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푸념을 듣거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쾌한 일도 아니다. 옥타비넬의 음침한 3인조라면 이걸 ‘좋은 기회’라 여길지 모르겠지만, 나는 거기까지 사람이 비뚤어지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기숙사 후배의 연애 상담을 들어주는 일 같은 건 그다지 내키지 않았고, 애초에 딱히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버린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겠지.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지금 여자친구가 자꾸 네가 첫사랑인 전여친과 한 일을 똑같이 하고 싶어 한다는 거야?”
어떤 식으로든 조언을 해주자. 그러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내가 우습게도, 원래 상담역으로 앉아있던 아이렌이 단호한 한마디를 던진다.
후배 녀석은 약 10분간 떠들었던 이야기가 너무 짧은 문장으로 요약된 게 허무한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헝클였다.
“그렇게 압축하니까 별거 아닌 문제 같잖아, 아이렌.”
“맞잖아? 이유가 뭐든, 결국 네가 곤란한 이유이자 해결할 일은 저거 아냐?”
“…….”
그건 부정할 수 없는지, 돌아오는 반문은 없었다.
하긴, 모든 일은 맥락이 중요하긴 하지만 핵심을 요약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던가. 그런 점에선 아이렌의 저 단호하다 못해 폭력적인 요약이 죄라고 할 수는 없을 거다. 온몸이 아프다고 전신을 뜯어볼 수는 없지 않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발병 원인을 따지는 것보다는 정확하게 아픈 부위가 어딘지, 어딜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알아야지.
“으음, 나는 왜 이게 고민인지 잘 모르겠는걸. 그냥 해주면 되는 거 아니야?”
나와 함께 있다가 얼떨결에 고민을 같이 듣게 된 카림은 너무나도 순진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이렌의 촌철살인보다 더욱 경악스러운 그 해결법에 입을 닫지 못하는 후배의 표정이란, 얼마나 볼만하던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가볍게 이마를 친 나는 이 상황을 친절하게 한 번 더 설명해 주었다.
“카림. 방금 말했잖아. 전 여자친구랑은 좋게 헤어진 건 아니라서 굳이 기억이 떠오를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그건 그렇지만, 여자친구가 바란다면 해줘야 하지 않을까?”
“…….”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상담도 하지 않았겠지. 애초에, 일방적으로 한쪽만 괴로움을 참으며 무언가 해야 한다면 그게 동등한 연인 관계일까?
이 모든 걸 카림에게 상냥하게 설명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나는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떠올리고, 황당해하는 후배에게 말을 붙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네 여자친구가 이상한 거 같긴 해. 전 여자친구랑은 아예 연락 안 한다며? 이미 정리된 관계잖아? 그런데 왜 굳이 따라 하려는 건지 모르겠네.”
“저도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겠다니까요. 본인 말로는 ‘나랑은 안 해본 게 열받는다’라는데, 굳이 똑같이 따라해야 할 이유가 있나 싶어요. 더 좋은 경험으로 채울 수도 있는 건데.”
한탄하는 녀석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나 시달리면서도 헤어질 생각은 하지 않고 해결해 보려고 지혜를 구하는 걸 보면, 전 애인은 정말 관심이 없고 지금 관계에만 충실한 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대체 어떤 해답을 줘야 하는 걸까. 나라면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상대와 계속하긴 힘들 거 같은데. 남자친구를 믿어주지도 못하고 제 불안만 해결하고 싶어 하다니. 솔직히 최악이지 않나.
나로서는 ‘서로 어떤 점이 힘든지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라’라는 뻔한 답 외에는 영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런데, 아이렌은 무언가 짚히는 게 따로 있는 걸까.
“내가 직접 네 여자친구를 만나본 게 아니라서 뭐라 단언하긴 힘든데 말이야.”
조용히 대화 내용을 곱씹어 본 아이렌은 불쑥 입을 열더니, 제 나름의 가설을 늘어놓았다.
“아마 네 여자친구는 전여친의 흔적을 자신의 존재로 덮으려는 게 아닐까? 마치 파일 덮어쓰기 같은 느낌으로.”
“뭐?”
“아니, 내 말이 100% 정답은 아니고.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여자친구가 꽤 질투가 심한 것 같아서. 이미 끝났고 바꿀 수도 없는 과거에까지 집착하는 걸 보면 건강한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당사자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해결을 위해서는 불편한 진실도 마주해야 한다는 걸까. 꽤 거침없이 상대에 대해 분석하는 아이렌의 표정은 대단히 진지했다. 누가 보면 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특정 행동이나 음식에 전여친의 흔적이 있으면 기분 나쁘니, 제 흔적도 남기려고 하는 거야. 전여친 생각보다는 자기 생각을 하도록 말이지. 그나마 네가 이게 두 번째 연애라 다행이지, 만약 전여친이 10명이었으면 네 여자친구는 그 10명이랑 한 일을 다 해보려 했을 거 같은데?”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그게 목적이라면 오히려 역효과 같은데. 전여친이랑 했던 걸 지금 여친이랑 다시 하려니 오히려 기분이 나빠져서 여친이 미워질 정도니까.”
“이해해. 원래 좋아하는 걸 같이 하면 그 사람도 좋아지지만, 싫은 걸 함께 한 상대는 본능적으로 꺼리게 되지. 당연한 거야.”
채찍 뒤엔 당근을 주는 게 예의라는 듯, 아이렌은 푸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고생이 많다는 듯 측은하게 후배 녀석을 본 아이렌은 분석을 갈무리해, 최종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어때? 네 지금 행동이 오히려 전여친을 떠오르게 해서 널 마주하는 것도 힘들고, 이런 감정이 들 만큼 전여친에겐 좋지 않은 감정뿐이니 이러지 말아 달라고. 계속 널 좋아하고 싶으니 협조해 달라고 하는 거야.”
“으음……. 알았어. 차라리 그렇게 말하는 게 낫겠네.”
이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거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보다 좋은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이상, 시도해 볼 가치는 있겠지. 당사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서일까. 후배는 아이렌의 방법을 따르기로 했다.
‘이래도 해결이 안 되면 헤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남의 일이라고 너무 냉정하게 말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의처증이랑 의부증은 전문가를 찾아가야지. 또래에게 상담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지 않나. 후배는 착하게도 이야기를 들어준 나와 카림에게까지 감사 인사를 하고 갔지만, 솔직히 난 이 문제가 정말 해결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뭐, 그 심정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딱히 여자친구의 편을 들려는 건 아니지만, 첫 기억이라는 건 강렬한 법이니까. 그러니 다들 처음을 소중히 여기는 것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하면 여자친구라는 더욱 사람이 불쌍해진다. 지울 수 없는 걸 지우지 못해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다니. 그야말로 비극 아닌가.
“후우, 잘 해결되려나 모르겠네요. 제가 보기엔 쉽게 풀릴 거 같지는 않은데.”
아이렌의 중얼거림을 들은 나는 고개만 끄덕여 조용히 동의한 후, 먼 곳을 보는 옆얼굴을 응시했다.
착잡함. 걱정. 철학적 질문. 그리고 약간의 흥미까지. 읽을 수 있는 것과 읽어낼 수 없는 것들이 복잡하게 섞인 흰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는 힘이 있었다.
‘……덮어쓰기, 라.’
사랑으로 입은 상처는 또 다른 사랑으로 잊게 된다고 하던가. 나는 아직 그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그게 그다지 들어맞지 않을 거 같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같이 강렬한 사람은 웬만해선 없을 거 같으니.
비록 아직 아이렌과의 관계가 명확히 정의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나눈 감정과 한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 아짐 가의 종자로 어지간한 일은 다 겪어본 내게 별의별 생경한 감정을 느끼게 한 저 녀석의 흔적은, 아마 기억 상실이라도 걸리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거다. 만약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같은 행동을 해 기억을 덮어씌우려 해도 오히려 비교만 될 뿐일 테고, 반대로 저 녀석을 흉내 내어 점수를 따려 해도 결과는 같겠지. 아무리 저 녀석을 흉내를 내고 따라 해 봐도, 그 묘하게 비뚤어진 다정함을 누가 똑같이 흉내 내겠나. 악덕도 아니지만, 미덕은 더욱 아닌 그 성정이 내게 목줄을 채운 거니, 여러모로 내 미래는 글러 먹었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역시 책임지게 해야겠는데.”
“예?”
“아냐, 아무것도.”
어차피 좋든 싫은 쉽게 놓아줄 생각은 없으니, 굳이 선전포고 하진 않아도 되겠지.
적당한 기회가 왔음에도 굳이 발언권을 포기한 나는 어리둥절한 제비꽃색 눈동자에 웃어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