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세대 캠퍼스 AU
*중간에 공포 영화 묘사가 한두 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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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물고기를 안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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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 스네이프는 지금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번거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오늘은 4월 1일의 오전이었고, 동아리 선배를 통해 익명의 상대에게 사물함 앞으로 나와 달라는 전언을 받았으며, 유감스럽게도 그 전언이 만우절 장난의 전주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선배의 친절하고 굳건한 안내에 따라 별관 구석의 안 쓰는 사물함 앞에 서야만 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장난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사람을 불러내놓고 바람을 맞히는 정도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터이다. 그러나 세베루스가 가입한 호그와트 대학교의 유서 깊은 학술 동아리는 매 해 만우절마다 선배들이 제비뽑기로 뽑은 신입생들을 가짜 고백으로 놀려먹는다는 학술적 탐구와 전혀 관계가 없는 괴상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협력을 구한 동아리원이 목표를 불러내어 고백하고, 상대가 당황하고 있으면 주변에 숨어있던 선배들이 모두 튀어나와 장난의 결과를 만끽한다고 한다. 이상이 세베루스의 하숙집 이웃이며 남의 동아리의 비밀 따위 지켜주지 않는 4학년 선배 루시우스 말포이가 한심하다는 듯 폭로한 내용이었다. 피차 서로 관심도 없었을 잘 모르는 학생의 가짜 고백이라니 모욕적이기 짝이 없었다. 모르는 채로 당했다면 솔직히 당황했을 거라는 점까지 짜증났다. 혹여 릴리가 나오기라도 했다면 세베루스는 자신이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기 전에 당장 창밖으로 뛰어내려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했을지도 몰랐다. 그들이 호그와트 부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릴리는 제임스 포터와 사귀기 시작했기에 이런 역할로 뽑힐 리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아니, 다행은 아니지만.
“세베루스.”
그 사실에 적응하려 애쓰던 비탄의 시기를 회상하며 팔짱을 끼고 발치를 노려보는 세베루스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 건드렸다. 불길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휙 돌리자 엘리너 퀼이 덤덤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네가 왜 여기 있냐?”
“……너를 불러달라고 한 게 나니까?”
“거짓말하지 마.”
“따로 기대하던 사람이라도 있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세베루스는 검은 머리칼에 감싸인 하얀 얼굴을 꿰뚫어보려는 양 죽어라 노려보았다. 그야 얼굴만 아는 녀석이 와서 가증스럽게 사랑 고백을 하는 꼴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엘리너 퀼이라니. 엘리너라니? 대체 이 녀석이 왜 이런 장난에 동참한단 말인가? 두 사람은 중학교 시절부터 사사건건 부딪쳐왔고, 나이를 먹으며 그럭저럭 사이가 부드러워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말랑말랑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엘리너 퀼이 세베루스 스네이프에게 고백을 한다니 그야말로 질 나쁜 농담이었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그러니까……네가 날 부를 이유가 없다는 게 문제겠지.”
“짐작도 안 가는 거야? 정말?”
“당…연하지!”
다 아니까 관둬, 하는 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다만 이 장난이 어이없고 짜증나는 것과 별개로 선배들이 하는 일을 무시하는 1학년이 되고 싶진 않았으므로 세베루스는 역정을 내는 대신 팍 얼굴만 일그러트렸다. 그 모습을 보던 엘리너가 비죽 입꼬리를 기울여 웃더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다음 순간 툭 말이 떨어졌다.
“그래. 빨리 끝내줄게. 좋아해.”
“…….”
그야말로 기습이었다. 예감은 했어도 각오는 되지 않았기에 세베루스는 일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울렁였다. 엘리너가 그의 멍한 얼굴을 물끄러미 살피더니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판단했는지 재차 천천히 말을 건넸다.
“……좋아해, 세베루스.”
“들었어!”
“아, 그래. 음……거절할 거지?”
그럼 이 우스꽝스러운 장난에 뭘 기대한 거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의 표정을 확인한 엘리너가 뚱하니 팔짱을 끼었다.
“그래, 거절하겠지. 나도 알아. ……. 그래도 한 번쯤은 말해야 했으니까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비보를 전하는 것처럼 고백을 해놓고 뭐 설레는 얼굴이라도 기대했단 말인가? 시야 가장자리에서 움찔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이자 갑작스러운 분노가 배로 확 치밀었다. 사람 하나 바보로 만드는 게 그렇게 즐거운가? 아니, 선배들은 그렇다 치고 이 녀석은 대체 왜 동참한 거지? ‘빨리 끝내줄게.’라니. ‘거절할 거지?’라니! 이렇게 성의 없는 고백을 할 거면서 내가 쩔쩔 매며 곤란해 하는 꼴은 보고 싶었나? 세베루스는 이를 꽉 물었다 놓았다. 분명 다시 생각하면 후회할 짓인 걸 알면서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니. 사귀자.”
“어?”
“나를 좋아한다면서. 그럼 사귀자고.”
엘리너의 눈동자가 파드득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하, 그러니까 이건 예상 못 했단 말이지. 의기양양해지는 한편으로 어쩐지 속이 더 들끓었다.
“왜? 문제라도 있냐? 네가 먼저 고백했으면서 원하던 바가 아니었나?”
조소를 띤 입매로 줄줄이 빈정거림이 흘러나갔다. 엘리너는 여전히 당황한 낯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뭘 멀뚱히 보고만 있는 거야.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미안하다든가, 장난이었다든가. 물론 무슨 말을 하든 쉽게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문득 엘리너의 얼굴에 촛불이 흔들리듯이 아주 짧게 다른 표정이 스쳤다. 너무 잠깐이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서러움, 억울함, 울분, 뭐 그런 류의 감정이었다. 잠깐, 뭘 잘했다고?
“놀라서 그랬어. 설마 싫겠어? 그럼 이따 영화라도 보러 갈까?”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을 잃은 사이 엘리너는 어느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절대 먼저 물러설 생각은 없는 모양으로, 엘리너가 이렇게 나온다면 세베루스도 쉽게 발을 뺄 마음은 없었다. 명백하게 멍청한 자존심 싸움이었다. 그걸 안다고 관둘 거라면 멍청하다고 자조하지도 않았을 터이다. 적어도 아주 두 사람다운 행동이기는 했다. 세베루스는 짧은 실소를 삼키고 부드러운 투를 꾸며내어 답했다.
“그래, 수업도 휴강인데 아예 지금 가자. 그리고 식사도 하면 되겠어.”
“데이트야?”
“물론이지.”
자기가 꺼내놓고 데이트라는 단어를 바로 소화하지 못한 듯이 찰나간 굳었던 엘리너가 금세 꾸민 티가 역력하도록 눈매를 휘어 상냥하게 웃었다. 세베루스는 그에 맞춰 입가에 매끄러운 미소를 걸었다. 만우절이고 뭐고, 대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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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악!”
뒷좌석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울렸다. 세베루스는 비명과 탄식이 퍼지는 영화관 안에서 질린 얼굴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매표소의 쓸데없이 오지랖 넓던 아르바이트생이 ‘사이가 돈독해지기 아주 좋은’ 영화라고 추천해주었을 때 뭔가 깨달아야 했는데. 잠시 불길한 음악이 멈추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롤러코스터가 올라갈 때처럼 평탄함이 길어질수록 사람 신경을 갉아먹더니 기어이 주인공이 숨은 방의 문을 보이지 않는 손이 핏자국을 남기며 똑, 똑, 똑 두드렸다. 참고로 핏자국이 생긴 건 방 안쪽 면이었다. 구석에서 누가 숫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무서운 것에 그리 약한 편은 아닌데 이 영화가 사람을 꽤 잘 놀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성 싶었다. 세베루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엘리너의 반응을 살폈다. 시시각각 화면의 불빛이 어른거리는 옆얼굴이 전공 수업 칠판을 보는 사람처럼 덤덤하게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면서 기절할 것처럼 놀라는 모습을 기대한 적은 없으나 어쩐지 김이 샜다. 돈독해지긴 뭐가 돈독해진다는 거야. 아르바이트생은 아마 겁에 질려 손을 잡는다든가 품에 안기는 모습을 예상한 모양이다만 허망한 예측이었다. 세베루스는 새삼 이 상황이 한심하게 느껴져 다시 앞이나 바라보았다. 화면에서는 창의적인 모습의 시체가 세 번째로 등장하는 중이었다. 바삭, 흔들린 팝콘 통을 한 손으로 고쳐 잡는데 불현듯 한쪽 소매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심약한 사람이었으면 기절했을지도 모르는 잠깐의 혼란 후 세베루스는 이성을 찾고 엘리너 쪽 팔걸이로 시선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손이 그의 소매를 느슨하게 쥐고 있었다. 이건 뭐지? 팝콘을 달라는 건가? 그럼 그냥 바로 팔을 뻗으면 될 텐데. 팝콘 통을 내밀어도 엘리너는 여전히 앞을 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무슨 일이냐, 마저 속삭이려던 차에 움찔 엘리너가 손에 힘을 넣었다. 녹색 점퍼 아래로 드러난 흰 손가락이 매달리듯이 그의 옷소매를 꼭 움켜잡았다. 언뜻 침착해 보이는 얼굴에서 눈꺼풀이 파드득 떨리고 입술이 짧게 숨을 토하고는 다시 닫혔다.
이거 지금 무서워하는 건가?
퍼뜩 낯선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엘리너 퀼이 공포영화를 보면서 나한테 의지하고 있는 거라고? 손도 아니고 옷을 잡은 이 체온이 엘리너가 진짜로 품에 안겨온 것만큼이나 당황스러웠다. 아니, 방심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건 누가 먼저 거짓말을 포기하느냐 하는 기로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술책일지도 몰랐다.
“차라리 손을 잡아.”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마자 엘리너가 홱 그를 쳐다보더니 1초 만에 곧장 손을 제 몸 쪽으로 팍 물렸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눈길을 보내든가 ‘그래? 고마워.’같은 소리를 하며 자연스럽게 손을 잡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 실수를 들킨 것 같은 반응이 그를 더 당황시켰다. 엘리너는 입을 꾹 다물고 계속 앞쪽에 시선을 박은 채였다. 아까의 행동이 거짓말이었던 양 가느다란 손가락은 무릎 위에서 얌전했다. 세베루스는 엘리너를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자기도 눈길을 돌렸다. 왜인가 좀처럼 다시 영화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팔걸이에 가만히 둔 팔목에 언제라도 흐릿한 체온이 돌아오지 않을까 자꾸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왜 그런 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붙든 것처럼 반응한 거야. 제대로 손을 잡지도 못하고 천이나 건드리는 건 또 뭐야? 평소엔 잘만 끌고 다니면서, 왜 그렇게 내게 닿기가 벅차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그냥 한심하게 진지해진 만우절 장난일 뿐이다. 이렇게 파고들어봤자 엘리너만 즐겁게 해줄 터였다. 한 방 먹었군, 세베루스는 애써 태연하게 속으로 투덜거리고는 등받이에 뻣뻣한 몸을 묻었다. 석연치 않은 근질거림은 더 휘둘리기 전에 마음 밑바닥에 쑤셔 넣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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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나오니 열두 시가 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영화관 입구에 서서 치열한 침묵을 교환했다. 정오가 지났으므로 이미 공식적인 만우절 장난의 시간은 끝난 셈이나 다름없었다. 이 고집 센 대결을 어색하지 않게 끝내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먼저 말을 꺼내는 쪽이 패배자인 것만 같은 미묘한 거리낌이 아니었다면 한참 전에 그렇게 됐을 터이다. 서로를 반쯤 노려보기를 몇 분, 마침내 목소리가 터졌다.
“영화는 어땠―”
“이제 어떻게―”
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몇 번 눈길을 주고받으며 눈치싸움을 하다 세베루스가 재빨리 기회를 잡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
영화 팸플릿을 쥐고 선 엘리너가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세베루스는 짧게 자른 손톱과 곧은 손가락에 무심코 시선을 떨어트렸다가 되돌렸다. 괜하게 셔츠 소매 단추를 풀었다가 다시 잠그는 사이 엘리너가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어떡할까? 점심 먹으러 갈 거야? 아니면…….”
점심? 그러고 보니 아까 영화를 보고 식사도 하자고,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한 것도 같았다. 머릿속에서 점심은 무슨 점심이냐고 이 바보짓 당장 끝내라고 외치는 이성적 자아 뒤로 그림자에 숨은 의문의 자아가 ‘저녁 식사도 아니고 점심 식사 정도는 먹을 수 있지 않나? 이대로 내가 더 당황하고 끝내면 억울하지 않아?’ 따위를 꿋꿋하게 속살거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기로 했잖아. 먹고 싶은 음식이나 생각해봐라.”
단을 내려오던 엘리너가 갑자기 발을 헛딛으며 휘청거렸다. 세베루스는 반사적으로 엘리너의 손목을 낚아채어 기울어지는 몸을 멈췄다. 엘리너는 거의 그의 어깨에 얼굴을 박기 직전에 고개를 들고 황급히 자세를 정돈했다. 무안했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렇게 놀랄 일이냐?”
세베루스는 부러 비뚜름한 즐거움을 담아 엘리너의 실수를 지적했다. 엘리너가 빈틈을 보이는 순간은 늘 각별했다.
“……시끄러워.”
“사실 기대하고 있었던 거 아냐?”
“아, 좀! …이거나 놔 줘.”
찰싹 때리고 싶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엘리너가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세베루스는 퍼뜩 여전히 엘리너의 손목을 쥐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은 가늘고 단단했고, 마주 서 있는 상대의 체온이 맞닿은 좁은 피부부터 번져서 공간을 존재감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가 여전히 엘리너를 당기고 있어서 두 사람의 거리가 퍽 가깝다는 사실이 갑자기 선명하게 인식됐다. 손바닥 아래로 엘리너가 놓아달라고 말하는 양 달랑달랑 팔을 흔들었다. 무안하게 손을 푸는데 헛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잡고 싶으면 차라리 손을 잡든가.”
아까 던진 말이 시간차를 두고 팅 튕겨 돌아온 셈이었다. 어떻게 봐도 일부러 똑같이 말을 꺼낸 얼굴이 뺀질뺀질 얄미웠다. 그래놓고 헐거워진 손가락 사이로 자연스럽게 손목을 빼는 동작이 어쩐지 기가 차서 세베루스는 덥석 그녀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일단 가둬놓고는 조금 생각하다가 느리게 손 모양을 고쳐 손목뼈 바로 아래로 손등과 손바닥을 한 번에 쥐었다. 동그래진 눈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생각나는 메뉴가 없으면 내가 고를 거다.”
“뭐? 아니, 그.”
“불만 없다고? 그래.”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는데?”
세베루스는 한 박자 늦은 엘리너의 항의를 툭탁툭탁 받아치면서 성큼성큼 거리로 걸어갔다. 멍청아, 무슨 시간 낭비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머릿속의 이성적인 세베루스가 재차 꼬집었다. 하지만 이 녀석도 장단을 맞추고 있잖아, 그런데 어떻게 내가 먼저 백기를 들겠어, 그런 말을 변명처럼 주워섬겼다. 엘리너가 잰걸음으로 따라오기에 모르는 척 보폭을 좁혔을 때, 가느다란 손가락이 꿈질거리다 그의 손을 벗어나는 대신 은근슬쩍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슨하게 얽혀드는 것을 내버려두었을 때(펄쩍 튀어오를 뻔했지만 아무튼), 식당을 고르는 논쟁 끝에 그녀가 처음에 말했던 식당 앞에 발을 멈추자 나란히 선 옆얼굴이 못 이기겠다는 양 웃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두 사람 다 만우절의 얼간이가 되는 건 확정이니 좀 어리석게 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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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세베루스가 먼저 식사 계산을 해버려서 엘리너가 째려보다가 옆 블록으로 뛰어가 사온 아이스크림콘을 손에 들고 천천히 길을 걸었다.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심지어 후식까지 먹고 있자니 정말로 데이트 같아서 마음이 이상했다. 이쪽에서 먼저 꺼낸 단어라지만 이렇게까지 충실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나 일련의 과정은 실행하기 전 머릿속의 아우성이 우습도록 막상 닥치고 나면 기묘하게 자연스러웠다. 지금도 그는 당연한 듯 엘리너의 하숙집 쪽으로 방향을 잡고 시답잖은 말을 툭툭 주고받으며 그녀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일부러 손을 맞춘 것처럼 각자 왼손과 오른손이 비어 걸음을 따라 간간이 손등이 스쳤다.
“4월에 아이스크림이라니.”
“그게 제일 먼저 보였는데 어쩌라고. 싫으면 먹지 마.”
“이미 입을 댄 거 안 보이냐?”
“그럼 먹기나 해.”
“아, 폭군의 말씀은 따라야지.”
“비웃지 말고.”
“그런 적 없다.”
“없긴 뭐가 없어? 지금 또 웃었잖아.”
“안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냐?”
“넌 항상 눈앞에 거울을 매달고 다녀야겠다.”
평소와 같으면서도 어딘가 날이 무딘 대화를 끊고 이으며 반복하는 사이 두 사람은 하숙집 골목 어귀에 다다랐다. 엘리너가 지내는 여학생용 하숙집은 골목의 중간쯤에 있었다. 세베루스는 오래된 3층짜리 건물의 몇 걸음 앞 페인트가 조금씩 떨어지는 쇠 울타리에서 발을 멈췄다. 엘리너가 그를 지나쳐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다가 뒤를 돌았다. 망설이는지 입술을 실낱같이 벌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을 보면서 세베루스는 빈 손을 주먹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내일로 넘어가면 정리가 더 어려울 것이다. 극단적 가정이지만 영원히 서로 오늘을 모른 척하며 신경 쓰이는 거스러미를 달고 살게 될지도 몰랐다.
“나한테 뭔가 할 이야기 없냐?”
결국 훅 밀쳐진 것처럼 입술에 걸려있던 말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엘리너가 입매를 찡그리듯 늘였다.
“뭘?”
“네……거짓말 말이야.”
“나 오늘 거짓말 한 적 없는데.”
체념인지 안심인지 느슨한 표정을 하고도 여전히 놀리듯 말 틈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결국 그것도 거짓말이잖아, 이렇게 판을 깔아줬으면 너도 이제 좀 포기하란 말이다, 목구멍으로 반쯤 역정이 삐져나오는 걸 삼키고 대신 열이 오른 숨을 길게 뽑아냈다.
“한 대 칠 것 같은 얼굴 하지 말고.”
“그 입 좀 다물어라, 하여간……! 너의 그 집념에 졌다. 네가 이겼다고, 이 고집불통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하지?”
기어이 버럭 언성을 높이자 엘리너가 비죽비죽 웃기 시작했다. 엘리너가 어이없어 하든 말든 뺨을 죽 늘려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그래, 만우절이지. 역시 너도 알고 있었지?”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었으면 오늘 같은 일이 있었겠냐?”
“음…….”
마침내 엘리너가 이 시답잖은 장난을 끝내겠다고 백기를 든 거나 다름없건만 먼저 추궁해놓고 어딘가 뱃속이 답답하게 뭉쳤다. 부정하기를 바랐나? 소매에 매달리던 체온이, 붙잡아도 도망치지 않은 손이, 간지러운 웃음이 가장이 아니었다고 해명하길 바랐나? 아니, 그럴 리 없었다. 그저 이 촌극에 휘말려 여기까지 장단을 맞춘 스스로가 새삼스럽게 한심해서 이럴 터이다. 세베루스는 이제 다 즐겼다는 양 흐릿한 웃음까지 걷어낸 엘리너를 분하게 내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이럴 거라고 예상해야 했는데 이 녀석과 얽히면 자꾸만 열이 받아서 똑바로 행동하기가 어려웠다.
“대체 너 때문에 몇 시간 동안 미친 짓을 한 거지?”
“야, 누가 들으면 내가 네 머리에 총이라도 대고 끌고 다닌 줄 알겠다.”
“…….”
그게 아니라는 지점이 더 짜증났다. 한껏 울컥한 낯으로 입을 다문 세베루스를 쳐다보던 엘리너가 난데없이 손을 뻗어 굽어진 코끝을 잡아당겼다.
“뭐야?”
세베루스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뒤로 뺐다. 어중간하게 허공에 손을 띄운 채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너가 앗, 하고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아니, 나도 모르게 짜증나서.”
“지금 시비 거냐?”
“미안. 진짜 갈게.”
휙 몸을 돌려 문틈으로 사라졌던 검은 머리통이 직후 빼꼼 밖으로 돌아왔다. 반만 몸을 내민 엘리너가 짧게 말했다.
“그래도 오늘 즐거웠어.”
끼익, 문이 닫혔다. 문에 끼워진 불투명한 유리창 저편으로 엘리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세베루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뒤늦게 발길을 돌렸다. 반나절을 장난을 치고 있었으니 즐거웠겠지, 그렇게 혼잣말로 빈정거려도 생각만큼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엘리너는 왜 마지막에 그런 소리를 하는지, 자신은 왜 또 그걸 신경 쓰고 있는지, 답답한 일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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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웬만하면 엘리너의 얼굴을 보지 말아야겠다고 잠들기 전에 다짐했건만 현실은 정반대로, 세베루스는 지금 자발적으로 엘리너와 만나서 학생들이 잘 오지 않는 건물 뒤쪽 벽에 나란히 기대어 이야기를 속닥이고 있었다. 당연히 다정한 밀어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재난대책을 위한 긴급회의에 가까웠다.
“미치겠네.”
“대체 하루 만에 소문이 얼마나 퍼진 거야.”
“내가 알 바냐?”
그러나 관심을 끌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술 동아리원들을 중심으로 어제 오후부터 퍼진 화제의 소문이라는 게 ‘세베루스 스네이프와 엘리너 퀼이 사귄다!’였기 때문이다. 어쩐지 등교했을 때부터 선배가 히죽거리고 데면데면한 녀석들까지 한 번씩 시선을 던진다 했더니 결국 제임스 포터가 “야, 너 퀼이랑 사귄다며?”라고 복도 한복판에서 큰 소리로 묻는 참상까지 벌어졌다. 거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포터를 심문한 결과 어제 엘리너와 그를 목격한 이야기가 쌓이고 쌓여(“만우절 장난이긴 했는데 거절을 안 하더라. 원래 마음 있었던 거 아냐?” “내 친구가 그러는데 영화도 보러 갔다는데?” “같이 점심 먹었대.” “손잡았대!”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 같던데?” “그렇게 싸우더니 걔네도 사귀는 구나…….”) 기정사실 같은 소문이 되었다는 모양이었다. 결론이 틀려먹었을 뿐 목격담 자체는 사실이라 해명이 쉽지 않았다. 그나마도 맥락이 맞아야 말을 꺼내지 은근히 쳐다보기만 하는 인간들을 붙들고 소문은 가짜라며 전단지를 돌리고 있을 수도 없으니 골치가 딱딱 아팠다. 마주쳤을 때 이미 두 명에게 축하를 받았다는 엘리너도 영혼이 소진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학교 방송에 사연이라도 보낼까?”
“제정신이 아닌 소리로군.”
“나도 알아.”
이렇게 머리를 맞대봤자 정말 미친 짓을 할 게 아니라면 해결책은 없었다. 그냥 시간이 소문을 묻어주길 기다리면서 가끔 기회가 생기면 오해를 푸는 정도겠지. 땔감을 주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
“앗.”
……그러니까, 단둘이 으슥한 곳에서 만나고 있는 이런 모습을 들키지 않는다면 그럴 거라는 뜻이었다. 세베루스는 다시 찡해지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개밥그릇으로 추정되는 물건을 들고 있는 리무스 루핀을 노려보았다. 루핀은 잘못된 방향으로 시선을 이해한 듯 예의바른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어,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 학교에 개가 사는 것 같아서 먹이를 좀 줘보려고……음, 금방 갈게.”
“아니, 우리 그런……상황이 아니었거든?”
엘리너가 먼저 버려진 나무 상자들 근처에 그릇을 놓고 슬슬 멀어지려는 루핀을 붙잡았다. 피곤해하는 낯을 보던 루핀이 아, 하고 뭔가 깨달은 소리를 냈다.
“오해하지 않았으니 걱정 마.”
“그래?”
의외의 대답에 언뜻 엘리너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 엘리너와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세베루스에게 루핀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여기서 음……과한 일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건 아니야. 어쨌든 둘이 데이트하는 걸 내가 방해한 것 같아서.”
“그런 거 아니야!”
저 자식은 과한 일이라니 대체 뭘 떠올린 거지? 어쨌거나 어느 쪽도 아니라고 항변하려는 찰나 다른 목소리가 한 발 먼저 터져 나왔다. 엘리너가 마른세수를 하더니 초조하게 손을 움직거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언했다.
“우리 사귀는 거 아니야. 소문이 잘못 퍼진 거라고.”
“그래? 아……미안해. 제임스, 음, 사람들 말만 듣고 오해했네.”
루핀이 머쓱하게 대꾸하는 소리가 귓등으로 스쳐갔다. 세베루스는 불현듯 묘한 유리감에 휩싸여 엘리너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렇게까지 필사적일 건 없잖아.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그야 자신도 기회가 생기면 열심히 해명할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엘리너는 이 사고를 정말로 지긋지긋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절박하지? 나와 오해받는 게 그렇게 싫고 괴로운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게 자문자답하는 일순 누가 내장을 쥐어짜듯 뱃속이 뒤틀렸다. 쓴맛이 감도는 혀뿌리 아래로 시큼한 억울함이 치고 올라왔다. 즐거웠다고 했으면서. 내내 너도 어울렸으면서…….
엘리너의 옆모습을 죽어라 쏘아보는 사이 리무스 루핀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명을 전해주겠노라 말하는 음성을 들은 것도 같았다. 짧게 한숨을 쉰 엘리너가 그에게 똑바로 눈을 돌렸다.
“대체 아까부터 왜 그렇게 날 째려봐?”
“네가 아주 열과 성을 다해 진실을 호소하기에 구경했을 뿐이야.”
“말은 또 왜 그렇게 하는데?”
세베루스는 삐딱하게 등을 기대고 운동화 뒤꿈치로 벽을 툭 걷어찼다. 왜 그렇게 말을 하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있지도 않았다. 네가 너무 열심히 변명하잖아(그럼 변명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가?), 그냥 평소처럼 말한 거야(분명히 모른 척 말라고 시비가 걸릴 것이다), 네가 짜증나서(의외로 납득할지도 몰랐다), 갖가지 말을 입속으로 우물우물 급조해보다가 때려치우고 포장하지 않은 빈정거림을 뱉어버렸다.
“글쎄, 어제는 먼저 저질러놓고 막상 결과를 보니 후회하는 모양이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엘리너가 어처구니 없어하며 팔짱을 끼고 그의 앞에 마주섰다. 의아해하는 짙은 눈동자가 세베루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같잖은 소리인 걸 알면서도 여전히 가슴속이 부글거려 스스로의 발언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전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니, 새삼스럽게 우스워서 말이다. 나와 엮이는 걸 이렇게 질색하면서 어제 장난은 어쩌다 참여하겠다고 동의했는지 모르겠어.”
“너 대체……. 너도 반가워한 적 없잖아! 그래서 나도―”
“난 너한테 그렇게 열심히 해결하라고 부탁한 적 없어!”
이 자리에 모인 이유를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로 세베루스는 왈칵 목소리를 높였다. 엘리너가 눈썹을 찡그리면서 곧바르게 눈을 맞췄다. 고집스럽게 눈길을 피하지 않고 받아치자 엘리너가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해서 노력해도 뭐라고 하네. 뭐가 문제야? 자존심이라도 상했어? 그럼 뭐, 가만히 있을까? 한 달쯤 지나서 헤어졌다고 말하고 다닐 수도 있지. 다들 네가 나랑 사귀었다고 생각하고 한 방에만 있어도 쑥덕거리겠지만!”
“상관없어!”
홧김에 외치고서야 세베루스는 방금 내던진 말을 자각했다. 미쳤나? 하숙집은 가깝고 친한 친구는 겹치며 같이 듣는 수업만 몇 개인데 그런 상대와 소문에 휩싸여 지내는 게 괜찮을 리 없었다. 무슨 정신머리로 꺼낸 소리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엘리너가 피로에 짓눌려 지긋지긋하다는 듯 그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인생에 더 선명한 고난을 남기는 쪽이 낫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정말 미쳤는지도 몰랐다. 이럴 수가, 대체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거지? 그래, 어차피 누굴 사귈 것도 아닌데(이런 정신머리로 누굴 사귈 수 있을 리도 없고) 오해가 좀 길게 가든 말든 상관없지 않을까? 세베루스는 혼란에 빠지다 못해 급기야 괴상한 합리화를 시작했다. 엘리너가 갑자기 멍청해진 얼굴로 반문했을 때도 나오는 거라곤 헛소리뿐이었다.
“……상관없어?”
“그…아니…그래! 어차피 너도 누구와 연애를 할 작정도 아니었잖아. 아니면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베루스는 말할수록 참담해지는데 입을 멈출 수는 없는 기이한 상태로 엘리너에게 엉망진창인 질문을 던졌다. 평소의 침착함을 잃은 엘리너가 뺨을 확 붉히면서 멈칫 뒤로 물러섰다.
“너야말로 릴리는……!”
“그, 그게 언제 적인데 여기서 릴리를 왜 신경 쓰냐?”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넌 쓰지 말아야지!”
“뭐? 왜?”
이번에도 이성적인 대답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만일 이 순간이 그의 평균적 말솜씨라면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인생은 파멸할지도 몰랐다. 세베루스는 잠시 말문이 막혀 스스로의 의식의 궤적을 아슬아슬 되짚어갔다. 잔뜩 미간을 찡그리고 뜨거워진 입술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엘리너와 허공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어떻게든 끌어낸 단어들이 평소의 유려함을 잃고 더듬더듬 엉성한 문장을 이루었다.
“그러니까……넌……계속 곁에서 나를 지켜봤으니까…….”
“지켜봤으니까 신경 쓰지.”
“말 끊지 마라! 그러니까, 아, 제기랄! 넌 알아야지!”
“그러니까 뭘?”
“어제가 만우절이 아니었다면 내가 무슨 대답을 했을지!”
사방이 고요해졌다. 맥락도 논리도 없이 떨어진 말에 멀리 도로의 자동차며 흔들리던 나뭇잎과 비둘기까지 입을 다문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휘둥그레진 눈으로 입술을 빠끔히 열고 그 무엇보다 가장 조용하던 엘리너가 한참 뒤에 작게 숨을 헐떡였다. 답지 않게 이리저리 진동하는 목소리는 아마 의도했을 침착함의 절반도 가장하지 못했다.
“뭐? 당연히 거절이겠지. 아냐? 아니, 그……그런 얘기가 나올 때가 아닌 것 같은데.”
“…….”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해?”
“나도 몰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이 대화를 계속하는 것보다 도보로 영국 해협을 건너는 게 쉬울 것 같았다. 그러나 뒤에는 벽이고 앞에는 엘리너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올려다보는 엘리너의 눈이 가장 큰 족쇄였다.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거야. 그야 자기라도 안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헛소리를 시작하면 쳐다보겠지만. 크게 뜨인 눈꺼풀 아래 암녹색 눈동자가 가볍게 젖어 흔들렸다. 상기된 볼이며 잘근잘근 깨무는 옅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거냐고. 한껏 집중해서, 내 횡설수설이 한심하지도 않은 것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피가 쏠려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베루스가 할 수만 있다면 벽돌에 파고들 기세로 머리를 기대는 동시에 엘리너가 한 발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주먹 쥔 손이 세베루스의 멱살 대신인 양 자기 옷자락을 움켜잡고 있었다.
“너, 너 말만 꺼내면 다야? 똑바로 설명해, 세베루스 스네이프!”
설명을 할 수 있으면 진작 했겠지,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뒷목을 긴장시키고 입을 마르게 하던 뜨거운 덩어리가 목소리로 변하는 대신 근육을 멋대로 움직였다. 세베루스는 엘리너의 손목을 한 손에 감아쥔 채로 숨을 들먹이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고리를 이룬 손가락 아래 잔뜩 경직되어 있던 마른 손에서 힘이 풀리고 구깃구깃한 천이 아래로 늘어졌다. 뒤늦게 세베루스의 입술이 열렸다. 어느새 목소리가 잔뜩 쉬어서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나도 몰라,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니까……그러니까……다시 해.”
“뭐, 를…….”
“어제 했던 일, 오늘 처음부터 다시 해. 그러면……그러면 알 수 있겠지.”
“처음부터라니?”
“처음부터……네가 거짓말을 했을 때부터.”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상하게 들렸다. 그렇지만 만일 그때를 반복한다면 이번에는 이 어지러운 무언가를 또렷이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반쯤 입매를 비뚜름하게 일그러트린 엘리너는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보였다. 반대로 울음을 터트리려는 듯도 싶었다. 물에 젖은 천처럼 꽉 막힌 음성이 들렸다.
“난 거짓말 한 적 없다고 했어.”
“뭐…….”
“딱 한 번만 더 말할 거야. 이번에 모르면 다시는 안 해. ……좋아해.”
한 마디를 마친 후 엘리너는 일렁거리는 낯을 고집스럽게 굳히고서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이 돌아오든 버텨내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세베루스는 얕은 숨을 들이켰다. 손바닥에 닿은 엘리너의 손목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얇은 살갗 아래로 작은 새의 심장처럼 내달리는 맥박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좋아해, 세베루스.’ 전날의 기억이 겹쳐졌다. 덤덤한 낯으로 건조하게 건네던 고백이 완전히 다른 색으로 보였다. 그때도 이렇게 떨고 있었나? 사실은 이렇게 울 것 같이 동요하고 있었어? 현기증이 일었다. 그게 진심이었다고. 장난도 비웃음도 아니고, 정말로…….
“……그럼 사귀자.”
똑같은 말이 다른 어조로 흘러나갔다. 믿기지 않는 듯 천천히 고개를 든 엘리너가 흐트러진 속삭임으로 반론했다.
“오늘은 만우절이 아니야.”
“알아.”
“……이제 영화 볼 거야? 식사도 하고?”
“아마도.”
“또 소문이 날 텐데.”
“……상관없어.”
그래,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는 모든 일이 거짓말이 아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정말로 진실을 알아본 이제야 겨우 인정할 수 있었다. 엘리너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언뜻 초조하고 퉁명스러운 얼굴을 한참 동안 살펴보고는 기어이 물기가 고인 눈으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데이트야?”
“…물론이지.”
진실 된 답을 웅얼거리면서 세베루스는 빈 손의 엄지로 엘리너의 눈가를 훔쳤다. 땀이 찬 손은 완전히 놓는 대신 머뭇거리며 엘리너의 손과 검지 끝을 얽었다. 뱃속이 간질거리고 어색해 죽을 것 같았으나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의 엄지손가락 아래에서 파르륵 눈을 감았던 엘리너가 마찬가지로 잔뜩 어색해하는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 아래에서 마른 손가락이 이쪽을 꼭 잡아오는 감촉이 느껴졌다.
“손을 잡을 거면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거냐?”
“너도 똑같거든. 그럼 손을 잡지 말까?”
“……아니.”
“소, 솔직하게 말하지 마.”
“무슨……그럼 손을 놓든가!”
“싫어!”
“어쩌란 거야!”
“부끄럽다고!”
“너만 그런 줄 아냐?”
다정한 입맞춤이나 부드러운 속삭임은 없었지만 부족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건물 뒤편을 빠져나가며 자연스럽게 손을 놓았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은근슬쩍 손등을 부딪치고 손바닥을 다시 겹쳤다. 다들 엄청 떠들겠네, 이제 졸업하고도 아무도 안 잊을걸, 엘리너가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그대로 두었다. 세베루스는 홧김에 그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아무 일도 없는 척 그렇군, 생각만 해도 끔찍해, 맞장구를 쳤다. 장난은 끝났고 거짓말은 드러났다. 오늘은 4월 2일의 오후였고, 세베루스 스네이프는 곧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번거로운 상황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손은 거짓말이 아니기에 언제라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이 낯설도록 만족스러웠으므로 아무래도 다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