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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는 애정을 함께 처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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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너는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세베루스가 가져다준 잔을 받아들었다. 머그컵에 담긴 붉은 물약에서 희미하게 후추 냄새가 났다. 눈썹을 살짝 찡그리자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세베루스가 팔짱을 끼고 엄하게 말했다.

 

“뜸들이지 말고 쭉 들이켜라.”

“당신도 제가 이 약 싫어하는 거 알잖아요.”

“그래, 그리고 너도 이게 가장 효과적인 감기약인 걸 알지.”

 

살짝 세베루스를 흘겨보았던 엘리너는 곧 한숨을 쉬고 얌전하게 잔을 비웠다. 깔깔한 목구멍에 홧홧한 기운이 타고 올라와 작게 기침을 하니 길쭉한 손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머지않아 엘리너의 양쪽 귀에서 폭폭 연기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엘리너는 열기가 귓구멍까지 뻗어가는 느낌에 진저리를 치고는 세베루스에게 잔을 돌려주면서 중얼거렸다.

 

“후추맛이 너무 강해요.”

“후추 물약을 먹었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

“어쨌든요.”

 

평소보다 부루퉁한 목소리였다. 세베루스는 남 앞에서는 보일 생각도 않을 뾰로통한 표정을 보면서 입매를 느슨하게 만들었다가 엘리너의 빈 손에 쟁반에 같이 들고 왔던 뱅쇼를 들려주었다. 따끈한 음료를 홀짝 홀짝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네가 이 약을 싫어하긴 싫어했지. 옛날에도 그렇게 안 마신다고 버텨서는.”

“언제 적 얘기를 하세요? 결국 당신이 억지로 먹였잖아요.”

“네가 쓸데없이 오기를 부렸잖느냐.”

“그땐……정말 싫었으니까요.”

 

엘리너는 슬쩍 고개를 돌려 세베루스의 찡그린 검은 눈을 피했다. 그때 자신의 행동이 대체로 바보 같았다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정말이지 이 약을 먹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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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셔라.”

“…….”

 

엘리너는 앞에 나타난 잔과 잔을 내려놓은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눈길을 받은 세베루스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말을 이었다.

 

“독이라도 들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직접 대령해줬으니 이걸로 만족해라.”

“후추 물약……입니까?”

“보면 알잖느냐.”

“심한 감기도 아니니까 알아서 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말을 하면서 기침을 하면 전혀 신빙성이 없다는 걸 알아두지 그래.”

 

엘리너의 손가락이 잔의 손잡이를 잡았다가 망설이며 다시 떨어져나갔다. 늦가을의 호그와트에는 갑자기 감기가 유행하고 있었다. 록허트가 독한 감기에 걸렸다는 소식에 속으로 즐거워한 것도 잠시, 어디서 옮았는지 엘리너 자신도 감기 기운이 있어 곤혹스러워하던 차였다. 증상이 더 심해지기 전에 약을 먹는 게 좋다는 건 알았지만 병동에 들르려 할 때마다 일이 생겨 조금만 나중에, 조금만 나중에, 하며 미루다보니 벌써 며칠이 지나 있었다.

 

“나중에 일이 끝나면 마시겠습니다.”

“놀랍게도 어제와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고집 부리지 말고 먹어. 학생들도 너보다는 말을 잘 듣겠다.”

 

엘리너는 그야 학생이면 당신 말을 잘 듣겠죠, 같은 생각을 하며 붉은 물약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세베루스는 그녀의 훌쩍거림과 기침 소리를 더 참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저녁때라도 병동에 다녀와야 했는데. 그냥 그가 직접 약을 챙겨주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지금 눈 딱 감고 마셔버리는 편이 여러 모로 나을 텐데 유치하고 사소한 고민 하나를 좀처럼 떨쳐버릴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냐?”

“……그냥 지금은 내키지 않아요.”

“그런 멍청한 소리가 어디 있어?”

“…….”

 

침묵이 길어질수록 세베루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입술을 떼는 모양새가 한 소리 더 뱉으려는 것 같더니 정작 엘리너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불만 가득한 시선만 쏟아졌다. 미묘한 대치의 끝에 결국 세베루스가 먼저 한숨을 토했다. 엘리너는 가져왔던 잔을 도로 홱 집어 들어 성큼성큼 사무실을 나가버린 뒷모습을 당혹하며 바라보았다. 어딜 가시는 걸까, 너무 답답하게 굴어서 꼴도 보기 싫어지셨나, 그런데 여기 세베루스 사무실인데? 그깟 물약 그냥 마셔버릴걸, 하지만……. 감기 기운으로 평소보다 혼탁한 머리에 수십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무는 사이 어느새 익숙한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자.”

 

검은 소매가 뻗어 나와 다시 잔 하나를 내려놓았다. 여전히 붉은 액체였으나 코끝에 희미하게 감도는 와인과 향신료의 향이 음료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슬그머니 양손으로 잔을 감싸자 손바닥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그렇게 약이 싫으면 이거라도 마셔라.”

“……갑자기 웬 뱅쇼입니까?”

“주방에 부탁한 거다. 설마 이것도 싫다고 할 셈은 아니겠지.”

 

책상 옆에 기대 선 세베루스가 퉁명스럽게 팔짱을 꼈다. 엘리너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기분으로 잔을 들어올렸다. 언젠가 어릴 때 감기에 걸리면 뱅쇼를 마시곤 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기야 했지만 세베루스가 그걸 기억해줄 줄은 몰랐다. 설령 우연의 일치로 감기에 좋은 음료를 준비했을 뿐일지라도 이렇게까지 그녀를 신경써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믿기지 않게 기뻤다. 처음부터 병동으로 내쫓든가 약을 거절했을 때 화를 내더라도 놀라지 않았을 텐데. 가슴이 설탕물에 젖은 솜뭉치로 가득 찬 것처럼 숨이 꾹 눌려서 목구멍이 먹먹해졌다. 엘리너는 감사합니다, 하고 떨리는 말을 작게 중얼거리고는 뱅쇼를 한 모금 크게 머금었다. 뜨겁지 않을 정도의 온도가 뱃속으로 넘어가자 신기할 만큼 빠르게 훈기가 훅 핏줄을 타고 퍼졌다.

 

“이거 도수가 높은 건 아니겠죠?”

“한참을 끓인 건데 그럴 리가 있냐? 더 마셔.”

 

독촉에 등 떠밀려 꿀꺽 내용물을 더 비우니 이제 머리끝까지 후끈하게 체온이 올랐다. 엘리너는 무심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뱅쇼가 아무리 따뜻한 음료라 해도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진 않을 터였다. 뭔가 호그와트 특제 재료가 들어가기라도 한 건가, 붉은 수면을 살피다가 깊게 숨을 들이켜 보았다. 아까보다 코가 뚫려서 제법 향이 분간되는 듯도 싶었다. 와인, 레몬과 다른 과일류, 시나몬, 그리고 후추 같은 향신료의 냄새가 났다. 그녀의 집에서는 뱅쇼에 후추를 넣지 않았기에 조금 낯선 요소였다.

 

“여기 후추가 들어갔나 봅니다.”

“글쎄, 유사한 재료가 들어갔다고 할 수 있겠지.”

 

세베루스가 어쩐지 아까보다 흡족해 보이는 얼굴로 대꾸했다. 혼자 비죽비죽 입꼬리를 올리는 모양이 영문 모르게 재수 없게 느껴져서 엘리너는 고개를 기울이고 그를 수상하게 쳐다보았다. 어째 열이 받아서인가 귀가 뜨거웠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짜증나진 않았는데 기묘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피시식 귓구멍에서 무언가가 새어나왔다. 반사적으로 귓바퀴에 가져다댄 손바닥에 마법이 만들어낸 기체가 뜨뜻하게 부딪쳤다.

 

“무슨……?”

“사람을 이렇게 번거롭게 하지 말고 진작 마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쯧, 혀를 찬 세베루스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던졌다. 다 큰 어른에게 약 하나 먹이려고 채소를 싫어하는 아이 다루듯 좋아하는 음식에 숨기다니 스스로도 황당했다.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엘리너가 창백한 얼굴로 비실비실하게 굴면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우기는 꼴이 계속 마음 한쪽을 꺼슬꺼슬하게 건드려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의 평화와 그녀의 몸을 위해서라도 약이 몸에 안 맞는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싫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봐줄 필요는 없을 터였다.

 

돌처럼 굳어있던 엘리너가 천천히 다시 귓가를 만졌다. 귀를 막으려는 양 덮은 손 틈으로 뭉게뭉게 하얀 연기가 유유히 새어나왔다. 백지장이던 얼굴에 발갛게 핏기가 도는 모습이 꽤나 보람차다고 한가로운 감상을 떠올리던 세베루스는 스르륵 이쪽을 쳐다보는 엘리너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보다 더 빨개진 뺨 위로 암녹색 눈동자가 원망을 담아 일렁이고 있었다. 덜컥 머릿속에 제동이 걸렸다.

 

“정말 너무하세요.”

 

서러움을 꽉꽉 눌러 참은 목소리가 한 마디를 뱉었다. 의자가 드르륵 끌리고 검은 망토자락이 시야에 스쳐갔다가 잰걸음 소리와 함께 탁 문을 닫는 소리가 울렸다. 세베루스는 순식간에 사라진 엘리너의 빈 자리를 망연히 응시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고 분통을 터트릴 정도로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몇 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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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참 어처구니없었지.”

“제가 할 소리입니다만.”

 

엘리너가 옆에서 항변했다. 세베루스는 새삼스럽게 과거의 완강함이 떠올라 엘리너를 마주보았다.

 

“그래서, 그때 왜 그리 싫어했던 거냐?”

 

그 사건은 나중에 마주한 엘리너가 멋대로 가버린 건 죄송했다고, 챙겨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것으로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설명을 더 캐내어봤자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아 아파서 변덕을 부렸나보다며 그대로 넘겨버렸더랬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원망의 시선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지금이야 가볍게 꺼낼 얘기지만 당시의 자신은 엘리너의 반응에 생각보다 더 놀랐던 모양이었다.

 

“들으면 황당해하실 것 같은데.”

“이미 충분히 황당해했으니 그냥 수수께끼나 풀어 줘.”

 

엘리너가 살짝 입술을 물었다. 언뜻 고민하듯 비스듬히 허공을 보다가 곧 멋쩍게 웃더니 어깨에 힘을 빼고 선선히 답을 꺼냈다.

 

“짝사랑하는 상대 앞에서 귀로 연기를 뿜는 광경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세베루스는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엘리너를 잠시 멍하게 쳐다보고서 짧게 헛기침을 했다. 이제 와서 짝사랑이라는 말에 놀랄 리는 없었다. 부끄러웠다는 것도 나름대로 납득은 갔다. 다만 엘리너가 오래 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그에게 애정을 품고 있음을 깨달으면 시간이 얼마나 지나건 새삼스럽게 마음이 간질거려 태연하게 굴기가 어려웠다.

 

“그런 거였다니 확실히 황당하긴 하군.”

“그럴 거라고 했잖아요.”

 

부러 비꼬는 척 고개를 내젓자 엘리너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땀에 젖지 않게 머리칼을 묶어 드러난 하얀 귀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푹푹 솟고 있었다. 세베루스는 엘리너가 얼굴로 슬금슬금 넘어오는 연기를 파리 쫓듯 손을 휘저어 치우는 모습을 은근히 유쾌한 기분으로 지켜보다가 툭 질문을 던졌다.

 

“지금은 보여도 괜찮은 모양이지?”

“이거요?”

“그래.”

 

구름에 감싸인 것처럼 보이는 귓바퀴를 검지로 톡톡 가리키는 손짓에 세베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너는 짐짓 애를 태우듯 으음, 목소리를 길게 끌면서 잔을 내려놓니, 베개를 정돈하니 자잘한 곳에 신경을 돌렸다. 세베루스의 눈썹이 슬며시 꿈틀거렸다. 결국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나와 입매가 비뚜름하게 기울어진 채로 엘리너가 몸을 기울였다. 세베루스의 목을 껴안아 가까이 끌어당기고는 단단한 손이 반사적으로 귀를 스쳐 뒷머리를 받치는 동안 웃음기가 남은 입술로 얇은 입술 옆에 대꾸 대신 후추 향이 머무는 입맞춤을 남겼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아주 잘 알겠다.”

 

엷은 연기 사이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세베루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여 제대로 입술을 맞댔다. 감기가 옮을지도 몰라요, 하는 형식적인 만류의 말은 코웃음에 막혀버렸다. 세베루스가 귀에서 연기를 뿜는 것도 좀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엘리너도 더 밀어내지 않고 파고드는 입술을 맞이했다. ‘그야 지금은 어떻든 간에 당신이 날 사랑스러워 할 걸 아니까.’ 솔직한 만큼 부끄러운 답의 반쪽은 혀끝으로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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