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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와 과로를 구분하는 방법

 

 

w by. 까메오양

 

 

곤란하다. 여자는 생각했다. 지금 그녀 앞에는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남자가 자꾸만 뜨거운 시선을 던지는 중이다. 여자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손에 쥐어진 잔만 매만졌다.

 

현재 상황을 글로 쓴다면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겠지.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며 하릴없이 테이블만 노려봤다.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이제 내 상태는 시험을 앞두고서 평소에는 좀체 하지 않던 책상 정리를 시작하는 학생의 심리와 비슷하다. 급기야 레이스에 난 구멍을 세기 시작하자 맞은편에 앉은 남자, 스티븐이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작업 중이라던 프로젝트는 어떻습니까? 잘 진행되고 있나요?"

그 일로 고민 많았잖아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설탕에 절이기라도 한 듯 달콤하다. 뭇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기 충분했으나 하필 대상이 나였다. 가슴 설레는 대신 속이 부대꼈다. 입에 든 게 없어서 다행이다.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면 분명 냅다 저 잘생긴 얼굴을 향해 뱉어냈으리라. 그걸 네가 왜 기억하고 있어? 기실 따지고 싶은 점은 한둘이 아니다. 일단 우리가 여기서 왜 한가롭게 차나 마시고 있는지부터 너는 어째서 나를 그런 시선으로 보는가까지.

사실 마지막은 알고 싶지도 않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징그러우니 그만두어 달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을 뿐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혹시 새로운 고문 방법인가? 불현듯 인터넷에 떠돌던 연애 팁 중 한 가지를 떠올렸다. 관심 없는데도 자꾸만 치근덕거리는 상대방의 정나미를 떨어뜨리기 위해 이렇게 해보세요! 머릿속에 이미지화된 작은 내가 짓궂은 목소리로 떠들었다. 방법 하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행동해 상대를 놀라게 하는 건 어떨까요? 때로는 튕기는 모습이 오히려 의욕을 자극할 때가 있답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헛소리다. 당시에도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도 변화가 없다. 자신도 이럴진대, 설령 스티븐이 같은 팁을 보았더라도 실행에 옮겼을 리가. 비록 싫어하는 사내지만 비상한 머리는 인정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대관절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당장 지난주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미소짓는 얼굴 사이로 짙은 경멸을 담은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물론 그가 비밀결사 라이브라의 부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그 눈빛은 일부러 보여주는 일종의 경고일 게 분명하다. 그는 의외로 다정한 사람이니까. 그런 점이 내 후견인 마음에 쏙 들어 결국 이런 고초를 겪는 원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머리를 가진 스티븐이라도 설마하니 스폰서를 만나러 간 자리가 상견례와 비슷한 자리로 변모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라이브라의 스폰서 중 하나인 내 후견인은 과거에 입은 은혜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를 거두었다. 당시 여러모로 앞길이 막막했던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곧장 그 손을 잡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평소 걱정이 다소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제외하면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 성정이 기어이 이 사달을 내고 말았다.

 

시작은 내 취업이었다. 헬사렘즈 로트에 위치한 분사에 출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그는 길길이 뛰며 반대했다. 그도 그럴 게, 다른 곳도 아니고 헬사렘즈 로트 아닌가. 3년 전, 소실된 뉴욕을 다룬 보도는 1여 년을 넘게 날이면 날마다 신문사마다 1면을 장식했다. 현재도 간간이 1면을 오르내리고 있는데, 하나같이 세계가 무너질 뻔했다는 이야기뿐이다. 안 그래도 걱정이 많은 사람이니 결사반대를 외치는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헬사렘즈 로트에 있다.

이별 과정에 설득과 이해는 없었다. 그저 이제 폐는 그만 끼치고 싶다는 통보로 족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아 앓아누웠고, 나는 떠났다. 배은망덕한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다. 그래도 폐라는 생각은 진심이다. 부모님에게 입었다는 은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충분하다. 오히려 차고 넘친다. 그러니 헬사렘즈 로트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그 곁을 떠났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 인연도 끝을 맺었다고 여겼다.

 

설마하니 그가 직접 이 도시에 올 줄이야. 심지어 라이브라의 부관씩이나 되는 남자와 맞선자리까지 마련할 줄은 정말 몰랐다. 가만히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오랜만에 후견인에게서 온 연락을 받았다. 반가움과 그리움, 죄책감으로 얼룩진 마음을 하고 그를 마주했다.

"무탈한 걸 보니 마음이 놓인다. 그간 잘 지냈니?"

그게 첫마디였다.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직후에 이어진 청천벽력 같은 말만 아니었다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을 텐데.

"네가 꼭 여기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나도 말리지 않겠다. 대신 이 늙은이 소원 하나만 들어다오."

"무슨 소원인데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내가 네게 무리한 걸 부탁하겠니, 아가? 쉬운 일이다. 널 위한 일이고. 그러니 꼭 해주겠다고 약속해다오."

부탁하는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찬찬히 살펴보면 못 본 사이 어쩐지 야윈 듯도 하고, 안색이 나빠 보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졌다. 그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고, 약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본디 수완 좋은 사업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가 말이라도 물릴 새라 곧장 명함 하나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참 괜찮은 남자야. 꼭 그와 결혼을 하라는 건 아니다. 요즘 사람들이 어떤 연애를 하고 어떻게 결혼하는지야 나도 잘 알지, 아무렴. 그저 보기 드물게 좋은 사람이니 만나기라도 해보면 좋겠다 싶어서 그래. 응? 몇 달만 꾸준히 만나보렴."

그러고는 주름이 자글자글 진 손으로 내 손등을 다독였다. 이미 한 말을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 손이 너무나도 따듯해서 뿌리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만난 스티븐이라는 인물에 대한 첫인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주변 이목을 신경 쓰기라도 하는지 사람 좋은 낯을 하고 앉아 있었지만, 나도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허투루 산 게 아니다. 언뜻 친절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정작 두 눈은 차갑게 식은 구리와 같다. 대놓고 '나는 너를 경멸하고 있다.'는 눈빛이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바도 아니고, 나름 이해도 한다만 기분이 상하는 건 별수 없다. 당장 나만 해도 이 자리가 마뜩잖은 상황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스티븐이야말로 속물이다. '후원 자금'이라는 미끼에 물려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닌가. 젠체하는 모양새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만난 지 3분도 되지 않아 질려버렸다.

앞으로 몇 달을 꼬박 이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랬던 스티븐 알랭 스타페이즈가 이런 꼴이라니. 머리를 굴려봐도 이유는 세 가지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첫째, 미쳤다. 둘째, 내 후견인에게서 압박을 받았다. 셋째, 이 도시의 주술사에게 당했다.

첫 번째 이유는 떠올리는 동시에 머릿속에서 지웠다. 미쳤다니, 전문의 자격은커녕 정신과와 관련된 기초 지식도 없는 내가 함부로 유추할 게 못 되었다. 남은 두 가지 이유를 조심스럽게 저울 위에 올려둘 때였다.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스티븐이 손을 뻗었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다과를 지나 찻잔을 쥔 흰 손 위에 제 손을 덮었다. 뼈마디가 붉어진 커다란 손에 쏙 들어갔다. 소름이 돋았다. 절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수습하고 있으면 스티븐의 얼굴에 설렘이 감도는 게 보였다. 세 번째 이유가 올려져 있던 한쪽 추 쪽으로 저울이 빠르게 기울었다.

'부관이 이런 꼴이 됐는데 라이브라는 뭘 하는 거야? 세계의 안녕을 지키는 비밀결사라며!'

누구도 듣지 못할 비명을 내지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큰일이다. 이건 내 능력 밖이다.

 

시간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그리고 착실하게 흘렀다. 드디어 바라 마지않았던 이별의 시간이 왔다. 인생에 다시 없을 길고 고된 티타임이었다. 안도하여 한숨을 내쉬는 나와 달리 스티븐은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눈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보는 건 다음 주가 되겠군요."

"그러네요. 시간이 참 빨리 가요. 그럼 일어날까요? 바쁘신 분을 이렇게 붙잡아서 마음이 안 좋네요."

혹시 붙잡기라도 할까 싶어 서둘러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는 길은 그가 에스코트했다. 이런 점은 여느 때와 비슷하지만, 사뭇 달랐다. 문을 열고 기다릴 때면 괜히 거리를 바라보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내게 시선을 꽂았다. 구태여 눈을 마주친다.

 

카페를 나온 후에도 친절은 계속되었다. 근방에 차를 세워두었다며 그가 키를 꺼내 들었다.

"집 앞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들를 곳이 있어서요."

이래서야 마음에 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구애 같지 않은가.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스티븐은 잠자코 나를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이었으나 억겁의 세월을 버텨내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스티븐이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대신 택시 잡는 것만이라도 도울 수 있게 해주세요."

됐어요. 무심코 튀어나올 뻔한 말을 가까스로 삼키고 어색하게 웃었다. 다행히 택시는 금방 잡혔다. 얼굴에 커다란 흉터를 지닌 남자가 손을 뻗자 택시 한 대가 부드럽게 다가와 멈춰 섰다.

 

손수 차 문을 열어준 스티븐을 지나쳐 냉큼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그럼 다음 주에 뵈어요."

"죄송하지만, 장담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꼭 나오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말은 평소와 같은 내용이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저주를 받았지만, 바보가 된 건 아니구나. 어쩌면 다음 주에 만나면 저주가 풀려 있을지도. 이미 마음속으로는 그가 저주를 받았다고 확정한 후였다.

"아, 그렇죠. 저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적당한 대답과 함께 문을 당겨 닫으려고 할 때였다. 돌연 몸을 숙인 그가 문틀을 붙잡았다.

"아뇨, 꼭 나오겠습니다. 늦더라도 꼭 만나러 올 테니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 그러지 않으셔도. 바쁘신 거 아는데 괜히…."

이 고문 같은 시간을 더는 버틸 재간이 없다. 애써 뜯어말리면 스티븐은 눈까지 휘어가며 빙긋 미소지었다. 싫어하는 사람인데도 빼어난 미모 탓에 속절없이 가슴이 두근거린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제가 그러고 싶어요. 다시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이제야 오랜 친구가 내린 결정이 이해되는 듯해요."

"예?"

"그럼 다음 주에 다시 보도록 하죠. 오늘 즐거웠어요."

내 얼빠진 질문은 모른척한 그가 문을 닫았다. 택시도 닫히는 차 문을 신호로 출발했다. 멍하니 시트에 몸을 기댔다. 기분이 이상하다. 뜻 모를 말을 하던 스티븐의 얼굴이 왜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걸까.

 

한편 스티븐은 멀어지는 택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입가는 여전히 부드럽게 풀린 채 실실 웃음을 흘리는 중이다. 한껏 고양된 기분을 참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한 말은 진심이다. 그간 가정을 꾸린 K.K를 부러워하는 한편 도통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정말로 알 것 같다고.

물론 상대방은 곤혹스러워할 뿐이지만. 그녀가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지야 잘 알고 있다. 아마 저주라도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하겠지.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 본디 스티븐이라는 사람이 이미 지나간 일에 연연하기보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이제는 택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스티븐을 발을 돌렸다.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기분 좋게 뛰는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몇 시간 전, 약속 장소에 나올 때만 해도 아플 정도였는데 다소 차분해진 지금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때마침 곁을 지나치는 가게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경쾌한 리듬을 속으로 따라 흥얼거리며 스티븐은 며칠 전 기억을 더듬었다.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를.

 

주말도 잃은 채 나흘가량을 사무실에 박혀 철야로 지새우고 난 후였다. 쏟아지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식사 대신 레드불로 빈속을 채웠다. 보다 못한 길베르트가 종종 다과를 겸해 가벼운 식사 거리를 차려줬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위장은 에너지 드링크로 꽉 찬 터라 달리 더 넣을 만한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기는 하나, 슬슬 한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유로 일이 해결되자마자 반차를 쓰고 일찍 퇴근했다. 다음날까지 연차를 신청하기는 했지만, 업무 특성상 연차는커녕 이번과 같이 주말마저 잃어버리기 십상이라 쉴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쉬어두어야 한다.

비몽사몽간 정신으로 운전도 무리라, 차는 사무실에 둔 채 직접 걸어가던 중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인영이 그의 시야에 잡혔다. 그러고 보니 직장이 이 근방이라던가. 그녀는 동료로 보이는 몇몇과 함께 손에 커피잔을 들고서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티븐은 그저 하필 이런 상황에서 저 얼굴을 보다니 재수가 없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가볍게 혀를 찼다. 괜히 저쪽에서 스티븐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지. 바로 그때였다. 이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웃음소리가 주변 소음을 뚫고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대로 머릿속까지 침투해 뎅뎅 울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끝이 저렸다. 얼굴에도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큰 탓일까, 동료와 함께 떠들며 웃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황급히 골목에 몸을 숨겼다. 스티븐은 가볍게 숨을 헐떡였다. 마치 구울 무리와 전투를 마친 후처럼 몸이 떨렸다. 손을 들어 가슴에 올렸다. 쿵쿵 뛰는 심장은 제 신체가 아닌 듯 생경하기만 하다. 깊게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내쉬었다. 호흡은 영 원래 상태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게 뭐지?'

3년 전 대붕괴도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스티븐은 제 상태를 점검하며 신중하게 원인을 파헤쳤다.

 

그때 스티븐은 사랑에 빠졌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사실은 과로와 카페인 쇼크가 이뤄낸 합작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는 계기는 사랑 하나하나 모두 각양각색인 법이니, 이 역시 스티븐에게 있어서는 분명 사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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