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베루스와 드림주가 모두 불사조 기사단이 되었으며 볼드모트의 죽음으로 전쟁이 끝난 친세대 AU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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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중 난파를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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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선실 안에는 커다란 정적 아래로 희미한 엔진의 소음과 배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 소리만이 자리했다. 각자의 침대에 걸터앉고도 무릎이 스칠 지경으로 가까운 거리에 굴하지 않고 세베루스와 엘리너는 고집스럽게 서로에게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약 5분이 더 지나고서야 마지못해 세베루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의를 하러 만났으면 말을 해라.”
“……너도 말 안 하고 있었잖아.”
엘리너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두 사람은 낮의 말싸움 이래 몇 시간째 냉전 중이었다. 세베루스는 이번에도 엘리너가 먼저 마음을 풀어주길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세베루스는 그녀가 먼저 그에게 맞춰왔다는 인식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너 릴리한테만 다정한 거 아니냐, 같은 소리를 꺼낸 꼴을 보니 가능성이 높았다. 이성으로는 그저 가벼운 투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필이면 그 말이 세베루스 스네이프, 그녀 자신의 걱정은 귓등으로도 안 듣던, 릴리를 짝사랑했던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입에서 나왔다는 부분에서 숨길 도리 없이 마음이 상하고 말았다.
“그래, 마음대로 하시지.”
눈썹을 찡그린 세베루스가 아주 잠깐 입술을 씹었다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은근슬쩍 눈길이 엘리너에게 돌아갔지만 엘리너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기다렸다는 듯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후보는 먼로, 마셜, 하우스먼. 맞지?”
속을 썩이는 동행에 이어 속을 썩이는 임무까지 떠오르자 세베루스의 얼굴이 좀 더 구겨졌다. 얼마 전 마법부 직원으로 가장하고 있던 죽음을 먹는 자 측의 스파이가 볼드모트의 몰락 후 마법부의 기밀 서류를 들고 도망친 모양이었다. 전후 수습으로 인력이 부족한 오러국이 불사조 기사단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두 사람은 머글로 위장한 스파이를 찾아내는 임무를 맡아 이 여객선에 오른 차였다. 배에 죽음을 먹는 자가 타고 있다는 정보를 쥐고 사우샘프턴에서 출발했을 때에는 하루 이틀이면 정체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 여겼으나 상대는 생각보다 용의주도했다. 수상한 행동거지를 보이는 몇 사람으로 후보를 좁혀봤자 결정적 증거를 찾기 전까지는 그가 괴짜인지, 변장한 마법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 그래. 적어도 오늘 버뮤다에 기항했을 때는 꼬리를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대로는 꼼짝없이 선상여행만 즐기고 미국 관광까지 하게 생겼군. 역시 베리타세룸을 들고 와야 했어.”
“상대가 머글이면 어쩌려고.”
“마법부가 수습에 나서야 했겠지.”
기회가 될 때마다 레질리먼시로 사람들의 의식을 들여다보고도 큰 소득을 얻지 못한 세베루스가 쯧 혀를 찼다. 상대 역시 첩자인 만큼 정신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일에는 능할 터였다. 본래라면 장난스러운 타박으로 말을 받아쳤을 엘리너가 이 대목에서 싸늘하게 입을 다무는 바람에 대화는 그대로 끊기고 말았다. 세베루스는 막막함에 젖어 이 상황에서 꺼낼만한 화제이며 너무 절박하지 않게 들리면서 단답으로 끝나지 않을만한 말을 찾으려 애쓰다가 문득 억울함이 치솟아 도로 침묵해버렸다. 그야 자신이 처음에 말을 조금 잘못 꺼냈을지도 모르지만, 그 부분은 경솔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도대체 왜 아직도……. 다시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싶지 않아 억지로 넋두리를 꾹꾹 속으로만 눌러 참던 찰나 갑작스럽게 배가 흔들렸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다소 파도가 거칠어졌다지만 이번의 갑작스러운 충격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바깥이 이미 어두워져 객실의 작은 창문으로는 상황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세베루스는 갑판으로 나가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섰다.
[승……승객 여러분께 알립니다. 현재 풍랑이 거세어 잠시 해상 정박할 예정이오니 침착하게 선실 안에 머물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쿵 소리가 나며 배가 크게 덜컹거렸다. 균형을 잡기 위해 문고리를 움켜쥐었다가 뒤를 돌아본 세베루스는 묘한 표정의 엘리너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두 사람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냥 풍랑일 리가 없다.”
“……그래. 암초일까?”
“그렇다면 그렇게 알렸겠지. 역시 나가봐야겠어.”
문을 열고 나가니 복도 곳곳에 사람들이 저마다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몇 사람은 이미 갑판 계단으로 향한 모양이었다. 엘리너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세베루스의 뒤를 잰걸음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계단 앞에 이르렀을 즈음 갑자기 위쪽부터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남자가 새파란 안색으로 반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외계인이다! 외계인이 바다 밑에 숨어 있다가 지구를 침공하려는 거야!”
미친 사람처럼 외치는 소리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엘리너는 당혹감에 젖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후들후들 떨던 남자는 이제 아무나 붙잡고서 MI6와 CIA가 합작해서 외계인의 존재를 숨겨왔다느니 이제 이 배는 우주로 끌려갈 거라느니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하우스먼은 아무래도 그냥 괴짜였던 것 같군.”
세베루스가 이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엘리너는 불현듯 그 친밀한 동작에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면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평범함과 먼 괴상한 조합으로 옷을 입던 자라 요즘 머글 복장에 익숙하지 않은 마법사인가 싶었는데 저 모습을 보니 그는 후보에서 지워야 할 성 싶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외계인이라니,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엘리너는 아까보다 걸음이 신중해진 세베루스의 등에 붙어 계단을 올랐다.
갑판으로 통하는 문을 나선 순간 세베루스가 우뚝 발을 멈췄다. 의아하게 그의 뒤에서 고개를 내민 엘리너는 그 심정을 백분 이해하고 말았다. 조명으로 밝혀진 갑판 위며 난간 너머로 커다랗고 미끈미끈하고 굵직한 것이 춤을 추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모교의 아련한 추억이 스쳐갔다.
“저거 그러니까…….”
“맞는 것 같은데.”
비명을 지르며 이쪽으로 도망쳐오는 사람들 사이로 대왕오징어의 통통하고 거대한 다리가 철벅 소리를 내며 갑판을 때렸다. 촤아악, 아치를 그리며 솟구친 우툴두툴한 촉수로부터 바닷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문간에 있는 두 사람까지 한 바가지 물을 튀겼다. 그 서슬에 배가 다시 크게 출렁거렸다. 엘리너는 짧은 감상에서 깨어나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빼어들었다. 이 대왕오징어는 호그와트의 친척보다 훨씬 난폭한데다 더 거대한 것 같았다. 그나마 선장이 닻을 내려 배가 바로 뒤집히진 않을 터였으나 대왕오징어가 계속 여객선을 노린다면 난파도 시간 문제였다.
“어떡하지?”
말을 섞기 싫다고 자존심을 세울 상황이 아니었다. 다급하게 묻자 마찬가지로 지팡이를 쥔 세베루스가 빠르게 대꾸했다.
“스투페파이부터 써보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같은 곳에 맞추면 보다 가망이 있겠지.”
이쪽저쪽으로 기우는 갑판은 바닷물이 뒤덮여 온통 미끌미끌했다. 서로 손을 잡고 끌며 나동그라진 야외 탁자와 의자를 피해 뱃전으로 겨우겨우 다가가자 저 아래 검은 수면에 잠겼다가 드러나길 반복하는 인광 어린 몸통이 보였다. 세베루스와 엘리너는 할 수 있는 한 난간을 단단히 잡고 나란히 그 점액 덮인 표면에 지팡이를 겨눴다. 하나, 둘, 셋을 센 다음 순간 붉은 광선이 동시에 같은 지점을 맞췄다. 일순 누군가의 손가락에 눌린 것처럼 밀려났던 오징어의 몸통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다리 열 가닥이 미친 듯이 허공을 가르면서 배를 휘감기 시작했다. 마치 공포소설의 한 장면처럼 번개가 어두운 하늘을 번쩍 밝히고 사라졌다. 오후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빗줄기가 한층 거세지면서 거센 파도 소리며 대왕오징어가 난동을 부리는 소음과 함께 주변의 소리를 모조리 분간할 수 없는 굉음으로 뒤섞어버렸다.
“안되겠어! 일단 들어가자!”
“뭐라고?”
“돌아가자고!”
엘리너는 젖어서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얼굴에서 걷어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절 마법이 통하지 않으니 일단은 좀 덜 정신없는 환경에서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게 나아보였다. 겨우 말이 전해졌는지 세베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배 밖으로 미끄러지지 않고 실내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라운지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사이사이에 승무원들이 승객들에게 둘러싸여 현재 선장님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당장은 배 안이 가장 안전하니 제발 방으로 들어가시라, 같은 문구를 애처롭게 반복하는 모습이 보였다. 쫄딱 젖은 두 사람에게 잠시 시선이 모였지만 갑판에 나갔다가 도망쳐온 사람이 처음이 아니기에 큰 관심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군인으로서 나는 민간인을 보호할 의무가 있어. 그 괴물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오겠소!”
“먼로 대령님, 저건 괴물이에요!”
“걱정 마시오. 사냥총을 가지고 왔으니까!”
갑자기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체격이 좋은 노인이 비장한 얼굴로 산탄총을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자기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세부사항이 바뀌는데다 방에 틀어박혀 혼자 무언가를 하는 일이 잦던 노인은 그들이 쫓던 표적의 후보 중 하나였다. 엘리너는 세베루스와 재차 눈을 마주쳤다.
“진짜 군인인가본데?”
“가장에 심취한 머저리일지도 모르지.”
“어쨌든 죽음을 먹는 자라면 여기서 총을 쏘자고는 안 할 걸.”
“그보다 이럴 때가 아닌 것 같다.”
“아. 그래.”
마법을 튕겨내는 외피에 총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저런 걸 날렸다가는 이미 성질이 난 대왕오징어의 화만 더 돋울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노인의 뒤를 쫓아 갑판으로 돌아갔다. 잠깐 안에 들어갔다 나오니 천장과 벽이 더욱 절실했으나 괴로워할 시간이 없었다.
“죽어라, 괴물아! 여왕 폐하를 위해!”
그러나 말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뭐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뛰쳐나간 먼로는 가까이 선수를 가로지른 촉수에 대고 총을 쏘아 갈겼다. 의외로 총알이 튀어나오지 않아 희망을 가졌으나 외피에 박혔나 싶었던 납구슬들은 뒤로 밀려났던 다리가 펄쩍 위아래로 꿈틀거리자 점액을 타고 주르륵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빨판이 달린 다리가 그대로 먼로를 휘감아 저 멀리 치솟아버렸다. 곧 풍덩 소리가 들리고, 창문으로 지켜보았는지 구명정을 내려보내라는 사람들의 요란한 비명이 계단으로 새어나왔다. 세베루스는 짧게 욕설을 지껄이고 휙 엘리너를 돌아보았다. 그를 등진 어깨가 굳어있었다. 왜 그러냐고 그녀를 부르기 직전 엘리너의 뒤로 갑판 입구 쪽에 서있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가 익숙한 얼굴이라든가 막 갑판으로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 손에 들린 마법 지팡이가 이쪽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채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이 모든 과정이 지나가고 다음 순간 세베루스와 엘리너가 함께 지팡이를 휘둘렀다.
“익스펠리아르무스!”
남자의 등 뒤로 문짝이 쾅 닫히고 허공에 지팡이가 날았다. 무장 해제된 지팡이를 잡아챈 세베루스는 자기 지팡이를 내민 채 미끄러운 바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위협적으로 상대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셨군. 마셜, 아니, 본명은 맞나?”
검은 지팡이 끝에 턱 밑을 찔린 남자가 눈을 굴렸다. 40대쯤 되어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는 두 사람이 첩자로 의심하던 세 후보 중 하나로, 엘리너와 세베루스가 배 안을 조사하고 다닐 때마다 기이하게 자주 마주치던 상대였다.
“아, 역시. 나를 쫓는 상대가 있다면 여러분일 줄 알았소.”
“그래, 우리가 당신을 찾을 때 당신은 우리를 찾았을 테니까. 어쨌든 이제 여유부리며 여행하는 시간은 끝이야.”
“잠깐, 잠깐! 나를 붙잡기 전에 다시 생각해보지. 지금은 우리의 이……대립을 잠시 미뤄두고 협력해야 할 때가 아니겠소?”
마셜이 지팡이 끝을 피하려고 애쓰면서 턱짓으로 뱃전에 감긴 대왕오징어의 다리 끝을 가리켰다. 팔짱을 끼고 옆에 서 있던 엘리너가 서늘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있다고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당신 말을 믿어줄 이유도 없고.”
“하하, 둘보다는 셋이 낫겠지. 그리고 신뢰할 수 없다니, 이 배가 뒤집히면 나도 죽소. 목숨만큼 비싼 담보도 없지.”
세베루스의 험악한 눈길을 받은 남자는 넉살좋게 웃던 표정을 지우고 다소 얌전해졌다. 엘리너는 세베루스의 어깨를 잡아당겨 귓가에 속삭였다.
“얘기는 들어볼까?”
“저놈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지는 않을걸.”
“우리도 그렇지. 어쨌든 지팡이 둘보다 지팡이 셋이 나은 건 사실이니까.”
세베루스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를 짐작하기라도 한 듯 마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나라고 획기적인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오. 하지만 스투페파이를 다시 써볼 수는 있겠지.”
“고작? 그 방법은 이미 실패했어.”
“두 사람이었잖소. 셋이서, 그리고 구명정을 타고 좀 더 저것의 몸뚱이에 가까이 간다면……다를지도 모르지. 용도 마법사 일곱이면 기절하는데 오징어가 용만큼 마법에 강하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소이다.”
“당신 혀는 확실한 말은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는 모양이군.”
한 번씩 남자를 쪼아대기는 했으나 엘리너와 세베루스로서도 마땅히 다른 방도가 생각나는 건 아니었다. 결국 두 사람이 계속 감시하면서, 지팡이는 마법을 쓰기 직전에야 돌려주는 조건 하에 마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론이 났다. 선원 경력이 없는 세 사람이 풍랑 속에서 배 옆에 묶인 구명정을 끌어내리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진짜 선원의 도움을 받자니 설명할 길이 막막한데다 그들은 이미 이 난장판 속에서 아까 바다에 빠진 먼로 대령을 구출하기 위해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세베루스가 매듭과 도르래를 가지고 씨름하며 씨근덕거리던 중 몇 걸음 옆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잠시 잠잠해지는가 싶다가 도로 거세진 폭풍우 속에 원래라면 들리지 않았을 소리가 기이하리만치 날카롭게 귀에 꽂혀 세베루스는 곧장 밧줄을 내던지고 옆을 돌아보았다. 마셜이 엘리너의 어깨를 움켜쥐고 억류하며 지팡이로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대왕오징어가 움직이는 방향을 보느라 잠깐 방심한 사이 지팡이를 빼앗긴 엘리너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자, 빨리 보트를 내려! 그전에 내 지팡이부터 돌려주면 고맙겠군!”
“이 개자식이!”
“오호, 숙녀분의 목이 내 손에 달려있다는 걸 기억해주면 고맙겠네! 이 거지같은 보트만 필요 없었어도 당장 분지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
세베루스는 지팡이를 마주 겨누었지만 마셜이 훔친 지팡이 끝으로 엘리너의 턱 밑을 꾹꾹 눌러대는 서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빛으로 그를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팔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엘리너는 가망을 찾지 못했는지 저항 없이 굳어 있었다. 이제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마셜이 순간이동을 할 수 없는 이 거지같은 해역과 거지같은 머글의 교통수단과 거지같은 오징어에 대해 욕을 늘어놓는 소리가 비바람에 가렸다가 들리기를 반복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무언가 찬찬히 생각해보려 해도 가느다란 목에 겨눠진 지팡이를 보면 고삐를 죌 수 없는 다급함과 두려움이 튀어나와 지팡이를 쥔 손이 떨렸다. 이대로 저 자의 요구에 따르는 건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하지? 엘리너가 죽을지도 몰랐다. 그냥 저 자를 보내주고 다음을 노린다면, 아니, 하지만 지팡이를 돌려준다고 남자가 엘리너를 놓아줄까? 그녀가 다치면, 아, 빌어먹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준다면. 아니지, 엘리너가 이럴 때 하는 언행은 대체로 그의 속을 긁을 가능성이 현저히 높았다…….
“숙여!”
그리고 벼락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엘리너가 이쪽으로 몸을 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셜이 들고 있던 지팡이 끝에서 불꽃이 튀고, 핏방울이 날리고, 마른 몸이 온 힘을 다해 가슴을 밀쳐 숨이 턱 막히면서 둘이 한꺼번에 바닥을 구르는 순간 방금 전까지 세베루스의 머리가 있었던 자리로 육중한 생물의 다리가 허공을 갈랐다.
“뭐하는 거억!!”
유감스럽게도, 혹은 전혀 유감스럽지 않게도 대왕오징어의 다리는 제때 피하지 못한 마셜을 저 멀리로 날려버리며 철퍼덕 배 위로 떨어졌다. 그가 손에서 놓친 엘리너의 지팡이만이 호를 그리며 공중에 떠올랐다. 낙하하는 지팡이를 낚아챈 엘리너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젖은 옷자락에 지팡이를 문질러 닦았다. 세베루스는 얼얼한 뒤통수도 잊고 그녀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흠뻑 젖어 더 새까맣게 보이는 머리칼에 감싸인 낯은 익숙한 태연함과 약간의 피로만을 담고 있었다. 문득 오른쪽 귀 아래부터 뺨에 이르기까지 피가 배어나오는 상처가 눈에 들어오자 확 정신이 들었다.
“너! 도대체 왜 그렇게!”
“또 뭐가 불만이야?”
뱃전에 기대 앉아 물이 들어가서 쓰린 상처를 슬쩍 건드려보던 엘리너는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세베루스를 어처구니없이 응시했다. 고맙다는 말을 기대하진 않았으나 방금 일의 어디에 화를 낼 이유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불만이냐고? 뭐가 불만이겠냐?”
세베루스는 전혀 감도 잡지 못한 그 얼굴에 더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언성을 높이는 이유가 주변에 가득한 소음을 뚫기 위해서인지, 화를 주체할 수 없어서인지 분간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빈틈을 잡았으면 그놈의 지팡이만 뺏으면 됐잖아! 경고만으로도 나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어!”
“널 도와준 거잖아! 내가 더 잘 했어야 한다는 거야?”
“그런 이유일 것 같아? 내가 그런, 그따위로 비겁한 놈으로 보이는 거냐? 내가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런 식으로 위험에 몸을 내던지지 말라고 몇 번을!”
“도와줘! 내가 잘못했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어!”
“그걸 말이라고―”
“으악! 이거 놔!”
엘리너도 따라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불씨가 된 일과 상관없이 과거에 지나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되돌아와 눈 뒤가 뜨겁고 목구멍이 아렸다. 걱정해서 하는 일은 모두 필요 없다고 하고, 그래도 나도 많이 고쳤는데, 내가 너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걸까봐, 그런데 너는 나한테 화를 내고,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마음을 쏟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쏟아 붓지 못하는 말들이 턱턱 가슴팍을 틀어막았다. 튀어나간 말은 결국 눈을 감고 외치는 화풀이였다.
“그럼 어떡하라고! 어차피 넌 내가 뭘 하든 알아주지도 않잖아! 이것도 그냥 무시하지 왜 자꾸 참견이야!”
“너야말로 내가 너를 가장 걱정하는 걸 왜 아직도 몰라!”
바로 되받아치듯 고함이 터졌다. 소리를 지르려고 숨을 들이켰던 엘리너는 그대로 얼어서 세베루스를 응시했다. 세베루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서 피와 물이 섞여 온통 불긋해진 그녀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냈다. 새까만 눈이 분노와는 다른 절박함을 담고 엘리너를 마주보았다. 쌓여있던 말들은 갑자기 날아가고 의미 없는 반박만이 관성을 따라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그건……! 네가, 알게 해주지 않았으니까……!”
“네가 알 생각이 없었던 거겠지!”
“지금 사랑싸움 할 때요?!”
“대체!”
세베루스가 아까부터 끼어들던 불청객 쪽으로 휙 고개를 돌리고 짜증을 냈다. 마셜이 엉망이 된 몰골로 뱃전에 매달려 몸을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살아있었으면 조용히 있기나 할 것이지!”
“아니, 그걸 말이라고! 빨리 끌어올려주기나아아악!”
“저런.”
겨우 난간으로 상반신을 넘겼던 마셜이 뒤에서 나타난 촉수에 다리를 휘감겨 그대로 다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엘리너가 작게 탄식했다. 다음 타자가 되지 않도록 서로 몸을 붙이고 웅크려 숨을 죽이고 있자니 방금 전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뭔가 답을 돌려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과 달리 머리는 아무 문장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사과하기에는 뭘 잘못했다고 해야 할지 정리를 할 수 없었고 다시 화를 내기에는 이미 억울함도 답답함도 사라지고 없었다. 엘리너는 대신 은근슬쩍 세베루스의 어깨에 기대어 무게를 실었다. 그의 손을 찾아 비에 식은 손가락을 얽었다. 잠시 뻣뻣해졌던 세베루스가 곧 말없이 그녀의 머리에 옆얼굴을 눌렀다.
“……저걸 어떻게 하긴 해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군.”
아까까지 싸운 적이 없는 양 자연스럽게 화제가 전환됐다. 남아있던 약간의 어색함도 숨결에 따라 미세하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상대의 움직임과 제 호흡을 맞추는 동안 서서히 맞댄 체온에 녹아 사라졌다. 다만 암묵적으로 종전이 성립되었다고 대면한 문제까지 막을 내리는 건 아닌지라 두 사람은 다시 답 없는 고민의 늪에 빠져야 했다. 그러다 한참을 미간에 주름을 잡고 생각에 잠겼던 세베루스가 멈칫 입술을 쓸면서 중얼거렸다.
“우리가 기절 주문을 사용했을 때 저 오징어가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 기절하지는 않았으니 결과적으로 주문에 수반된 물리력에 반응했다고 봐야 할 거야. 그리고 조금 전 산탄총을 맞았을 때도, 그래, 흠집을 내진 못했지만 분명 타격이 들어가기는 했다. 그러니까…….”
“……물리적 충격은 받는다고?”
“만일 집중된 타격을 가할 수 있다면―”
“기절 정도는 시킬 수 있을지도.”
“바로 그거다.”
그러나 미간의 주름은 아직 펴질 기미가 없었다. 세베루스는 신경질적으로 축축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면서 투덜거렸다.
“그 타격을 어떤 방식으로 가할지가 문제로군. 마땅한 주문이 있을지 모르겠어.”
마찬가지로 골똘히 생각에 빠졌던 엘리너가 허공을 노려보다가 툭 말을 뱉었다.
“필요한 게 물리력이라면 꼭 주문으로 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는 세베루스의 귓가에 떠오른 말을 건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것으로 다음 행동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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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을 설득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차피 배가 부서질 때까지 기다리든가 이 시도가 실패하든가 결과는 그게 그거라는 사실 적시에 더해 강렬한 편법의 유혹과 적당히 타협한 결과(“우리만 입 다물면 임페리오 저주를 써도 아무도 모를 거다.” “안 돼.” “흐음, 그렇다면 간단한 혼동 마법도 있어.” “……지금 협상 기술 쓰는 거야?”) 선장과 승무원들도 결국 두 사람의 방책에 손을 거들기로 했다. 결단을 내리고도 영 불안한지 선장은 모자를 쥐어짜면서 구슬프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아, 아무도 안 믿겠지. 징계야, 징계. 저걸 새로 달려면 또…….”
선주의 징계를 걱정하기 전에 이 작전의 성패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끼어들고 싶었으나 기껏 돌려놓은 마음이 다시 흐트러질까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엘리너는 선장실 창 너머로 검은 바다 속 대왕오징어의 몸통이 자리한 장소를 내다보려고 애썼다. 대충 찍어도 십중팔구 한 구석을 맞출 크기긴 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급소에 가까운 곳을 찾는 편이 좋을 터였다. 잠시간 희번덕거리는 몸통과 호수 같은 눈알을 노려보던 중 대왕오징어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천천히 방향을 돌리던 여객선이 정지했다. 곧이어 뱃머리에서 물 밑까지 드리워져있던 사슬이 끼릭끼릭 올라가며 느릿느릿 닻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만일 이 방법이 실패하면 대안은 뭐가 있지?”
“……배로 들이박기?”
“그것 참 기대되는군…….”
“네가 말해보든가.”
“글쎄, 마셜을 제물로 바쳤다 치고 대왕오징어가 우리를 놓아주기를 기도해볼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 더 획기적인 방법인지 모르겠네.”
부러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닻이 완전히 끌어올려졌다. 엘리너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자연(과 괴생명체)의 힘을 온몸으로 느끼러 바깥으로 나갈 시간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굵은 비가 뺨을 때리듯이 들이쳐서 당장 등을 돌려 문을 닫고 싶어졌으나 대신 문턱을 넘어 걸음을 옮겼다. 따라 나온 세베루스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그 후로는 다시 대왕오징어의 방해 속에서 배를 움직여보려는 지난한 인고의 시간이었다. 대체 이 배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지 찰싹찰싹 다리를 붙여대는 탓에 이제 닻도 내리지 않은 배는 트롤도 멀미가 나도록 흔들려야만 했다. 기껏 방향을 맞추면 오징어가 몸을 움직여버려 욕설을 부르기도 몇 번이었다.
“이번 임무는 해그리드가 맡아야 했어!”
“왜?! 우리보다 나았을 것 같아서?!”
“아니! 그랬다면 이 배에서 적어도 한 명은 행복했겠지!”
세베루스가 마법을 숨기는 것도 포기하고 프로테고로 촉수를 막아내며 악을 썼다. 옆에서 손전등을 들고 대왕오징어의 머리통을 노려보면서 선장에게 지시등 역할을 하던 엘리너는 어이없는 것보다도 절절하게 공감해버리고 말았다. 해그리드라면 지금 그들처럼 온갖 짜증과 역정을 내는 대신 거대한 대왕오징어의 자태를 보며 황홀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자리한 사람이 엘리너 퀼과 세베루스 스네이프라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고통 받고 대왕오징어는 찬사 대신 지탄을 받을 운명이었다.
“됐어?!”
“조금 더, 더, 그만―됐어!”
잔인한 운명에 순응해 모든 기력을 짜낸 보람이 있는지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배가 너울을 타고 크게 머리를 든 순간 일순 벼락 빛이 투과된 수면 아래로 오징어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닻 내려요!!”
엘리너가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지팡이를 휘둘렀다. 두꺼운 사슬에서 불꽃이 튀면서 금속 토막이 허공을 날고, 끈을 잃은 근 3톤가량의 쇳덩이가 자유낙하하며 대왕오징어의 미간을 직격했다. 쿵, 거대한 물보라가 선수에 서있던 모두를 덮치고 지나갔다. 구명용 밧줄로 몸을 지탱한 이들의 눈앞에 배에서 풀려나온 촉수들이 느린 곡선을 그리며 빗줄기를 가르고 수면에 추락해 작은 해일을 일으키며 가라앉아 사라지는 광경이 보였다. 엘리너와 세베루스는 숨을 죽이고 배가 평행을 찾기를 기다렸다가 후다닥 난간 너머로 불빛을 켠 지팡이를 내밀고 바다를 살펴보았다. 어떤 그림자도, 비정상적인 요동도 없었다. 그저 마지막 비명을 대신하는 것처럼 대왕오징어가 뿜어낸 먹물로 파도가 거무죽죽하게 물들어 있을 뿐이었다.
“…….”
긴장이 풀려서인지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휘청이는 엘리너를 세베루스가 끌어당겨 부축했다. 그런 본인도 몇 시간을 폭풍우 속에서 버티느라 미미하게 몸이 떨리고 있었다. 엘리너가 세베루스의 목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쉴래. 남은 건 승무원들이 알아서 하라고 해.”
“그래. 쉬자.”
세베루스가 짧게 답했다. 갑판에 주저앉아 웃고 흐느끼고 환호성을 지르는 선원들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은 터덜터덜 선실로 돌아갔다. 배가 흔들린 탓에 고정되지 않은 물건이란 물건은 죄다 어질러져 선실도 꽤나 난장판이었지만 신경 쓸 기력 따위 없었기에 젖은 옷만 겨우 갈아입고 아무런 말도 없이 같은 침대에 기어들어가 눈을 붙였다. 침대는 푹신하고 건조했고, 곁에 붙은 상대의 기척은 더없이 안온했다. 의식을 잃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엘리너는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항구의 벤치에 앉아 처음 탑승했을 때보다 많이 허름해 보이는 여객선을 바라보았다. 대왕오징어를 떨쳐내고도 배는 꼬박 하루를 더 항해해야 했고, 예상보다 일정이 늦어져 목요일 밤이 아니라 금요일 새벽에야 뉴욕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녀와 세베루스가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침대를 벗어나 어떻게든 연락을 날린 덕에(신문을 홍보하러 오던 부엉이를 설득해야 했다) 여객선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그쪽 마법 의회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지금쯤이면 구조된 먼로 대령을 비롯해 배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폭풍우와 엔진 이상으로 인해 항해가 지체되었다고 기억이 수정되었을 것이다.
대충 열 시간은 잠에 빠져있던 것 같건만 아직도 몸이 나른해서 하품이 나왔다. 손끝으로 눈두덩을 누르다가 눈을 뜨니 불쑥 옆에서 종이컵을 든 손이 튀어나왔다. 컵을 받아들며 고개를 돌리자 이미 알아챈 대로 세베루스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셜은 어떻게 됐어?”
마셜은 운이 좋게도 먼로와 비슷한 경로로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다. 다만 운은 거기까지로, 다리가 부러져 도주를 실패한 남자는 이대로 아즈카반 감옥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불사조 기사단 쪽에서 데리러 올 거다. 우리는 쉬라더군. 무디와 해그리드가 오기로 했어.”
“아. 잘됐네. 해그리드는 좀 늦긴 했지만.”
엘리너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 위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덧붙인 농담에 세베루스가 코웃음을 쳤다. 엘리너는 그를 따라서 씩 웃었다가 뜨거운 차가 담긴 컵을 입술로 가져갔다. 열기가 목구멍을 덥히면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새벽의 바닷바람은 차가웠지만 손 안의 종이컵은 따뜻했고 담요 위로 둘러진 팔이 온기를 더했다. 느긋하게 세베루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서 푸르스름하던 하늘이 점점 금빛으로 밝아지는 모습을 보던 엘리너가 문득 입을 열었다.
“우리 그럼 휴가인가?”
“그렇다고 봐도 되겠지.”
“뭐 할까? 관광이라도…….”
“빨리 돌아가서…….”
상반된 서두에 둘의 눈이 마주쳤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양 몇 초간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엘리너가 갑자기 미묘하게 눈에 웃음을 담고서 툭 말을 건넸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줄 거지? 넌 나를 제일 걱정하니까.”
“무슨…….”
격정에 떠밀려 외친 말을 기억해낸 세베루스의 얼굴이 불그죽죽해졌다. 이런 데에 써먹다니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런 소리를 놀리듯이 꺼내놓고 실쭉 웃는 엘리너의 모습이 도무지 밉지 않아 한층 더 말문이 막혔다. 아무튼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이대로 혼자 명치를 찔리고 넘기자니 뭔가 억울했다. 못마땅하게 눈을 흘기면서 눈썹을 추켜올린 세베루스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정신을 차리고 겨우 꺼낸 목소리마저 살짝 갈라져서 모른 척 헛기침으로 무마해야 한 것은 비밀이었다.
“그러는 너는 아니냐?”
“뭐가?”
“너도 나를 가장 아끼는 게 아니냐고. 내가 몰랐다고 그렇게 화를 냈으면서 아니라고 하진 않겠지.”
“…….”
부정할 구석이 없는 말이었다. 제대로 반격을 맞고 입술만 몇 번 벌렸다 닫은 엘리너가 비슷하게 붉어진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하여간 한 마디도 안 지지.”
“누가 할 소리를.”
부루퉁한 대꾸는 수긍이나 다름없었다. 세베루스는 만족감과 어이없음이 혼재된 기분으로 투덜거리면서 엘리너의 어깨를 더 가깝게 끌어당겼다. 어쩐지 머릿속에 사랑싸움 운운한 마셜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엘리너의 삐죽이는 표정을 즐기기로 했다.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 세베루스를 흘긋 쳐다본 엘리너는 반쯤 장난을 섞어 그를 노려보다가 찡그리듯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알았어, 타협해. 앨러스터와 해그리드가 올 때까지만 있다가 가자. 그 정도는 상관없지?”
“그 정도라면……알았다.”
세베루스가 짐짓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대꾸했다. 순간이동만으로 대양을 건너기는 쉽지 않은 관계로 후발대도 머글의 교통수단을 이용하기는 해야 했다. 다만 추적을 피해 머글 행세를 하던 마셜을 쫓느라 따라 고스란히 일주일 넘게 배를 타야했던 둘과는 달리 중간 중간 마법적 이동도 가능하므로 아마 이틀에서 사흘쯤 걸릴 테고, 그 정도라면 벼락치기 휴가로는 차고 넘치는 일수였다.
“호텔부터 잡아야겠어.”
“아, 그래. 나 제대로 씻고 싶어.”
“나도 마찬가지야.”
만족스럽게 협정을 맺은 두 사람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벤치를 떠나 도시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완전히 떠오른 뉴욕의 태양이 머리 위로 햇살을 드리웠다. 날씨는 맑고, 범죄자는 붙잡았고, 난파는 면했고, 대왕오징어는 아마도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오늘은 휴가였다. 상쾌하게 새로운 날을 시작하기에 제법 어울리는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