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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드모트는 1차 마법사 전쟁 때 죽고, 많은 이들이 생존한 평화로운 AU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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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들어있으니 섭취 시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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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이 가까운 허니듀크는 하트와 장미와 큐피드며 반지, 보석, 키스를 보내는 입술, 포옹하는 두 마리 개구리까지 온갖 로맨틱한 모양의 단 것들로 가득했다. 수백 가지 사탕이 마음껏 골라 담을 수 있도록 무더기를 이루어 진열되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는 크기도 종류도 다양한 초콜릿 상자가 바스락거리는 리본으로 사랑스럽게 포장되어 누군가의 손이 집어가기만을 기다리면서 선반에 층층이 쌓여 있었다. 진열대 사이 통로도 진열대 위만큼 혼잡했다. 검은색, 푸른색, 진분홍색, 보라색, 녹색, 부대끼는 색색의 망토 아래 발들이 제 갈 길을 가면서도 서로를 밟지 않으려 종종걸음을 쳤다. 마찬가지로 튀어나온 누군가의 팔꿈치가 명치를 찌를 뻔한 것을 겨우 피한 엘리너는 미어터지는 통로를 비집고 사람들이 조금 덜 몰린 가게 구석으로 끙끙거리며 빠져나왔다. 머리가 어지러운 게 평소보다 짙은 달콤한 향기 때문인지 산소부족 때문인지 분간이 힘들었다.

 

“괜찮아? 멍해 보이는데.”

 

어느새 옆에 나타난 통스가 말을 걸었다. 장밋빛으로 물들인 머리칼이 주변 장식과 한데 어우러져 꼭 가게의 정령처럼 보였다. 엘리너는 짧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냥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잠깐 어지러웠어. 다 골랐어?”

“맞다, 이거 좀 봐봐.”

 

통스가 잘 보여주겠다고 추켜들다가 바닥으로 떨굴 뻔한 상자를 겨우 받아낸 엘리너는 상자를 돌려주면서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잘 모르겠지만 괜찮아 보이네. 리무스의 취향을 잘 아는 건 너니까 어련히 네가 잘 골랐겠지.”

“그 사람은 초콜릿이면 다 고맙다고 할 걸. 사실 초콜릿이 아니어도 고맙다고 하겠지? 그래서 더 어렵다니까. 넌 어때? 골랐어?”

 

진심인지 아닌지 투덜거리던 통스가 툭 던진 질문에 엘리너의 말문이 막혔다. 조금 부자연스러운 간격을 두고서야 아무렇지 않은 척 타박하며 답을 꺼낼 수 있었다.

 

“난 안 산다고 했잖아. 그냥 널 따라온 거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 사지? 올해야말로 관계를 발전시켜볼 때라니까.”

“아닌 것 같은데.”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

“해보지 않아도 그 사람을 보면 알아.”

 

엘리너는 에이, 하며 불만스러운 소리를 내는 통스를 모른 척하면서 괜히 옆에 쌓인 상자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통스가 어떻게 생각하든 세베루스 스네이프에 대해서는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를 짝사랑한지도 몇 년이고 가깝게 지낸지는 더 오래되었지만 그 남자는 엘리너와 ‘관계를 발전시켜볼’ 생각 따위는 있지도 않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두 사람 사이가 무언가 달라질까 기대해보려는 때마다 망설이고 물러서며 결국 아무것도 확인해주지 않을 리 없다. 그러니 밸런타인 선물 따위를 보낼 이유도 없었다. 마음이 전해지기는커녕 암묵적 거절을 돌려받기나 할 테니까. 소녀였을 적에는 몰래 카드를 보내는 상상을 해보았던 것도 같지만 이제 엘리너는 지나치게 현실을 잘 알았다.

 

-

“…….”

“야, 표정이 왜 그래?”

“내가 한심해서…….”

 

20분 뒤 스리 브룸스틱스 탁자에 통스와 마주앉은 엘리너의 앞에는 야무지게 포장된 작은 초콜릿 상자가 놓여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상자를 집어 들고 동봉된 메시지 카드까지 적어버린 엘리너는 후회에 젖어 꾸러미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자신은 발전이란 걸 모르는 걸까. 이정도 세월이 지났으면 헛된 사랑은 접어야 할 텐데 이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휘둘리는 꼴이 우스웠다. 두통이 이는 기분에 관자놀이를 꾹 누르자 그녀를 지켜보던 통스가 마시라는 듯 자기 잔으로 엘리너의 술잔을 툭툭 쳤다.

 

“기운 내, 좀. 그냥 가볍게 선물 주는 거라고 생각해도 되잖아.”

“부담스러워할걸.”

“설마, 청혼도 아니고 그냥 초콜릿인데!”

“아니면 잘 받았다고 얘기한 후에 답례로 생일선물을 주시고 그리고 그걸로 끝이겠지.”

 

아마 속으로는 부담스러워하면서 겉으로는 그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높을 거란 생각에 뱅 쇼가 목구멍 너머로 훌훌 들어갔다. 그 모양새에 혀를 찬 통스가 뭔가에 한껏 집중하는 표정을 짓더니 어느새 얼굴에 커다란 매부리코를 달고는 과장된 투로 대사를 늘어놓았다.

 

“혹시 알아? 네 초콜릿을 받고 감동한 교수님이 진정한 사랑을 깨달을 수도 있다고. ‘오, 엘리너, 지금껏 겁쟁이처럼 굴었던 나를 용서해다오……! 내 사랑을 받아주겠어?’”

“진짜 헛소리네.”

 

매정하게 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헛웃음이 나왔다. 분위기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자 원래대로 코를 되돌린 통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렇지만. 시도해서 손해 볼 것도 없잖아.”

“……아냐. 역시 그만둘래.”

 

이 시도로 정말 손해 보는 게 없는 걸까. 다시 기대를 걸고, 마음을 내던지고, 그런데도 변하는 것이 없다면 그건 상처가 아닌가? 너무 오래 일방적으로 문을 두드려왔다. 언젠가 또 바보짓을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앞으로 한참 동안은 그럴 기운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엘리너는 잠깐 마른 장미색 리본으로 장식된 상자를 돌려보다가 탁자 근처 쓰레기통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러답게도 기민하게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통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설마 버릴 거야?”

“보내지도 않을 건데 치워버릴래.”

“차라리 네가 먹지…….”

“그럴 기분 아니야. 그럼 네가 먹든가.”

 

뚱하게 대꾸한 엘리너는 통스의 앞으로 상자를 슥 밀어 보냈다. 그래, 이편이 초콜릿에게도 훨씬 보람찬 생일지 모른다. 세베루스는 받아봤자 입에 대지도 않을지도 모르니까. 이제 와서 이런 작은 선물에 그 고집을 돌리는 일 따위 생길 리가 없지.

 

-

밸런타인 당일, 호그와트는 묘하게 소란스러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학생들 사이로 오가는 키득거리는 속삭임과 수줍은 눈길이 간질거리는 기운을 잔뜩 부풀려 복도를 걷기만 해도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는 걸 느끼게 될 정도였다. 다만 아침식사를 위해 연회장에 들어가자마자 통스의 편지를 받고 도로 뛰쳐나온 엘리너로서는 두통이 배가 될 뿐이었다. 잰걸음으로 중앙 홀을 가로지르는 동안 머릿속에 짤막한 편지가 스쳐지나갔다. 요약하자면 시리우스 블랙에게 엘리너가 샀던 초콜릿을 뺏겼다는 소리였다. 누군가는 어차피 버리려던 것, 뭐가 문제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 초콜릿에는 엘리너 자신이 직접 적은 카드가 동봉되어 있는데다 유감스럽게도 시리우스 블랙은 그녀와 세베루스의 미묘한 관계를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이전보다 그와 세베루스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한들(상대가 물에 빠지면 비웃다가 죽기 직전 물에서 건져줄 정도의 사이를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다면) 엘리너는 절대 시리우스가 얌전히 초콜릿을 먹기만 할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통스도 비슷한 생각으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 게 분명했다. 혹시 시리우스 블랙이 재미 삼아 초콜릿을 보냈다면……. 생각만 해도 손발이 차게 식고 머리에 열이 올랐다.

 

순간 검은 인영이 시야에 훅 나타났다. 퍼뜩 고뇌에서 깨어난 엘리너는 뒤늦게 앞을 가로막은 사람을 알아보았다. 우연인지 의도인지 반대편에서 이쪽으로 다가온 세베루스가 바로 앞에서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녀를 찾아온 건지 물었겠으나 마음이 급해 마침맞게 나타난 상대에게 질문이 먼저 튀어나갔다.

 

“세베루스, 혹시 오늘 뭐 받으신 것―”

“받았다. 그래.”

“……제가 다 설명할 수,”

“너는 늘 이렇게 내게 구원을 내리는구나.”

“네?”

 

뜬금없는 말에 잠깐 작동을 멈춘 머리가 순수한 의문사를 뱉어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저 사람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충격적인 한 마디를 소화하기도 전에 세베루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시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다는 건, 아직 내게 희망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 거냐……?”

“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평소와 딴판으로 엷은 물기를 얹고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엘리너는 휘몰아치는 혼란 속에서 세베루스를 쳐다보았다. 혈색 없던 얼굴에 광대부터 홍조가 돌고 이마 위로 급하게 나온 듯 검은 머리칼 몇 가닥이 헝클어진 모양이 낯설었다.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긴박함이나 분노의 결과였기에 두 가지 모두 해당되지 않는 촉촉한 눈매를 마주하자니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겁쟁이처럼 굴었던 나를 용서해다오.”

“아니, 잠깐, 저기.”

“내 진정한 심장을 모른 척하던 어리석은 남자를…….”

 

미쳤나봐.

 

마음속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미쳤든 그가 미쳤든 세상이 미쳤든 무언가 미치지 않고서야 세베루스가 난데없이 저런 낭만적 대사를, 그것도 그녀를 향해, 비꼬는 기색도 없이 진심을 담아 치고 있을 리 없었다. 엘리너는 애써 혼미한 정신을 추슬렀다.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그러니까 제…초콜릿을 받으신 거죠.”

“그래.”

 

이런 젠장, 시리우스 블랙을 만나면 결투를 신청하고야 말 것이다. 자신이 질 확률이 높다는 문제가 있지만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알아서 주문 몇 개는 맞아주겠지. 한 단어의 답을 건네는 목소리마저 지나치게 부드럽게 들려 눈을 질끈 감았던 엘리너는 세베루스가 다시 중얼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걸 보고서야 깨달은 거야. 네가 아직 날 포기하지 않아주었다는 걸 말이다.”

 

아뇨, 제가 포기했고 안 했고를 떠나 그건 시리우스 블랙의 농간인데요, 라고 말하기도 전에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렸다. 엘리너는 양손이 잡힌 채 안절부절 못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세베루스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정면만 보고 있기에는 심장에 무리가 갔다. 그러나 원래 주변을 걸어가던 사람에 더해 막 식사를 마치고 무리지어 빠져나오기 시작한 학생들까지 중앙 홀 한가운데에서 비일상적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흘긋흘긋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기 시작한 탓에 다른 곳을 보더라도 별로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세베루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아니, 엘리너. 난 지금 네게 답을 듣지 못하면 가슴이 터져 죽어버릴지도 몰라.”

“무, 무슨 답이요?”

“내가 그렇듯 너도 날 아직 사랑하는지!”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주변이 거슬려 붙잡힌 손을 손잡이 삼아 그를 끌어당겼으나 그녀보다 머리 반 개는 큰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연달은 격정적 언어의 향연에 겨우 잡았던 이성이 도로 비틀거렸다. 사랑? 지금? 여기서?

 

“역시 뭘 잘못 드신 건가요?”

 

어째서 십 년쯤 원했던 사랑 고백을 들은 순간의 반응이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이런 얼빠진 반문이어야 하는지 스스로도 참담했지만 반사적으로 지껄이는 입을 어쩔 수 없었다. 잠깐,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되는대로 튀어나온 질문에서 뒷목을 간질이는 위화감을 깨달으려는 찰나 시야에 들어온 세베루스의 얼굴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내려간 눈썹, 울적하게 가라앉은 눈가의 그림자, 떨리는 입술이 폐부를 찌르는 고통을 웅변하고 있었다.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 내가 잘못 생각했다면……내가 미워서 괴롭히고 싶은 거라면 그냥 그렇게 얘기해라.”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더 고찰할 겨를도 없이 침울한 낯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변명하는 말이 흘러나갔다. 어떻게든 저 얼굴을 달랠 수 있다면 그가 헛소리를 하고 있든 말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런……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을 미워할 리가……아시잖아요, 저는 당신을.”

 

검은 눈을 들여다보며 간절하게 호소하는 동안 가라앉았던 세베루스의 얼굴이 빠르게 밝아졌다. 마음이 놓여 무의식적으로 웃는 순간 휙 단단한 팔이 엘리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따뜻한 감촉이 입술을 눌렀다.

 

초콜릿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일순간 완벽하게 침묵이 찾아들었다가 곧 주변에서 헉 숨을 삼키는 소리와 환호와 야유가 섞인 작은 함성, 소란스러운 속닥거림이 퍼져나갔다. 엘리너는 지금까지 보아온 나날 중 가장 환하게 웃고 있는 세베루스를 올려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입술을 들먹였다. 머릿속에 거대한 물음표를 둘러싸고 작은 물음표들이 빙빙 돌고 있었다. 문득 뒤섞여 구별도 되지 않는 수많은 의문 위로 한 가지가 더해졌다. 왜 이런 순간에 기절을 하지 못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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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인지 다행인지 끝까지 기절을 하지 못한 탓에 엘리너는 결국 세베루스를 끌고 사무실로 돌아가기에 성공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니 갑작스러운 입맞춤 후로 세베루스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그래, 그래, 하며 반쯤 허공에 뜬 사람처럼 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20분쯤 지난 지금 엘리너의 사무실 안은 어색한 공기로 가득했다.

 

“…….”

“…….”

“…….”

“……정신은 드신 것 같네요.”

 

엘리너는 고개를 수그린 채 절대 들지 않을 것처럼 한 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 세베루스를 두고 약병을 정리하면서 툭 말을 걸었다. 사무실로 피신해 문을 걸어잠그고 계속 그녀의 옆에 붙어있으려는 세베루스를 애써 밀어내면서 생각을 모아 마침내 사랑의 묘약(아마도 좀 불량품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까지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했다. 일단 그 가능성을 깨닫자 해약을 만들기는 쉬웠다. 세베루스에게 잔을 들려주기 위해 우리의 사랑을 위한 축배라는 엄청난 발언을 해야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만족스럽게 잔을 들이키고는 곧 창백해져서 엘리너를 쳐다보다가 소리 없이 욕을 중얼거리던 세베루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녀가 맞게 짚은 모양이었다. 엘리너가 기필코 죽인다, 시리우스 블랙, 따위의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세베루스는 혹시 해약에 부작용이 있었나 걱정될 즈음에서야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상대가 세베루스 스네이프라는 걸 감안하고도 쥐구멍에 들어갈 만큼 소심한 소리라고 표현해도 될 법했다.

 

“……본의가 아니었다.”

“물론 그러시겠죠. 저도 본의가 아니었으니까요.”

 

엘리너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세베루스가 갑자기 회까닥 돌아버린 게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건만 왜인가 짧은 안도감이 지나가자 울렁울렁 뱃속이 불편하게 뒤틀렸다. 그 모든 말들, 거창하고 달콤하고 극적이던 사랑의 언어들. 그러니까 그게 다 약물의 업적이란 거지. 가짜 열정으로 빚은 엉망진창의 모조품이라고. 놀랄 일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혀뿌리부터 쓴맛이 배어났다. 잠깐 섞였던 초콜릿의 맛이 사라진 까닭일지도 몰랐다.

 

“그 초콜릿은 네가 보낸 건 아니겠군. 아니, 카드가 있었는데…….”

“제가 샀던……건 맞습니다만,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통스의 편지를 세베루스에게 건네자 탐독하던 눈길이 점점 뾰족해지면서 얼굴이 한껏 노기로 일그러졌다. 그제야 그녀가 알던 모습이 보여 문득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가 다정한 순간이 없었다고 한다면 너무한 거짓말이겠지만, 워낙 모난 사람이니 사랑에 푹 물러진 모습에 이질감부터 느낀 건 또 우스운 노릇이었다. 아니, 정말 우스운 건 순간이나마 깊게 의심하지 못하고 속아 넘어갔던 부분일까. 하지만 어떻게 한순간도 속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우스꽝스러워도 그렇게 다정하고, 그렇게 달콤한데. 몇 번이나 눈앞에 다가왔다가 세베루스가 물려버린 가능성이 마침내 구현되었는데.

 

“……그러니까 다 사랑의 묘약 때문에 저지른 짓이신 거죠.”

“……그래.”

“부정도 안 하시네요.”

“뭐?”

“불한당.”

“뭐라고?”

 

울컥 심술이 솟았다. 엘리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냉랭하게 문을 가리켰다.

 

“정신 차리셨으면 가세요. 수업 없으십니까?”

“아니, 엘리너…….”

“소문은 알아서 해명하세요. 당신 탓이니까.”

“지금 뭐……”

“안녕히 가세요.”

 

괜한 투정을 부리는 중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세베루스도 당황스러운 일을 당한데다가 아마 엘리너보다 더 수치스러울 터였다. 그래도 지금은 참고 싶지 않았다. 뭔가 더 말할 것처럼 입술을 열었던 세베루스는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미미한 당혹감을 지우지 않은 낯으로 곧이곧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고서야 엘리너는 털썩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코끝이 맵고 눈가가 뜨거워 진정하기 위해 턱을 꾹 닫고 숨을 참아야만 했다. 역시 세베루스가 다 나빴다.

 

-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아니, 진짜로 미안하다니까. 잘못했다고.”

“비석에 적어드리죠.”

 

주말이 되자마자 외출해서 시리우스의 집에 쳐들어간 엘리너는 그의 턱 밑에 지팡이를 겨눈 그대로 싸늘하게 대꾸했다. 무장해제 당해서 양손을 항복하듯 들고 있던 시리우스가 동정표를 얻으려는 양 날렵한 눈썹을 늘어트렸다가 지팡이가 목젖을 쿡 찌르는 서슬에 턱을 조금 더 추켜올렸다.

 

“좋은 뜻이었어!”

“자선사업 두 번 하시면 영국 살인율이 증가하겠군요.”

“그……술김에 프롱스랑 얘기하다가 조금 과해지긴 했지.”

“조금.”

“좋아, 많이. 근데 진짜 키스했냐? 잠깐, 정말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시리우스를 죽어라 쏘아보던 엘리너는 보란 듯이 한숨을 쉬면서 지팡이를 거두었다. 이미 쏘기 주문 한 번에 엿가락 다리 주문 한 번, 박쥐귀신 주문 한 번을 당한 시리우스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가 일말의 죄책감으로 한 수 물러줬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엘리너도 눈만 흘길 뿐 더는 몰아붙이지 않았다.

 

“화풀이 끝났나보지.”

“정당한 처벌인데요.”

“나보다 스네이프한테 화난 거 아냐?”

“대체 뭘 넣은 겁니까? 그냥 아모텐시아가 아닌 것 같던데.”

“말 돌리는 거 봐라.”

 

굳이 재수없게 지적하긴 했지만 세베루스 스네이프를 놀려먹고 싶었다 한들 엘리너에게 좀 과했다는 자각은 있기에 시리우스는 순순히 답을 꺼냈다.

 

“프레드와 조지가 시제품이라고 주고 간 거야. 기존의 아모텐시아보다는 덜 위험하다고 했는데……지금 보니 시제품인 이유가 있군. 이제 그쪽도 혼내러 갈 건가?”

“……됐습니다. 불만을 접수할 필요는 있겠네요.”

 

엘리너는 부루퉁하게 말하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일단은 사과와 해명도 들었고 말마따나 화풀이가 끝났으니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봐, 주문은 풀어주고 가야지! 퀼?”

“언젠가는 다른 손님이 오겠죠.”

“잠깐, 아직 말 안 해준 게―”

“좋은 시도네요. 그럼 이만.”

 

엘리너가 사라진 후 흐늘거리는 다리로 홀로 남은 시리우스는 멀찍이 떨어진 지팡이를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꼴사납지만 기어가면 닿긴 할 것이다. 그나저나 그렇게 매정하게 가버리다니 과연 스네이프와 붙어 지내는 사람다웠다. 깜빡한 이야기가 있다는 건 진짜였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이건 정말 그녀의 잘못이니까.

 

-

세베루스는 초조하게 인적이 드문 복도를 서성거렸다. 이제 곧 수업이 끝난 엘리너가 이쪽을 지나갈 시간이었다. 스파이 노릇도 때려치운 지 한참인데 어쩌다 이런 매복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어이가 없었지만 그만둘 마음도 들지 않았다. 엘리너가 그를 피한지도 벌써 두 주째였다. 처음엔 어색해서 그러려니 이해했고 며칠 후엔 착각일거라 스스로를 타일렀으나 갈수록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최소한의 인사와 업무적 대화가 끝나면 쌩하니 사라지는 태도에는 오해의 여지가 없었다. 마침내 뭐가 문제인지 따지려고 결심했더니 이상한 기색을 느꼈는지 이젠 대놓고 그가 다가가면 다른 길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미칠 노릇이었다.

 

“…….”

“엘리너! 거기 서라!”

 

어김없이 그를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는 모습을 발견한 세베루스는 황급히 엘리너를 쫓아갔다. 한동안의 쫓고 쫓기는 추격 끝에 마침내 비밀문이 고장 나 막힌 복도 끝에 엘리너를 가두는 일에 성공하자 저절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한 무리의 춤추는 보우트러클이 그려진 태피스트리에 등을 기댄 엘리너는 우리에 갇힌 동물마냥 몸을 긴장시킨 채 잔뜩 그를 경계하는 것 같았다.

 

“내가 널 어쩔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도망을 다닌 거냐?”

“……저는 할 얘기 없습니다.”

“아니, 있어야지. 아무 이유 없이 내가 디멘터라도 되는 것처럼 피했으면 할 얘기가 있어야지.”

 

말할수록 목구멍으로 울컥울컥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단순한 화는 아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서러움에 가까울 터였다. 가장 가깝게 여기던 이가 난데없이 한참 동안 자기를 피하면 아무리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기꺼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상처받기 마련이다.

 

“이유를 정말 모르십니까?”

“그래! 넌 밸런타인의 일 때문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그 일로 나한테 화를 낼 셈이냐? 속아서 사랑의 묘약을 먹은 게 내 탓은 아니잖으냐!”

 

바로 앞에서 마주보고서도 고집스럽게 눈을 피하는 모습에 속이 답답했다. 왜 그도 억울하다는 걸 알아주지 않는 걸까? 누구보다 세베루스 자신이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엘리너를 희롱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사람이 왜.

 

“네, ‘그건’ 당신의 탓이 아니겠죠.”

 

지나치게 건조한 어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기에 세베루스는 설명해보라는 양 팔짱을 끼고서 말을 얹지 않고 기다렸다. 그를 흘긋 쳐다보았던 엘리너가 도로 구두 끝으로 시선을 박았다.

 

“당연히 당신 잘못이 아니죠. 초콜릿을 간수하지 못한 건 저고, 묘약을 넣은 건 블랙 씨고, 당신은 선물을 받았을 뿐이니까.”

 

처음에는 단단하게 꽉 눌렀던 목소리가 갈수록 밧줄이 올올이 풀어지듯 수많은 감정으로 흔들렸다. 무심결에 엘리너에게 다가가려는 듯 발끝이 앞으로 움직인 순간 그녀가 휙 고개를 들었다. 울음으로 떨리는 입술과 뺨, 고집스럽게 뜨고 있으나 습기를 머금은 속눈썹을 보자 몸이 굳어버렸다.

 

“제가 쓸데없이 초콜릿 같은 걸 샀죠. 사놓고 건네지도 못해 이 사달을 냈네요. 네,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럼 다른 건요? 사랑의 묘약까지 바로 의심하지 못한 것도, 그 자리에서 화를 내기보다 당신을 받아들인 것도, 다 제 잘못입니까? 그렇겠죠. 그따위 거짓에 잠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이도 저도 아닌 사이로 지내온 시간도 죄다 당신 탓은 아니겠죠!”

“엘, 엘리너.”

 

버티다 버티다 무너진 것처럼 쏟아져 내린 말에 세베루스는 얼이 빠져 엘리너의 이름만 더듬거렸다. 언뜻 그녀의 얼굴에 후회하는 기색이 스쳤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누르던 엘리너가 살짝 가라앉은 투로 쏘아붙였다.

 

“갈래요.”

“잠깐만!”

“미워요, 따라오지 마세요!”

 

엘리너는 그대로 세베루스가 다급하게 붙잡은 망토 자락마저 홱 빼내고 옆을 스쳐 달려가 버렸다. 세베루스는 빈 손을 들고 굳어 있다가 구두 소리가 멀어지고서야 몸을 돌려 이미 인적이 없는 복도를 황망하게 응시했다. 잠깐만, 기다려, 목적지를 잃은 허망한 호소만이 남아 입술 안쪽에 걸려 있었다.

 

-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미쳐버리겠네.”

“비석은 알아서 준비해라.”

“너나 준비하시지?”

 

세베루스는 진심으로 피를 볼 것 같은 표정으로 시리우스 블랙에게 지팡이를 겨눴다. 마주 지팡이를 겨누던 시리우스가 앞머리를 불어 올리며 짜증을 냈다.

 

“좀! 저번에 끝낸 거 아니냐? 내가 무슨 이유로 널 두 번이나 참아줘야 하는데?”

“닥쳐.”

 

그 말 그대로 밸런타인 이후 이미 한 번 시리우스의 플랫을 뒤집어엎은 전적이 있던 세베루스는 과거를 편리하게 무시하고 으르렁거렸다. 이제와 또 이러는 이유를 대자면 당연히 화풀이였지만 시리우스 블랙에게 할당할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퀼이랑 무슨 일 있었지.”

“스투페파이!”

“아, 개자식아!”

 

시리우스는 붉은 광선을 피해 몸을 날리며 재차 분통을 터트렸다. 좀 너그럽게 도와주려고 해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놈이었다. 남의 연애에는 참견하면 안 된다는 걸 포터 부부며 통스와 리무스라는 두 쌍을 거쳐 겪어놓고도 술이 원수라고 옛날 기분을 내봤다가 엘리너와 세베루스에게 번갈아 봉변을 당하고 있으니 후회가 막심했다. 제임스도 이 고통을 분담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돌겠군. 차라리 연애 상담을 요청해주겠어?”

“드디어 머리까지 개가 됐군.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

 

세베루스 스네이프에게 연애 상담을 해주는 시리우스 블랙이라니 개소리인 건 사실이었다. 역시 이대로 결투를 속행할까 강렬한 유혹이 들기는 했으나 일단은 서로 짜증난다고 죽이지 않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으니(상대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다소 의심이 가긴 하지만) 해리가 본받을만한 어른이 되기 위해 참아보기로 했다. 자기를 개라고 부르는 주제에 본인이 더 미친 개 같은 상태로 보이는 놈의 주의를 돌릴 만한 얘기가 있을지 고민하던 시리우스는 마침내 까먹고 있던 정보 하나를 기억해냈다.

 

“아, 저번에 퀼에게 설명해주는 걸 잊었는데.”

“엘리너를 만났다고?”

 

만난 게 아니고 습격당했지, 투덜거리고는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지껄이는 시리우스 블랙의 이야기를 다 들은 세베루스는 누르락붉으락해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엘리너에게 절대―이 이야기―”

“전해주라고 얘기했더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뭐, 수줍어하시나?”

“입 다물어.”

“좋아, 알아서 하라고. 그리고 부디 이 황금 같은 주말에 내 집에서 꺼지고.”

 

진저리를 치며 삐딱하게 대꾸한 시리우스가 훠이훠이 현관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작별인사 대신 문짝을 부술 듯이 닫고 나오면서도 어쩐지 엘리너가 자신을 내쫓던 기억이 떠올라 한층 마음이 복잡했다. 이제 모른 척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

엘리너는 과제를 채점하다말고 자기도 모르게 책상을 쾅 내리쳤다. 머릿속에 세베루스와 마주했던 얼마 전의 일이 다시 재생된 탓이었다. 왜 그렇게 유치하게 다 쏟아부어 버린 걸까? 게다가 ‘미워요?’ 어린애도 아니고 그게 무슨 말이람. 이미 충분히 당황스러울 사람에게 생떼를 부린 꼴이었다.

 

역시 사과해야겠지. 여전히 그를 떠올리면 가슴팍에 서러움부터 찰랑거렸지만 과한 건 과한 거였다. 한동안 초조해하는 것 같던 세베루스는 요 며칠 그녀를 보면 뜻 모를 눈빛을 하다가 입술만 달싹이고는 먼저 자리를 비워버리기 일쑤였다. 이대로는 정말 영영 사이가 틀어질지도 몰랐다. 더 좋아하는 쪽이 약자라는 말이 사실인지, 세베루스를 멀리하고 있자니 자신부터가 심장이 콕콕 찔려 괴롭다는 이유도 있었다. 다만 당장 세베루스를 찾아갈 용기는 아직 없었다. 먼저 뿌리쳤던 주제에 세베루스가 그녀를 대놓고 거절하면 그때야말로 울어버릴지도 몰랐다. 좀처럼 착잡함이 가시지 않아 엘리너는 결국 깃펜을 내려놓았다. 잠깐 산책이라도 할까 싶었다.

 

“…….”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입술이 딱 붙어버렸다. 거울마냥 당황한 표정을 담은 세베루스의 얼굴이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인기척은 느끼지 못했는데 언제부터 여기 서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왜……왜 여기 계십니까?”

“내쫓을 생각은 말아라.”

 

대뜸 열린 문 사이로 발부터 끼우며 내뱉는 말이 퍽 다급하게 들렸다. 그렇게 내가 도망갈 것 같았나, 최근 행적을 반성하면서 엘리너는 머뭇머뭇 문을 조금 더 열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들어오세요.”

“……정말이냐?”

“……내쫓아드릴까요?”

“아니.”

 

예상 밖으로 선선한 반응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세베루스는 엘리너가 그 의심을 실천으로 옮기기 전에 잽싸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세베루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차를 준비하겠다는 명목으로 괜히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자니 기시감이 들었다. 지금 등을 돌리면 밸런타인 날의 세베루스가 엷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눈으로 좇고 있을 것 같았다.

 

“차는 필요 없어.”

 

그런 착각을 깨려는 듯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너는 찬장을 건드리던 손을 툭 떨구고 느리게 몸을 돌렸다. 지극히 제정신인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맞이했다. 더 시간을 끌기를 포기하고 세베루스의 앞에 마주 앉자 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는지 아직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무슨 이야기를?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시 화를 내려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쩌면 이제 나도 지쳤다고, 손을 떼겠노라 선언하러 온 걸지도 모른다. 긍정적인 가능성이라면 정말 이렇게 살 거냐고 없던 일로 하자고 부탁하려는지도 모르고. 아주 터무니없는 가능성으로는 사과하며 다시 사랑을 고백할지도 모른다. 물론 마지막은 그녀의 머릿속에서도 말도 안 되는 농담이었다.

 

“최근에 시리우스 블랙을 만났는데.”

 

아니, 혹시 범죄를 고백하고 도움을 청하러 오신 건가?

 

“……드디어 죽이셨나요?”

“너는 나를 어떻게 보기에 그런 말부터 나오는 거냐?”

“농담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농담이에요.”

“두 번 말한다고 신빙성이 높아지지는 않아.”

 

엘리너는 머쓱하게 딴청을 피우며 손깍지를 끼었다. 잠시간 못마땅하게 이쪽을 쳐다보던 세베루스는 금세 조용해졌다. 무심결인지 그의 손끝이 책상을 두드리는 톡, 톡, 톡 소리만이 귀를 건드렸다. 왜 말을 잇지 않는지 억측하지 않기 위해 그 규칙적인 리듬만 생각하려 애쓰다가 불현듯 그도 긴장한 거라는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그 찰나 세베루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날……밸런타인에 초콜릿을 먹었던 건 네가 보낸 선물이었기 때문이야. 카드가 없었다면 그냥 버렸을 거다. 아니, 널 탓하려는 게 아니니 그냥 들어라.”

“…….”

“시리우스 블랙이 네게 말하는 걸 잊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일견 두서없는 말들이었다. 엘리너는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세베루스가 얇은 입술을 축이고 시선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이야기에 능숙한 목소리가 드물게도 멈칫거리고 헤매며 속삭임에 가깝게 이어졌다.

 

“거기 들었던 사랑의 묘약은……완벽하게 사람을 조종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군. 그러니까, 반드시 바탕이 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상대를, 사랑한다면, 드러내게 하는 정도지, 바닥부터 열정을 위조할 힘은 없다고 했다.”

“아.”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그날 했던 말들, 행동은, 물론 약 때문이지만―빌어먹을.”

 

거칠게 머리칼을 빗어 넘기는 손가락 사이로 붉은 귓바퀴가 드러났다. 엘리너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애초에 숨은 어떤 순간에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조차 잊은 채로 세베루스를 응시했다.

 

“근거가 없는……건……아니었다는 소리다. 본의가 아니었다고 말한 건, 그런 식으로 정신이 나가서 갑자기……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고 한 거야.”

“……그래서요?”

“…….”

 

긴 한숨이 자리했다. 거의 고해성사를 하는 분위기로 세베루스가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정말로, 그런 식으로 전하려는 게 아니었다. 네가 선물을 주어서……고맙다고 답례하고,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네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무엇을,”

“두려워서 그랬다고……후회한다고. 그리고 내게 희망이 있는지. ……나를 아직 사랑하는지. 이걸 내 입으로 다 말해야겠냐?”

 

밸런타인 날 약에 취한 세베루스가 극적으로 늘어놓던 말들이 보다 퉁명스럽고 수줍은 방식으로 다시 발해졌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무심코 그날을 복기하던 입술이 중얼거렸다.

 

“‘내 진정한 심장’?”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베루스가 혀를 깨물고 싶은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부정하고 싶은 기색이 만만했지만 이내 포기했는지 체념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럴까봐 두려웠더니 걱정을 현실로 만들어주는구나. 놀릴 테면 놀려라.”

 

그 시인이 무엇보다 비현실적이었다. 지금까지 눌러 참았던 것들이 갑자기 갈비뼈 안에서 왈칵 흔들렸다. 흘금 엘리너를 살피던 세베루스가 당혹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 너머로 몸을 기울이고 엘리너에게 손을 뻗었다.

 

“왜, 왜 우는 거냐? 응?”

“울려는 게 아니라, 아……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엘리너, 내가 뭘 잘못……아니,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대로, 제대로 말해주세요. 저를……저를 사랑하세요?”

“……그래.”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조심스럽게 뺨을 감싸고 눈물을 닦아냈다. 눈가를 떠나는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세베루스가 한숨을 쉬듯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모든 무기를 내려놓는 선언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그래.”

 

엘리너는 결국 울음을 그치는 것을 포기하고 온통 젖은 얼굴을 소매로 가려버렸다. 당황한 세베루스가 그녀를 달래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

“다 울었냐?”

“모르겠는데요.”

“…….”

“……일단은요.”

 

엘리너는 소파에 앉아 발끝을 어색하게 흔들었다. 방금 전까지 옆에 앉은 세베루스에게 안기다시피 해서 토닥임을 받고 나니 얼굴이 홧홧해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세베루스가 옷매무새를 정돈하는지 옆에서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숨을 고르다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짐짓 농담처럼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정말로 오늘도 사랑의 묘약을 드신 건 아니죠?”

“제발 당분간 그 물약은 입에 올리지도 말아라.”

 

대놓고 짜증을 내는 어조에 픽 웃음이 나왔다. 세베루스는 그녀의 웃음을 어떤 식으로 해석했는지 투덜거림을 그치지 않으며 한동안 망토를 더 바스락거렸다.

 

“앞으로 내가 뭘 할 때마다 계속 놀려먹을 셈은 아니겠지?”

“모르죠, 청혼이라도 하시면 아무래도―”

 

무심코 통스가 했던 말이 떠올라 중얼거린 엘리너는 세베루스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뚝 말을 그쳤다. 작고 검고 벨벳으로 덮인, 전체적으로 굉장히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상자가 세베루스의 손에 들려있었다. 갑자기 혀가 꼬인 엘리너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세베루스가 그녀의 눈동자가 향한 쪽으로 같이 눈길을 돌렸다가 확 얼굴을 붉혔다.

 

“아니, 아니야! 네가 뭘 생각하든 그건 아니다!”

“제, 제가, 제가 뭘 생각했는데요?”

“싫다고 오해하지는 말고, 아니, 아무튼 그건 아니야!”

 

엉킨 대화 사이에서 다급하게 변명하다 못해 세베루스가 서툰 손가락으로 벨벳 상자를 열어보였다. 순간 움찔 놀랐던 엘리너는 상자 안에 반지가 아니라 목걸이가 놓여 있는 광경을 보고서야 어깨에 힘을 풀었다.

 

“당연히 청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이 당황해놓고 말은 잘 하는구나.”

“당신이 너무 당황하시니까…….”

 

헛기침을 하는 엘리너를 잠깐 째려본 세베루스가 한숨을 쉬고 목걸이를 허공에 늘어트렸다. 고운 은사슬 끝에 깃털로 감싸인 작은 하트 모양 은제 펜던트가 걸려 흔들렸다. 엘리너는 그 부드러운 반짝임을 바라보다가 세베루스의 나직한 음성에 눈을 돌렸다.

 

“늦었지만……밸런타인 답례 겸 생일선물이다.”

 

이쪽으로 건네진 목걸이를 받으려다 움찔 손을 멈추는 모양새에 세베루스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걸어주실래요?”

“…….”

 

망설이다 꺼낸 작은 부탁에 비슷한 시간을 들여 머뭇거리던 세베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검은 망토로 감싸인 팔이 어깨 부근을 두르고 목 뒤에서 잠금쇠를 채우려는 손가락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가까이에 닿은 숨결이 옆얼굴을 간질여 괜히 그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 제 숨을 가만가만 죽이게 되었다. 이윽고 길고 마른 손가락이 목덜미를 스치고 머리채를 모아 목걸이 밖으로 빼냈다. 세베루스가 도로 거리를 벌리고서야 숨을 토해낸 엘리너가 옷 위로 올라앉은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세베루스를 마주보았다.

 

“……어울리나요?”

“……그래. 아주.”

 

더는 서로를 피하지 않는 시선이 길게 얽혔다. 엘리너는 다시 호흡이 얕게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예상했던 것처럼, 혹은 시간을 되감은 듯이, 입술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세베루스의 손이 뒷목을 받치고 목걸이 줄을 따라 살갗을 어루만졌다. 가볍게 떨어진 입맞춤 사이로 세베루스가 속삭였다.

 

“이걸로 그날은 잊어다오.”

“글쎄요, 세베루스…….”

 

그런 열정적인 고백은 절대 못 잊을 것 같은데요. 마주 속삭인 엘리너가 세베루스가 답을 하기도 전에 다시 입술을 눌렀다. 잠깐 맞닿은 입술 뒤로 헛웃음을 짓던 세베루스는 금방 항복하며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결국 잘못 전해진 모든 것들 뒤에 진심이 있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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