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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드 리치는 제 형제와 고향 친구에 대해 제법 높은 이해도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비번인 날 갑자기 아줄에게 ‘죄송하지만, 플로이드를 찾아와 주시겠습니까?’라는 연락이 온다면….

 

‘이런, 또 지겹다고 도망간 걸까요.’

 

이유는 잘 모르지만, 분명 모스트로 라운지의 일을 내팽개치고 어딘가로 가버린 게 분명하다. 플로이드의 성격을 잘 아는 제이드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태연히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자, 그러면 어디로 도망갔을까. 이 시간이라면 갈 곳도 한정되어 있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터. 일단은 중원으로 가서, 자주 잠을 청하던 장소들을 찾아보는 게 좋겠다.

방에서 테라리움을 관리하다 말고 밖으로 나선 그는 교정 쪽으로 향하려다가, 멀리서 들리는 익숙한 비명에 발걸음을 멈췄다.

 

“자, 잠깐! 선배 진정하세요! 선배!”

 

이 목소리는 분명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홍일점 목소리다.

다급한 목소리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제이드는 얼른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가,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치만 아기새우는 내가 제일 좋다고 했잖아! 그럼 이거 필요 없지 않아?”

“스파게티를 제일 좋아한다고 스테이크를 버려야 할 이유는 없어요!”

“밥은 한 끼만 먹으면 되잖아!”

“사랑은 밥이 아니잖아요!”

 

대체 이건 무슨 어디에 초점이 맞춰진 논쟁인가. 어째서 제 형제는 아이렌의 파우치를 번쩍 든 채 상대에게 호통치고 있고, 아이렌은 그걸 돌려받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나.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플로이드가 꽤 격양된 상태인 걸 눈치챈 이상 우선시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제이드는 얼른 씩씩거리는 플로이드에게 가 재빨리 파우치를 낚아챘다.

 

“아?”

“진정하세요. 접니다, 플로이드.”

“하? …뭐야. 제이드잖아?”

 

플로이드는 싸움에 끼어든 이를 물어뜯을 기세로 보았다가 금방 살기를 거두었다. 당연했다. 아무리 제멋대로에 난폭한 그라 해도, 이 정도 일로 제 형제에게까지 이를 드러낼 짐승은 아니었다.

 

“제이드 선배!”

 

아주 잠깐이지만 머리가 식은 플로이드와 달리, 아이렌은 여전히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후다닥 제이드의 등 뒤로 숨은 그는 본래 제 물건인 파우치를 챙기더니 간절하게 SOS 신호를 보내었다.

 

“살려주세요, 제이드 선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설마 당신과 플로이드가 싸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싸움이라뇨. 이건 일방적으로 제가 맞아준 거나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늘 그래지 않았습니까. 하하.”

 

제이드의 말은 다소 짓궂게 들렸지만, 안타깝게도 저건 어디까지나 사실이었다. 아이렌은 대단히 플로이드를 좋아하고 아껴서, 언제나 그가 어떤 억지를 부려도 웃으며 넘기고 심지어 귀엽다는 표현까지 하곤 했으니까.

제멋대로 날뛰는 플로이드와 그런 그에게 끌려다니는 아이렌. 다소 일방적인 유희 같지만 사실 아이렌이 자발적으로 휘둘려주며 즐기는 두 사람의 관계는 항상 평화로웠는데. 어째서 아이렌은 갑자기 억울함을 호소하고, 플로이드는 분을 못 이겨 거칠게 구는 것인가.

대체 어디서부터 진상을 캐내야 할지 막막한 제이드는, 형제의 외침에서 간단히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기새우는 거짓말쟁이! 내가 제일 좋다면서 왜 다른 남자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건데?!”

“그럼 선배 사진도 주시던가요! 그리고 이건 그냥 사진이 아니라 상품이에요! 애당초,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평소엔 제가 다른 사람들이랑 붙어 다녀도 아무 말도 안 하셨으면서! 화면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아이돌 좀 본다고 화내시고…!”

 

아. 과연 그런 거였나.

제이드는 최근 아이렌에게 일어난 변화를 떠올리고 쓴웃음 지었다.

얼마 전부터였을까. 아이렌은 갑자기 아이돌에 관심을 가지더니, 여가의 대부분을 제가 좋아하는 스타에게 쏟기 시작했다. 물론 성실한 모범생인 그가 수업 중 딴짓을 하거나 자율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지만, 평소라면 학원 내의 인물과 보낼 시간을 모니터 속 남자와 보내게 된 건 확실히 문제였지.

…물론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아이렌 본인에겐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가 생긴 건 그를 좋아하는 모든 이들이었다. 예를 들자면, 자신이나 플로이드 말이다.

 

“플로이드. 어차피 아이렌 씨가 좋아하는 스타는 아이렌 씨의 존재도 모릅니다. 그렇게 질투할 가치도 없어요.”

“하? 제이드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

“당연하죠. 아이렌 씨가 아무리 그 아이돌에게 매력을 느낀다 해도, 결국 아이렌 씨와 피부를 마주 비비고 체온을 나눌 수 있는 건 저니까 말입니다.”

 

제이드의 설득은 꽤 논리정연했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이성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 그는, 플로이드가 화를 내는 이유에 대해서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플로이드는 늘 아이렌의 첫 번째가 되고 싶어 한다. 아이렌에게 아무리 많은 남자가 있더라도, 아이렌이 자신을 첫 번째로 생각해 준다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그였다.

그런데 난생처음으로 제가 아이렌의 첫 번째가 아닐 수 있단 생각이 드니 화나 난 것이겠지. 형제의 마음을 잘 아는 제이드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아이렌에게 물었다.

 

“아이렌 씨. 플로이드가 갑자기 물건을 가져가려고 해서 놀란 거죠?”

“예? 아…, 네.”

“절대, 플로이드가 S군 사진이 박힌 상품들보다 소중하지 않은 게 아니지요?”

“당연하죠. 이건 그냥 제 취미생활일 뿐이라고요.”

“들었습니까? 플로이드. 아이렌 씨는 그냥 놀라서 과민반응 한 거지, 당신이 덜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아아. 이게 무슨 어린애 달래기도 아니고, 이런 방법이 효과가 있긴 할까.’

아이렌은 잠깐이나마 그렇게 생각했지만, 제이드 리치의 큰 그림은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그럼 그거 다 버릴 수 있어?”

“네?”

“그거 다 버리고, 나랑 놀러나 가자. 내가 제일 소중하면 그럴 수 있지?”

 

잊고 있었다. 플로이드는 어떤 의미에선 아이들보다도 단순하다는 것을. 물론 그런 점을 좋아하는 거긴 하지만, 이렇게나 단순명쾌한 요구를 해올 줄이야!

마음속으로 실컷 혼란스러워 한 아이렌은 잠깐 망설이더니, 애써 웃으며 말했다.

 

“…버, 버리면 돈 낭비가 되니까 중고로 팔게요.”

“진짜?”

“네. 그, 아줄 선배도 늘 그러잖아요. 적은 돈이 모여서 큰돈이 된다고. 쓸 수 있는 물건을 버리는 건 낭비라고….”

“…….”

 

구두쇠인 아줄에게 저런 말을 자주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어떤 방식이든 아이렌이 외간 남자의 얼굴이 박힌 물건들을 포기하겠다 말했기 때문이었을까.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빙긋 웃은 플로이드가, 아이렌을 덥석 안아 올렸다.

 

“역시 아기새우라면 이래야지~, 응응. 화내서 미안해? 나 배고파졌으니까 같이 간식 먹으러 가자. 제이드, 같이 갈래?”

“모스트로 라운지로 돌아가는 거라면 함께 가겠습니다.”

“좋아. 가자, 가자.”

 

이걸로 어떻게든 일은 해결된 건가. 일이 더 이상 복잡해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제이드는 생각했다.

그는 히죽 웃으며 아이렌을 데리고 가는 플로이드를 은은한 눈으로 보다가, 조용히 아줄에게 지령을 완수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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