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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세대 AU, 등장인물들의 6학년을 배경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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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장에서는 접촉사고를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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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감옥에 위치한 교실은 틈만 나면 살갗을 노리는 냉기로 가득했다. 그나마 약을 끓이고 있을 때는 불꽃과 수증기가 손을 녹여주었으나 열댓 개의 작은 솥은 아직 일할 차례가 아니었다. 아침부터 흐린 날씨에 칼바람이 분 오늘은 한층 심해서, 안락함을 좋아하는 슬러그혼 교수가 그나마 화로 몇 개를 놓아두지 않았다면 학생들은 모두 동상에 걸렸을지도 몰랐다.

 

“더럽게 춥네. 이러다 얼어붙겠어.”

 

애매하게 손이 굳어 자꾸만 생각한 곳에서 칼끝이 비껴가자 개구리 간을 토막 내던 엘리너가 짜증을 냈다. 옆에 앉은 세베루스가 두 번째 간을 끌어가면서 건성으로 대꾸했다.

 

“완전히 얼어 죽지만 않으면 이따 불에 녹겠지. 나가면서 다시 얼지도 모르지만.”

“무슨 보존식 만드는 소리를 해?”

“입맛 떨어지는 소리 하지 마.”

 

늘 그랬듯 말싸움을 나누던 두 사람의 시야 끄트머리로 하얀 종이 나비가 날아갔다. 흰 궤적을 따라 반사적으로 눈을 치켜떴던 세베루스가 정체를 확인하고 얇은 입매를 찡그렸다.

 

“보아하니 파트너 신청이군. 지금까지 뭘 하다 수업 중에 난리야?”

 

때는 12월, 슬러그혼이 주최하는 '민달팽이 클럽'의 크리스마스 무도회가 코앞이었다. 연회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것은 두 사람을 포함해 슬러그혼이 관심을 둔 일부 학생들뿐이었지만 파트너를 마음대로 데려갈 수 있었기에 고학년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기대와 소란이 퍼지는 중이었다.

 

“그러는 너도 아직 파트너 없잖아.”

“네가 할 말이냐? ……파트너가 필수는 아니야.”

“교수님 반응을 상상해보면 갑자기 필수로 느껴질걸.”

 

말을 꺼낸 사람과 들은 사람 모두 급격히 표정이 텁텁해졌다. 교실 뒤쪽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 있는 저 지나치게 사람 좋은 교수에게 혼자 파티에 들어선 모습을 들킨다면 결과는 뻔했다. ‘이 좋은 날에! 저런, 저런, 학업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이럴 때 추억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 걱정하지 말게, 내가 도와줄 테니.’ 같은 말을 하며 거절할 틈도 없이 누군가와 억지로 소개를 시켜줄 모습이 생생하게 상상됐다. 애초에 세베루스도, 엘리너도 이런 사교활동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방학 아르바이트 소개 건으로 슬러그혼에게 신세를 지지 않았다면 적당히 핑계를 대며 초대를 고사했을 터였다.

 

“릴리도 아직 파트너가 없는 것 같던데.”

 

엘리너는 은근슬쩍 릴리의 이름을 꺼내면서 세베루스를 흘긋 쳐다보았다. 만일 세베루스가 릴리와 같이 무도회에 가고 싶다고 솔직히 말한다면 작은 기대는 접어 넣고 이 화제는 더 꺼내지 않을 셈이었다. 뭐, 놀리는 시늉은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릴리는……그 애한테는 그런 얘기 못 해.”

“왜?”

“그러니까……아니, 애초에 왜 내가 너한테 이런 걸 변명하고 있는 거냐?”

 

세베루스의 얼굴이 빠르게 붉어졌다가 창백해지기를 반복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먼저 물어본 주제에 배알이 뒤틀렸다. 같이 가자는 한 마디도 쉽게 꺼내지 못할 만큼 떨리고 수줍어지는 모양이지. 어쨌든 같이 갈 사람이 없다면 됐다. 엘리너는 익숙한 기분의 등락을 내색하지 않은 채 별 것 아닌 척 툭 말을 이었다.

 

“그럼 나는?”

“너는, 뭐?”

“나한테는 말할 수 있냐고.”

“……그래야 하나?”

 

세베루스의 창백한 이마 위로 물음표라도 박혀있는 것 같았다. 드물게 당황이 드러나는 얼빠진 태도에 엘리너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넣었다. 싫어, 도 아니고 그래야 하나, 라니. 그렇게까지 후보로 고려한 적도 없다고 웅변할 것까지는 없는데. 애써 매끈하게 만든 얼굴 아래로 따가운 허탈함이 목구멍을 조이게 했다. 변명할 사이도 아니고, 파트너 신청을 할 사이도 아니라면 매 수업마다 자연스럽게 동행하며 옆에 앉지도 말아야지. 화만 내던 애가 가끔은 웃기 시작하질 말았어야지. 눈이 마주쳤을 때 말없이 바라봤으면서. 책상 위에서 손끝이 닿아도 내버려뒀으면서. 세베루스가 아주 오래전부터 릴리를 짝사랑하는 걸 알면서도 그가 틈을 보일 때마다, 자신에게 조금씩 물러질 때마다 자라는 기대를 모두 잡아 죽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 뭐가 문제인데?”

“뭐가 문제냐고?”

 

문제가 아닌 걸 찾기가 더 쉬웠다. 그녀는 답 없는 짝사랑 중이었고 상대인 남자애는 너와 무도회를 갈 일은 없을 거라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약간의 왜곡이 있지만 어차피 같은 맥락이었다). 그녀가 우정 이상의 기미라고 해석한 모든 것들이 사실 객관성 아래에서는 헛꿈, 누명이었다고 치더라도 예의라는 게 있다면 그렇게 얼빠진 대답은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상황을 곱씹으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엘리너는 세베루스를 노려보다가 아직도 쥐어짜고 있던 개구리 간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윽!”

 

선홍색 내장이 과하게 힘을 받아 튀어나갔다. 실수했다고 생각한 찰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원래 겨냥했던 궤도를 한참 벗어난 미끌미끌하고 축축한 토막이 세베루스의 광대에 철썩 붙었다가 느릿느릿 뺨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의도치 않은 결과에 깜짝 놀라 입을 벌렸던 엘리너는 금세 고집스럽게 태연한 표정을 꾸며냈다.

 

“미안해. 손이 미끄러졌…….”

 

말을 맺을 틈을 주지 않고 새까만 눈이 이쪽을 노려보는 동시에 개구리 간이 홱 날아왔다. 찹, 잘도 볼에 명중한 개구리 간이 미지근해지는 감촉이 선명했다.

 

“야!”

“네가 먼저 시작했다.”

“아니, 실수라고―”

“실수 좋아하시네.”

“넌 날 뭐로 보는 거야?”

 

세베루스가 뺨을 닦아내면서 비뚜름한 입매로 뭔가 대꾸하려던 때에 조끼에 감싸인 동그란 배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슬러그혼이 풍성한 콧수염을 들썩거렸다.

 

“아니, 엘리너, 세베루스도! 곧 크리스마스라서 흥분한 건 알겠지만 수업 중에 싸움은 곤란해요. 어디 보자……슬리데린에서 각자 5점씩 감점해야겠군. 반성으로는 충분하겠지?”

 

세베루스와 엘리너는 서로를 노려보면서 마지못해 웅얼웅얼 사죄의 말을 주워섬겼다. 슬러그혼은 험악한 시선 교환이 그냥 청춘의 한 장면으로만 보이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둘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리고는 교탁으로 사라졌다. 하던 말을 이어보라고 세베루스를 닦아세우고 싶었으나 이미 감점까지 당하고 다시 소란을 피우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있었기에 엘리너는 그냥 개구리 간의 흔적을 닦아내고 약을 만드는 일로 돌아갔다. 지금 다시 대화를 시작한다면 이번엔 개구리 간이 아니라 솥단지를 내던져버릴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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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랑 무도회에 간다고?”

 

엘리너는 귀를 의심하면서 되물었다. 안뜰에 마주 앉은 릴리가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알아, 갑작스러운 거. 세브도 당황했을 거야. 하지만 이미 포터 앞에서 간다고 해버렸는걸!”

 

세베루스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워 하루 도서관에서의 숙제 시간을 거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엘리너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릴리의 얼굴을 멍하게 응시했다. 아니, 실은 제임스 포터의 이름이 나온 시점부터 대강 예상이 되기는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이야기는 추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포터가 꽃다발까지 들고 와서는 같이 가자고 하잖아! 너와 세브한테 사과하기 전에는 무도회고 뭐고 걔와 복도도 같이 안 걸을 거라고 했는데도! 나랑 간다고 말하기 전까지 잠잘 때만 빼고 계속 파트너 신청을 할 거야, 라니 정말 제멋대로지 않아? 짜증나서 홧김에…….”

“이미 파트너가 있다고 했구나.”

 

릴리가 처량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너는 여기서 제임스 포터를 욕하는 게 릴리의 기분을 위안해줄지 아닐지 고민하다가 그냥 스스로의 기분을 위해 욕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 멍청이는 대체 언제까지 철없고 재수 없게 굴려는 거지?”

“걔가 조금만 더 어른스럽게 행동했으면 나도 10번씩 거절하진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포터도 이전보다는 최악은 아니니까……아무튼, 그런데 그 바보가 감을 못 잡잖아. 잘못한 걸 인정하랬지 내가 언제 나한테만 매달리라고 했냐고.”

“최악은 아니야? 그래도 대왕오징어보다는 나아졌나봐?”

“엘리너!”

 

머리칼과 어울리도록 가볍게 뺨을 붉힌 릴리가 엘리너에게 눈을 흘겨보였다. 엘리너는 비죽비죽 웃다가 아무렇지 않은 양 다시 화제를 되돌렸다.

 

“포터가 쉽게 수긍했을 것 같진 않은데.”

“응, 누구냐고 계속 물어보더라. 근데 그때 세브가 왔거든……. 그래서……세브라고 해버렸어. 아! 제임스 포터, 정말이지!”

“……뭐, 어쩔 수 없지. 세베루스가 괜찮다고 했으면 너무 신경쓰지 마.”

 

릴리가 얼굴을 가리며 괴로워하는 이유가 온전히 충동적인 대응에 대한 부끄러움과 세베루스를 향한 미안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엘리너는 모른 척 그녀를 다독였다. 지금 어설픈 연애 상담까지 해주기엔 제 마음부터 배배 꼬여서 여력이 없었다. 아무리 세베루스와 싸우고 헤어졌다지만 막연히 기회가 더 있을 줄 알았다. 어차피 릴리와 가지 않을 거라면 나 말고 누구와 가겠느냐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혼자 꿈을 꾼 결과가 이거라니, 뭘 기대했는지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릴리가 먼저 권한다면 세베루스가 거절할 리 없는데.

 

“엘리너 넌 누구랑 갈 거야?”

 

조금 진정한 릴리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그녀를 보고 물었다. 네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포터랑 갈 줄 알아서 나는 남은 사람끼리 세베루스랑 가려고 했는데……아니, 안 되지.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방금 파트너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어, 이것도 안 돼. 엘리너는 릴리를 탓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꺼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면서 영혼 없이 대꾸했다.

 

“그러게. 셋이서 팔짱 끼고 갈 수 없으니까 나도 파트너를 만들긴 해야겠지. 데려갈 만한 애가 딱히 없는데……아무나 입장만 같이 하자고 하지 뭐.”

“그래도 괜찮아? 특별한 날인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차피 빠질 수 없어서 가는 곳인 걸. 별로 아쉬울 것도 없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가고 싶지도 않았으니 누구와 가든 상관없어. 몇 시간만 때우다 오는 거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말하면서도 단어가 혀끝에서 어색하게 구르는 감각이 죄다 한심한 거짓말이라고 고지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때로는 진심보다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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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러그혼의 사무실을 작은 홀만큼 늘려놓은 공간은 뒤섞인 향기와 음악과 초대객의 움직임으로 빈틈없이 차 있었다. 엘리너는 한구석에 기대어 흰 장갑을 고쳐 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민달팽이 클럽에서 적당히 말을 트고 지내던 래번클로 7학년생과는 이미 구색을 맞춰 입장한 후 댄스 플로어에서 어색하게 얼쩡거리다가 헤어졌고, 이제 뭘 하면서 시간을 때울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파티장 안을 종횡무진 오가는 슬러그혼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몇몇 친분이 있는 얼굴들, 눈에 익은 사람들, 그리고 슬러그혼의 지인으로 보이는 처음 보는 이들을 훑다보니 어느 순간 시선이 한 지점에 머물렀다. 무엇이 주의를 끌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몇 번 눈을 깜빡이고서야 엘리너는 인파 사이 작은 테이블에서 세베루스와 릴리의 모습을 분간해냈다. 그녀가 임시 파트너를 만나느라 입장을 따로 한 탓에 저녁 이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몇 초를 지켜만 봤을까, 세베루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왔다. 어쩐지 모른 척하려던 마음을 간파당한 기분으로 뚱한 낯에 붙들린 사이 릴리도 이쪽을 보고는 손을 흔들어 다른 선택지를 없애버렸다.

 

“안녕.”

“……안녕.”

 

결국 엘리너는 인파를 헤치고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둘 다 정장 로브를 차려입은 모습이 퍽 낯설게 느껴져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 여전히 그녀를 반쯤 노려보고 있던 세베루스가 마지못한 듯 느리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뭐 하고 있었어? 파트너는?”

 

녹색 드레스에 상아빛 장식 망토를 걸친 릴리가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엘리너는 릴리 옆에 앉으면서 순순하게 답을 주었다.

 

“파트너랑은 벌써 헤어졌지. 처음부터 그러기로 합의하고 파트너를 한 거니까. 뭘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벌써? 춤은?”

“나 춤 못 춰. 그러는 너흰 뭐 하고 있었는데?”

 

엘리너는 릴리의 살짝 상기된 뺨과 세베루스의 얼굴 옆으로 흐트러진 잔머리를 곁눈질했다. 두 사람은 자신과 달리 무도회장을 올바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온 듯싶었다.

 

“춤 췄더니 목이 말라서 쉬러 왔지. 너도 찾아보고.”

“아, 그럼 나도 뭔가 마셔야겠다.”

 

날 뭐 하러 찾아, 하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세베루스만 있으면 모를까 릴리는 진심으로 하는 말일 테니 그냥 말을 돌렸다. 치맛자락을 추스르면서 의자에서 일어난 엘리너는 몸을 일으키던 세베루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 릴리의 음료를 가져다주려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다시 앉아버릴 수도 없고, 릴리는 선수를 뺏겨 머쓱해하면서도 둘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는지 가만히 있는 걸 보니 꼼짝없이 세베루스와 둘이 음료를 가지러 갈 판이었다. 쓸데없이 심장이 쿵쿵 뛰어서 엘리너는 세베루스를 두고 먼저 자리를 떴다. 툭하면 동요를 일으키는 상대로부터 아주 잠깐 거리를 확보한 보람도 없이,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왁자하게 웃는 젊은 남자 서넛이 눈앞을 휙 가로질러가 움찔 물러서는 동안 금세 뒤를 따라잡은 세베루스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챘다.

 

“왜 먼저 가냐?”

“그럼 안 돼?”

“사람이 많으니까 그렇지.”

“어차피 어딜 가는지는 다 알잖아.”

“이대로 나가버리려던 건 아니고?”

“릴리가 기다리는데 설마 그러겠어?”

“나는 멍청이로 만들어도 되고 말이지.”

 

새까만 눈동자가 불만스럽게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세베루스의 키가 그녀를 추월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저 눈에 맞춰 시선을 들면 그 약간의 간격 사이 압축된 모든 변화에 문득 아연해지곤 했다. 팔꿈치 아래 맨살에 닿은 손이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얇은 장갑 너머의 체온이 실제 이상으로 뜨겁게 느껴져 뿌리치고 싶으면서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찌푸린 눈썹 아래로 그녀를 응시하던 세베루스가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오, 여기들 있었구먼!”

 

쾌활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터져 나왔다. 엘리너는 거의 펄쩍 뛰면서 세베루스의 손에서 벗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꼭 끼는 조끼 단추를 풀어헤치고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든 슬러그혼이 술기운으로 목까지 불그죽죽해져서 활짝 웃고 있었다. 뭐라 답하기도 전에 세베루스와 엘리너는 휘리릭 퉁퉁한 손에 붙들려 그의 옛 제자라는 중년의 여자 마법사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공통의 위기 앞에서 미묘했던 분위기를 모두 잊고 고통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야, 한 시간 동안 사교적 대화만 하기 전에 어떻게 좀 해봐.’

‘너야말로 어떻게 좀 해봐라.’

 

한동안 입술로는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면서 서로의 발끝을 미세하게 툭툭 쳐댄 결과 마침내 마법식물 학자라는 여자가 그들의 괴로움을 눈치챘는지 작게 웃었다.

 

“자, 이제 학생들끼리 즐기게 해줘야겠죠?”

“오, 그렇지! 내가 너무 오래 잡아뒀군. 그래, 엘리너, 세베루스, 가서 춤이라도 추지 그러니?”

“네?”

 

첩첩산중이었다. 반사적으로 반문한 엘리너는 제어 없이 튀어나온 당혹감을 얼버무리면서 덧붙였다.

 

“저, 교수님, 저는 춤을 못 춥니다. 그리고 일행이 더…….”

“저런, 너무 어렵게 생각 말렴. 마침 왈츠를 연주하는군! 왈츠는 아주 쉬운 춤이지. 세베루스가 충분히 가르쳐줄 수 있을 걸세.”

“그…….”

 

어어 하는 사이 싱글벙글 웃는 슬러그혼의 손에 떠밀려 엘리너는 한 손은 세베루스와 마주 잡고 한 손은 그의 어깨에 올린 채 댄스 플로어에 서 있었다.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은 세베루스가 낮게 한숨을 쉬더니 슬러그혼이 있을 쪽을 언뜻 훔쳐보며 속삭였다.

 

“그냥 대충 맞춰. 안 볼 때 도망가자.”

“지금은?”

“이쪽을 가리키며 아주 즐겁게 웃고 계시는군.”

“젠장.”

 

제법 커다란 손이 허리를 당기면서 불현듯 춤을 시작했다. 엘리너는 본능적으로 세베루스를 올려다보았다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흠칫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눈앞에 흰 목깃과 검은 보타이가 보였다. 마찬가지로 검은 정장 망토가 두 사람이 천천히 발을 옮길 때마다 엘리너의 푸른빛 스커트 자락과 박자를 맞춰 부드럽게 흔들렸다. 세베루스가 무언가를 속삭이는 목소리가 선율을 지나 귓가로 부드럽게 떨어졌다. 매끄럽고 낮은 음성에 지나치게 집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느라 엘리너는 한 호흡 늦게야 그 내용을 이해했다.

 

“춤 출 줄 모른다며. 역시 핑계였냐?”

“……그렇긴 한데 정말 왈츠밖에 몰라. 그것도 기본적인 스텝만.”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속으로 박자를 세느라 평소보다 말이 느려졌다. 혹은 몸을 붙잡은 세베루스의 손, 발이 엇갈리며 스치는 옷자락, 평소보다 훌쩍 가깝게 와 닿는 모든 것이 마음을 앗아가지 않도록 방비하느라 그런지도 몰랐다.

 

“그래, '거의' 출 줄 모르는군. 애초에 왈츠는 어떻게 아는 거냐?”

“아는 사람이 그것만 가르쳐줬어.”

“아는 사람이라니, 누구?”

“있어. 난 너야말로 어디서 배웠나 궁금한데.”

“누군데 말을 안 해?”

“그렇게 궁금해? 아니면 할 말이 없어?”

 

지나치게 물러지지 않으려다가 되레 뾰족하게 나간 대꾸에 세베루스가 얼굴을 구겼다. 그러더니 다음 박자에서 단숨에 그녀의 허리와 손을 밀치고 잡아당겨 빙글 돌게 만들었다. 종아리를 덮는 스커트가 가볍게 물결치고 흰 장갑이 허공에 호를 그렸다. 얼떨결에 그의 팔 아래에서 한 바퀴를 도는 것까지는 해냈지만 어설프게 서두른 발이 꼬여 비틀거리는 것을 밀친 장본인이 도로 팔로 휙 붙들어 똑바로 세워놓았다. 겨우 박자를 찾은 엘리너가 작은 소리로 화를 냈다.

 

“너 일부러 그랬지!”

“그럼 모르고 그랬겠냐?”

 

세베루스가 코웃음을 쳤다. 잠시 발을 밟으려는 사람과 피하려는 사람 사이의 치열한 기싸움 후 휴전이 찾아왔다. 말없이 움직이던 세베루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루시우스에게 배운 거다.”

 

엘리너는 이번에도 한 발 늦게 그 말이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먼저 답해준 걸 보니 나름의 사과인 것 같기도 했다.

 

“하, 네가 그 사람이랑 왈츠 추는 걸 상상하니까 좀 웃기다.”

“턴을 복습해보고 싶다는 소리인가?”

“아니거든.”

 

비죽 웃는 엘리너를 가만히 쳐다보던 세베루스가 조금 늦게 심술궂은 대꾸를 던졌다. 은근슬쩍 손을 옮기는 모양이 금방이라도 그녀를 휘릭 돌려버릴 준비가 만만이라 곧장 정색을 하고 거절해야 했다. 세베루스가 슬쩍 입꼬리를 기울여 웃었다. 가볍게 접힌 눈매로 서서히 비웃음과 겉치레 대신 순연한 즐거움이 고였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엘리너는 자신의 얼굴 또한 다시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가슴속에 부푸는 무엇도 전혀 숨기지 못하며 입술 끝과 끝, 눈가와 눈썹까지 번진 미소였다. 그러나 더는 절제하고 싶지 않았다. 저 웃음 앞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한 바퀴의 춤이 영원 같았다. 귓가에 흐르던 음악이 금방이라도 다른 곡으로 바뀔 것처럼 조금씩 빨라지며 뒤섞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더라, 생각한 순간 뭔가가 머릿속에서 퍼뜩 번쩍였다. 가볍게 눈썹을 찌푸리고 한 발을 딛으면서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순간 누군가의 붉은 옷자락이 시야에 걸렸다. 찰칵 연상이 맞물렸다.

 

“아! 릴리!”

 

외마디 외침을 들은 세베루스의 얼굴에 거울처럼 낭패감이 밀려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아직 왈츠를 추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릴리를 두고 온 테이블로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를 연발하며 도착한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세베루스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어디 갔지? 우리가 너무 늦어서 엇갈렸나?”

“잠깐만.”

 

근처 테이블에서 그리핀도르의 메리 맥도널드가 후플푸프 남자애와 N.E.W.T.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메리는 나름대로 릴리와 친분이 있으니 그 애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엘리너는 다소 급하게 메리에게 다가갔다.

 

“맥도널드. 혹시 릴리 못 봤어?”

“어……. 어, 아까 포터한테 뭐라고 하는 것까진 봤는데,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어.”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리너를 쳐다보던 메리가 세베루스를 곁눈질하면서 대꾸했다. 릴리가 세베루스와 파트너로 왔다는 걸 안다면 왜 그녀가 아니라 엘리너가 그와 같이 있는지 의아해하는 걸지도 몰랐다. 딱히 묻지 않은 부분까지 변명할 마음은 없었기에 엘리너는 짧게 감사의 인사만 전하고 세베루스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발을 멈추자마자 손목을 빼낸 세베루스가 뚱하게 팔짱을 꼈다.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러냐?”

“포터가 왔었나봐.”

“……릴리가 그래서 도망갔나?”

“그럴지도 모르지. 어디 숨어있을지도.”

 

두 사람은 잠깐 눈을 마주했다가 동시에 파티장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저곳에 모여서 시야를 가리는 사람들, 곳곳에 벽을 가리고 길게 늘어진 장식용 커튼, 사람 키만 한 대 위에 놓인 화병에다 음식과 음료가 놓인 커다란 테이블까지 숨을 곳은 무진 많았다. 예고 없이 세베루스가 근처에 있던 커튼을 휙 들췄다.

 

“아무도 없군.”

“놀랐잖아. 다른 데도 한 번 볼까?”

“좋아.”

 

그 후는 결실 없는 수색의 시간이었다. 릴리의 이름을 부르면서 장식품 뒤를 돌아보거나 커튼을 들췄다가 세 번쯤 포옹하던 커플을 도망치게 만들고, 두 번쯤 입술을 맞댄 커플에게 욕을 듣고, 다섯 번쯤 겨우살이만 발견한 후 세베루스와 엘리너는 잠깐 조사를 멈추기로 합의했다.

 

“아니, 대체 전교생이 모인 것도 아닌데 연애하는 애들이 왜 이렇게 많아?”

“게다가 남의 학교에 와서 연애하는 인간들은 뭐지?”

 

두 사람은 아까 보아두었던 빈 커튼 뒤에 나란히 등을 기대고 불만을 피력했다. 근처에 겨우살이가 매달려있다는 점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테이블이 놓인 장소보다 훨씬 한적한 점은 마음에 들었다. 하긴, 겨우살이가 있다고 해도 어쩌겠어. 겨우살이가 있으니까 자리를 옮기자, 같은 소리를 하면 그 아래 있을 때 조금이라도 키스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들리잖아. 엘리너는 파티장을 누비고 다니느라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다시 땋아서 올린 머리에 쑤셔 넣고 한숨을 쉬었다.

 

“릴리는 먼저 돌아갔나 봐.”

“아마도.”

 

세베루스가 짧게 답했다. 모호한 표정에서 그도 아마 자신과 같은 짐작을 하는 건 아닐까 어렴풋한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릴리는 지금 제임스 포터와 있을 것이다. 싸우고 놀리고 훈계하면서도 지난 몇 년과 달리 두 사람의 관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뚜렷했다.

 

“나가서 찾으러 갈까?”

 

그러니 사실은 세베루스 너도 알겠지.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그 애가 향하고 있다는 걸.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엘리너는 모른 척 물었다. 세베루스의 끊임없는 맹목이 괴로워 심술을 부리고 짜증을 내도 결국 그가 아직 포기할 수 없다면 그 마음을 깨버리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시간이 있었으므로 그의 상심이 오늘이 될 필요는 없었다.

 

“……됐어. 내일 얘기해도 되겠지.”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얌전했다. 엘리너는 고개를 돌려 세베루스의 옆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너 오늘 좀 이상하다.”

“무슨 소리야?”

“아니, 뭐……좀 더 분노에 불탈 줄 알았어.”

“나를 무슨 붉은 천만 보면 달려 나가는 황소로 생각하는군.”

 

일부러 들쑤신 말에 답할 때는 타고난 빈정거림이 좀 돌아왔나 싶었으나 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히 침울했다. 엘리너는 점점 초조한 기분이 되어 부러 비뚤게 웃으면서 세베루스를 툭 건드렸다.

 

“왜? 아니야? 릴리와 포터가 붙어 있으면 그랬잖아.”

“그만해.”

 

세베루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가볍게 지분대던 가죽 안에서 녹슨 침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뿐, 말과 함께 엘리너를 째려봤던 세베루스가 퍼뜩 당황한 낯을 하더니 마른 세수를 했다. 흰 장갑에 덮인 손가락 사이로 떨떠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내가 잘못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냐?”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표정이, ……아니, 됐어. 아무튼 네가 자꾸 그런 소리만 하니까…….”

 

도통 이해하기 힘든 말뿐이었다. 기운 없는 게 싫어서 짐짓 놀리기야 했지만 책망한 적은 없는데. 적어도 지금은. 표정이 뭘 어쨌다는 거야, 엘리너는 괜하게 자기 뺨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짧은 침묵이 자리 잡으려는 순간 세베루스가 쓴 것을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넌 내가 뭘 어쩌길 바라는 거야?”

“뭐?”

 

릴리와 포터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이쪽으로 화살이 튀는지 혼란스러웠다. 올려다본 창백한 얼굴은 고의인지 정면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당장 포터에게 결투라도 신청하길 바라는 건가?”

“뭐? 아니야. 갑자기 무슨…….”

“아니면 왜 자꾸 부추기는 거냐? 그것뿐이면 아무래도 좋아. 네가 쓸데없이 참견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니니까. 그런데 넌…….”

 

세베루스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작게 흔들리고 가장자리가 뒤집히면서 끌어내는 목소리는 어딘가 억울하게 들렸다.

 

“결국은 일이 내 예상을 벗어나긴 했는데……여기, 릴리랑은 못 올 거라고 생각했어. ……이상하지만 그냥……당연히 너랑 올 거라 생각했다고. 넌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어?”

“널 뭐로 생각하냐고? 그런 걸 알 것 같냐? 난 네가 뭔지 모르겠어. 하나도.”

 

엘리너는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기분으로 세베루스를 멍하게 응시했다. 그의 말들은 마치 투정 같았다. 나는 네게도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데 왜 그건 봐주지 않느냐고, 넌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고. 네 마음을 모르겠다고. 과대해석이야, 그렇게 습관처럼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빈정대고 화를 내면서도 옆을 뜨지 않는 저 분한 얼굴은 자꾸만 꿈을 꾸게 했다.

 

“……나 그렇게 이상해?”

“몰라서 물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지금도 너의 마음은 모호하고, 네 다정은 그 애에게 먼저 주어진 후에야 나에게 흘러들지. 난 그냥 아프기 싫었어. 네게 부담을 주기도 싫었어. 그리고 이런 얘기를 네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어.

 

“…….”

“……됐어. 잊어버려.”

 

이번에도 역시 너무 오래 방치해서 뱃속 밑바닥에 단단히 굳어버린 것처럼 속마음은 도저히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침묵하는 사이 세베루스가 먼저 부루퉁하게 말을 돌려버렸다. 불현 듯 조바심이 났다. 엘리너는 벽에서 몸을 떼고 커튼을 걷으려 천을 쥔 세베루스의 뒤에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래서 내가 싫어?”

 

말하자마자 얼굴이 홧홧해질 만큼 솔직하지 못한 유치한 말이었다. 세베루스가 삐걱삐걱 도로 고개를 돌렸다. 깜빡이는 눈꺼풀 속에 어이없다는 문장이 너무 선연해서 반사적으로 얼굴에 피가 더 몰려들었다. 엘리너는 뜨거워진 볼을 손등으로 누르면서 고개를 숙이고 볼 것도 없는 구두코를 세상 제일 흥미로운 물건처럼 쳐다보았다.

 

“……잘못 말했어.”

“…….”

 

머리 위로 꾹꾹 누른 한숨이 떨어졌다. 눈을 들자 대판 얼굴을 구긴 세베루스가 보였다. 천 자락을 움킨 긴 손가락부터 뻣뻣해진 어깨와 목덜미를 타고 앙다문 턱까지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기어이 버럭 짜증이 터졌다.

 

“너는 대체가!”

 

엘리너는 움찔 떨리는 손을 맞잡아 꽉 쥐고 부러 뻔뻔하게 턱을 들었다. 그냥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편했을 텐데. 애써서 한 조각 본심을 꺼내봤자 경기를 일으키며 얼른 천으로 덮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야. 그러나 그녀는 싫어하지 말아 줘, 라고 말하기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발을 빼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더라도 어느새 그렇게 변했고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지점이었다.

 

“……화낼 것까지는 없잖아?”

“화를 안 내게 생겼냐? 평소엔 뺀질거리기나 하면서 이럴 때만 비겁하게 굴고!”

“말이 심하네,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해!”

“그럴 수 있으면 편하지!”

 

세베루스가 커튼을 쥐고 성큼 움직인 탓에 거칠게 당겨진 천이 차락, 두 사람을 감싸면서 펼쳐졌다. 직물의 그림자 속에서 짧은 공방의 잔재가 열 오른 숨결로 남았다. 엘리너는 하려던 말을 아랫입술에 올려둔 채 얕은 호흡을 헐떡였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멱살이라도 잡을 거리에 세베루스의 가슴팍이 들먹이고 있었다. 이미 벽을 등져 물러설 곳은 없었다. 엘리너는 무용한 후퇴 대신 세베루스의 어깨에 떨리는 손을 얹었다. 밀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춤을 출 때처럼 그를 붙든 것 같기도 했다.

 

“세베루스…….”

 

비켜, 라고 말해야 하는데. 바싹 마른 혀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면 문장을 완성하기엔 머릿속에 온통 잡생각이 가득해서일지도 몰랐다. 싫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내가 싫지 않아? 왜 먼저 비키지 않는 거야,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

 

지금이라면 세베루스의 토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세베루스 스네이프를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조금 높은 곳에 있던 얼굴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시야가 어슷해져 그제야 자신이 상대에 맞춰 고개를 기울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의 까마귀 깃 같은 머리칼이 광대뼈 위로 흘러내려서 자기도 모르게 손끝으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코가 부딪칠 거야. 숨을 참은 순간 입술에 흐릿한 감촉의 유령이 먼저 와 닿았다. 정말 무언가 닿기 전부터 신경이 곤두서고 뒷목이 저릿해지는 그 감각. 그리고 톡, 모든 긴장이 아주 작은 점으로 오그라들었다…….

 

“엘리너, 세브, 거기 있어?”

 

세베루스가 홱 고개를 드는 동시에 엘리너가 그의 가슴팍을 퍽 밀쳤다. 작게 컥 소리가 난 것을 무시하고 다급하게 손등으로 얼굴을 식히면서 커튼을 젖히자 릴리가 한 발짝 너머에서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 있었구나!”

“아, 응, 그렇지. 널 찾다가 잠깐 쉬고 있었는데…….”

 

엘리너는 묻지도 않은 부분까지 변명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끊긴 말을 의문으로 받아들였는지 릴리가 멋쩍게 머리칼을 매만졌다.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해. 잠시 나갔다 왔어.”

“포터가 들러붙었다는 얘기까지는 들었다.”

 

가슴을 문지르던 세베루스가 끼어들었다. 엘리너는 릴리의 얼굴에 갑자기 분홍빛이 떠오르는 모습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만큼 동요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 반응이 놀랍지 않다기보다 여기 놀라려면 방금 전에 일어난 일에부터 놀라야 하는데 둘 다 소화할 여력이 없는 데에 가까웠다.

 

“그 녀석이랑 별 일 없었지?”

“그럼! 아무 일도 없었어!”

 

무슨 일이 있었군. ‘아무 일도’에 특히 강세를 둔 대답은 상당히 신빙성이 없어서 엘리너는 세베루스의 표정을 살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노력은 허망하게도 릴리의 다음 질문에 와장창 무너졌다.

 

“그러는 너희도 별 일 없었지?”

“……어? 당연하지.”

“그, 그래.”

 

자기도 모르게 세베루스를 쳐다보고 만 엘리너는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불에 닿은 것처럼 황급히 시선을 앞으로 되돌렸다. 어떻게 봐도 수상한 반응을 하고 말았지만 다행히 릴리는 자기의 비밀로 머리가 꽉 차서 특별한 추궁을 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네. 이제 뭐 할 거야?”

“지금이라도 음료 한 잔 하면서 생각할까?”

“난 좋아. 세브는?”

“나도 괜찮다.”

 

얼버무리는 웃음과 헛기침 사이로 이어진 대화는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잠깐 백일몽을 꾼 기분이었다. 릴리와 세베루스를 앞세워 삼각형으로 걸어가면서 엘리너는 가볍게 입술을 문질렀다. 정말로 있었던 일인가? 생생한 상상을 한 건 아닐까? 택도 없는 가설이건만 꿈이 아니었다는 것도 비등하게 거짓말 같은 나머지 제법 가망 있게 느껴졌다. 파티의 답답한 공기 때문에 산소가 부족해 환각을 봤을지도 모른다고 3할쯤 믿기 시작할 즈음 세베루스가 반걸음쯤 뒤쳐졌다. 뒤를 돌아본 눈이 엘리너의 암녹색 눈동자를 찾았다.

 

세베루스는 금방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잠시로 충분했다. 꿈이 아니었다. 그게 꿈이라면 두 사람은 같은 꿈을 꿨을 것이다. 엘리너는 세베루스를 마주한 후 다시 뜨거워지는 살갗을 마른세수로 숨겼다. 무심결인 듯 아랫입술을 건드리던 검지가 그녀를 보는 순간 멈추고, 눈 밑까지 홍조가 치솟았다. 엘리너는 자신의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 없었다. 다시 앞으로 향하는 세베루스의 손끝이 엘리너의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여리고 조심스러운, 고작 한 점이 닿을까 말까 한 접촉이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 알았다. 그 커튼 뒤가 없던 일이 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교차한 눈길 뒤로 악단이 셀레스티나 와벡의 ‘겨우살이 키스로 날 무장해제해줘요’를 편곡해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창밖에 눈이 내려도, 내 심장은 굳건해요, 내 갑옷을 벗길 오직 하나, 오, 하나의 주문만이 있어요, 그건 당신의 키스랍니다……키스해줘요, 달링, 겨우살이 아래, 지팡이를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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