라보던 두 선배는, 서로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무엇이?”
“뭔가, 아이렌과 보내려 하신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서…….”
그런 식으로 치면 세벡도 사과해야 할 거다. 하지만 굳이 그게 사과까지 해야 할 일일까. 누구와 함께 있든, 아이렌이 여기 있는 건 달라지지 않는 사실인데.
제 종자와 유치한 말싸움을 이어가는 흰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말레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다. 사슴은 내 옆에는 다가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러니 정말 괜찮다. 어디에 있든, 아이렌의 가치는 변하지 않고 제 손바닥 위에 있을 테니.
확신 가득한 그 말에 실버는 더는 눈치 보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