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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이게 무슨 상황이죠?”

“보시는 그대로임다.”

“아니…, 그, 왜 여기에….”

“하하하….”

 

러기는 아이렌에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대신 묘한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제가 구구절절 사연을 이야기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지금, 이 상황만큼은 직접 보고 상황을 파악하게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숙모!”

 

평소와 같은 평화로운 휴일, 레오나의 방.

러기의 부름에 사바나클로 기숙사까지 온 아이렌은 자신을 향해 두 손을 붕붕 흔들고 있는 천사에게 엄마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체카야, 안녕.”

“어이, 네가 언제부터 이 녀석 숙모였지?!”

 

천사, 아니, 체카의 밑에 깔려서 무료 놀이터가 되어주고 있던 레오나는 짜증스럽게 외치며 아이렌을 혼냈다. 하지만 어디 아이렌이 호통 한 번에 겁먹고 물러날 인물이던가. 레오나가 뭐라 하든 귓등에도 닿지 않는 것 같은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체카에게 다가갔다.

 

“여기엔 어떻게 온 거야?”

“삼촌 만나려고, 허락받고 놀러 왔어요!”

“…허락받은 거 맞지?”

“네!”

 

아이는 거짓말을 못 한다,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거짓말을 하기 마련이니까. 다만 의식적으로 하는 거짓말은, 타고난 사기꾼이 아닌 이상 어떻게든 티가 나는 법이었지. 그러니 아이렌은 체카의 말이 꾸며낸 거짓말이라곤 생각하진 않았다.

 

“혼자 온 거야?”

“아니요! 저기 밖에 같이 온 사람들 있어요!”

“밖에?”

“네에!”

 

사바나클로 기숙사의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체카는 대체 어느 밖을 말하는 걸까. 아이렌은 미심쩍긴 하여도 추궁할 수는 없다는 듯 헛웃음 지었지만, 레오나는 제 조카와 외부인이 하하호호 대화하는 걸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봐, 여긴 왜 온 거야?”

“러기 선배가 불러서 왔죠.”

“러기! 이 녀석은 왜 불렀어?!”

“네? 그거야… 저랑 친한 사람 중, 이 학원에서 가장 애를 좋아하고 잘 돌보며 흔쾌히 와줄 것 같은 사람이라서요?”

 

저렇게 맞는 말만 하다니, 뭐라고 화내기도 민망하지 않은가! 레오나는 또박또박 대답하는 러기를 보며 으르렁거리다가, 제 배 위에 앉아서 노는 체카를 들어 아이렌에게 넘겼다.

 

“자, 네가 놀아줘라.”

“불량 삼촌이네요.”

“하, 내가 성실한 꼴을 본 적은 있나?”

“우리 체카가 뭘 보고 배울지….”

 

‘우리’는 무슨! 레오나는 그리 외치려다가, 체카의 말에 입을 닫아버렸다.

 

“삼촌, 숙모랑 싸웠어?”

“하아?”

“숙모, 삼촌이랑 싸웠어요?”

“아니~, 삼촌이 장난치는 거야. 그냥.”

 

아이를 다뤄본 게 한두 번은 아니라는 듯, 아이렌은 체카의 물음을 가볍게 넘기고 그를 들어 안았다.

역시, 꽤 자세가 익숙하지 않은가. 체카를 고쳐 안는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던 레오나는 떠보듯 한마디를 던졌다.

 

“너. 자꾸 숙모라는 말에 대답하는데…. 왕자비라도 되고 싶나?”

“왕실이니 왕자비니 하는 건 관심 없는데, 체카의 숙모 자리는 탐나네요.”

“그럼 그 녀석만 데려가.”

“일국의 왕자님을 당근마켓에 물건 넘기듯 막 넘기려 하지 말아주실래요?!”

 

당근마켓은 또 뭔가. 레오나는 혹시 체카가 나쁜 말이라도 들을까 봐 귀까지 막고 제게 대꾸하는 아이렌의 모습이 팔불출로 느껴져 코웃음을 쳤다.

 

“체카야, 삼촌은 피곤한 것 같으니 우리끼리 놀까?”

“으응, 삼촌이랑 놀고 싶은데….”

“나중에 놀자. 지금은 많이 피곤하신가 봐.”

 

'대체 뭐가 피곤한 건진 모르겠지만.' 체카는 듣지 못하게 레오나를 보며 입 모양 만으로만 중얼거린 아이렌은 제 품 안의 작은 몸을 몇 번이고 토닥였다. '으음.' 드러누운 상태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레오나와 아이렌의 손길 사이에서 잠깐 고민하던 체카는, 이내 활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응, 착하다.”

 

근처에 산책이라도 다녀오면 피곤해서 잠들겠지. 둘만 보내는 건 조금 찝찝하지만, 돌봐주는 건 귀찮다.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둘을 보내준 레오나는 늘어지게 하품하고 편한 자세로 누웠다.

 

“정말 저대로 보내도 되는 검까? 레오나 씨.”

“귀찮아.”

“흐음. 그나저나 체카 군, 아이렌 군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본데요.”

“자기한테 잘해주니 좋다 하는 거겠지.”

 

귀를 후비며 건성으로 대꾸하던 레오나는 그대로 잠들어버린다.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잠드는 레오나를 보던 러기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소탈하게 웃다가, 그대로 방을 나갔다.

드디어 찾아온 평화. 따스한 햇볕과 바람 소리만 들리는 방에서 배부른 사자는 느긋하게 낮잠을 잔다.

하지만 그 낮잠도 영원한 것은 아니라서, 영원히 깨지 않을 것 같던 레오나는 그림자가 완전히 짧아질 무렵 스르륵 눈을 떴다.

 

‘점심시간인가.’

 

잘 땐 자더라도 먹을 건 먹어야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일어난 그는 기지개를 켜고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아이렌과 체카는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배가 고파서라도 놀다가 돌아올 줄 알았던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다가 문득 좋지 않은 예감이 든 건지 귀를 쫑긋 세웠다.

 

‘같이 온 녀석들이 왜 소식이 없지?’

 

체카의 말에 따르면, 본인은 왕실 측근의 호위대랑 함께 왔다고 했다. 아까는 밖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보통은 체카를 따라다니거나 제게 인사라도 하러 오지 않던가.

무언가 이상하다. 설마, 정말 거짓말을 하고 혼자 온 것이라면 아이렌에게 떠넘겨 놓기엔 좀 불안하지 않나.

 

“쳇.”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지만, 그렇다고 핏줄을 내버려 둘 순 없다. 채근당하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 말이다. 속으로 불만을 중얼거리면서도 밖으로 나선 그는 사바나클로 기숙사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자 바깥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응?”

 

중원을 지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레오나는 식물원 근처에 서 있는 호위병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저 녀석들이 왜 저기에.’ ‘체카는 어딜 가고.’ 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는 혹 근처에 제 조카가 있을까 싶어 슥 훑어본 후 호위병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봐.”

“앗, 레오나 님! 건강하셨습니까?!”

“뭐, 보시다시피.”

 

자신을 향해 경례하는 병사들을 살펴본 그는 주변에 체카가 없는 걸 재차 확인하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너흰 왜 여기 있지? 너희가 지켜야 할 사람이 있지 않나?”

“아, 체카 님이라면….”

 

자신의 질문에, 호위병들의 눈이 자연스럽게 식물원 안으로 향한다.

과연. 저 안에 있다는 것인가.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그는 발소리를 줄이고 모두의 눈길이 향한 곳으로 들어갔다.

 

‘설마….’

 

식물원 안으로 들어온 그는 자연스럽게 제가 자주 낮잠을 자는 곳으로 향했다. 아무리 핏줄이라 해도, 부자도 아닌 삼촌과 조카인데 이런 것까지 닮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던가?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예상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말았다.

 

“하.”

 

제 특등석에 누워있는 크고 작은 그림자는 원래 자리의 주인이 온 줄도 모르고 평화롭게 자고 있다. 아이렌의 품에서 새근새근 자는 체카와 그런 체카를 가볍게 끌어안은 채 잠든 아이렌을 번갈아 바라보던 레오나는 목덜미를 긁적거리다가, 우선 큰 그림자에 손을 뻗었다.

 

‘평소에나 좀 잘 것이지.’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성실하게 등교하니 잠이 부족할 수밖에. 그러니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드는 것이 아닌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친 그는 조심스럽게 아이렌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앞머리를 걷어내다가….

 

“삼촌?”

“아.”

 

상대의 품에서 자고 있던 제 조카와, 그대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대체 언제 깬 거냐!' 그렇게 속으로만 외친 레오나는 조용히 하라는 듯 눈짓을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어린 체카는 어른의 커뮤니케이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뽀뽀할 거야?”

“하??”

“숙모랑 뽀뽀할 거야?? 괜찮아, 비밀로 할게. 삼촌!”

“잠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젠장, 형님이랑 형수는 평소 뭘 하고 살길래 애가 이런 소릴…!”

“에헤헤.”

 

이제는 숙모라는 호칭에 딴죽을 걸기도 지쳤다. 체카의 입을 막은 레오나는 한 손으로는 체카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아이렌을 둘러업은 후, 터벅터벅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하여간, 일을 더 만들고 있군….”

 

그래도 잠깐이라도 저의 귀찮음을 덜어주었으니, 점심 정도는 먹여서 보내도 되겠지.

본인은 받은 만큼 늘 돌려주면서 정작 제가 돌려받는 것은 거부하는 아이렌이지만, 이번엔 체카가 있으니 쉽게 거절하지 못하겠지. 간만에 체카의 존재에 감사함을 느낀 레오나는 피식 웃고 푹 잠든 얼굴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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