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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때가 있지 않아요?”

 드물게 가벼운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은 플랫의 응접실에 울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정확한 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떠오르지 않을 때의 짜증을 표현하려, 눈썹을 모으듯 찌푸렸다가 웃어버리며 말하는 존은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시엘은 긴 소파의 한쪽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집어 든 찻잔에는 정교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어, 흰 바탕에 금빛이 반짝이는 특색을 준다. 시엘이 기억하기에 분명 셜록에게 도움을 받은 의뢰인의 선물이었다. 척 보기에도 고가의, 정성이 지극히 담긴 보답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셜록이 그 의뢰인을 기억하는지는 미지수였지만. 찻잔에 담긴 붉은 빛의 액체가 들어 올리는 손길을 따라서 잔잔히 일렁이고 은은한 홍차의 향기가 플랫에 퍼진다.

 손잡이를 잡지 않은 손끝이 금빛 테두리를 따라서 덧그리듯 움직였다. 시선을 내리뜬 채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차를 머금고 완전히 삼킨 뒤에 가벼운 웃음을 흘린다. 고개의 끄덕임은 반사적이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그런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존은 자신의 소파에 앉아 이번 주말에 있었던 데이트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었다. 그의 표정만으로도 제법 나쁘지 않았다는 건 허드슨 부인조차도 알 수 있었다. 부인은 시엘의 곁, 긴 소파의 다른 끝에 앉아 동의의 목소리를 내었다. 노란색의 잔 꽃무늬 원피스가 눈에 띄었다. 티테이블에는 책과 자료들이 모서리로 밀려나 있었고 부인이 가져온 오이 샌드위치가 중간에 차려져 있었다. 그중에서 한 조각을 거의 다 먹은 부인은 떠올랐다는 듯 자연스럽게 손뼉을 쳤다. 허드슨 부인의 이야기는 전 주의 모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시엘의 상체가 흥미롭다는 듯이 부인에게로 기울었다. 존도 그의 소파에 기대어 듣고 있었다. 유일하게 동의하지도 하물며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 사람은 셜록뿐이었다. 한 손에 핸드폰을 든 채로 자신의 소파에 나른하게 몸을 묻은 탐정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그게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 모두에게 상기시키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머금은 보조개 없는 입꼬리와,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는 야무진 손끝을 보며 검지 손가락으로 가볍게 검은 소파의 팔걸이 위를 두드렸다.

 존과 허드슨 부인 쪽으로, 입을 여는 대상을 좇아 분주하게 움직이던 오래된 고목과 같은 따뜻한 색의 눈동자가 틈을 찾아서 그의 손끝에 따라붙는다. 움직임을 살피고 올라온 시선이 그의 표정을 담고 화자를 보고 있지 않은 두 눈과 마주친다. 셜록은 잠시 고개의 기울어짐을 따라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각도를 생각했다.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고개를 돌려 제 몫의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있는 전직 군의관에게 무심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존, 오늘도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존은 샌드위치를 입에 문 채로 시간을 확인하고 대답이라 하기엔 애매한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급하게 찻잔을 들어 잔을 비우고서 일어난 그는 소파 등받이에 걸어뒀던 겉옷을 챙겼다. 셜록은 그의 두 번째 데이트는 처음처럼 원만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기로 했다. 대신 기다리지 않고 허드슨 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시던 모임을 놓치고 싶지 않으시다면, 슬슬 나가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허드슨 부인.”

 

 허드슨 부인은 깜빡할 뻔했다면서 호들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다는 말과 나중에 보자는 인사, 잘 다녀오라는 답이 오고 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둘을 보며 셜록은 깔끔하게 문을 닫았다.

 

 “존이 오늘도 일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흠?”

 

 시엘은 아직 돌아서 있는 셜록을 향해 묻고는 남아있는 샌드위치 조각을 집어 들었다. 순수한 궁금증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돌아서는 셜록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그럴 리가. 할 ‘일’이 있다는 것쯤이야, 존이 말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지.”

 “허드슨 부인의 모임은요?”

 “부인의 옷을 봤나?”

 

 시엘은 부인의 무릎 아래로 살랑거리던 치맛자락을 떠올렸다. 생각의 흐름을 따라서 눈동자가 굴러갔다.

 

 “티타임을 위한 게 아니었나 보네요.”

 “아니지.”

 “아쉽네요.”

 검은 가죽 소파 앞,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고 셜록은 긴 소파 곁으로 다가왔다. 찻잔이 달그락거리고 시엘은 소파의 쿠션이 두 사람의 무게에 짓눌리는 게 느껴졌다. 곁에 앉은 남자가 아주 잠깐 손을 멈췄다가 고개를 기울인다.

 “그럴 리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시엘이 샌드위치를 베어 물다 말고 올려다본다. 동그랗게 뜨인 눈이 짧게 깜빡인다.

 “아쉬워하기엔 지나치게 흘려듣는 눈치였는데.”

 “내가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고.”

 셜록이 흔들리는 두 눈과 시선을 맞춘다.

 “그, 그건 셜록이 지루해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런 거지요. 이야기 듣는 건 즐거웠어요.”

 “확실하게, 그건 그런 척에 가까웠지. 다행히 부인과 존에게는 그게 잘 먹히는 편이고.”

 “그런 척한 거로 생각해요?”

 “네가 진심으로 즐거워할 때의 태도와 얼마나 다른지 설명이 필요하나? 무시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더군. 그런 때의 네 행동을 잘 알고 있으니.”

 “그건—, 그건 다른걸요. 그냥 좋아하는 것과 아주… 좋아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아주 좋아하는 것?”

 놀리듯 말을 따라 하는 셜록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 시엘은 눈을 좁혀 떴다.

 “내가 셜록을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는지를 읊어야 할까요? ”

 듣기 좋은 저음의 웃음소리가 아까보다 고요해진 플랫을 울린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오래 화난 척하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시엘은 잠시 생각했다.

 “어쨌든, 존도 허드슨 부인도 좋아해요.”

 이야기의 종언을 선언하듯 내뱉은 말에 그가 한 모금, 차를 들이켰다.

 “네가 그렇다면, 둘을 다시 불러오도록 할까.”

 “으음?”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데.”

 평이하게 내뱉는 입꼬리가 아주 조금 비틀려 올라갔다. 표정을 샅샅이 살피는 눈동자가 드러나는 감정의 편린을 남김없이 담으려 움직인다. 시엘은 소리 없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항복의 선언은 입 밖으로 나지 않았지만 명확했다.

 “셜록,”

 “왜 그러지?”

 “...넷이서도 즐겁지만, 둘만인 편이 더 좋으니까요.”

 시엘의 시선이 티테이블로 내려갔다가 창문으로 향한다. 오후의 햇빛이 느지막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옆얼굴을 바라보던 남자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참지 않고 말했다.

 “그게 그렇게 말하기 어렵나?”

 “알면서 물어보는 게 나빠요.”

 “확인의 중요성에 관해선 이야기 했었지.”

 “그렇다면 나도 확인할래요.”

 시엘은 무언가 못마땅한 듯 입술을 모았다가 장난스레 눈을 굴려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나 단둘이 남고 싶었나요, 탐정님?”

 “당연히.”

 너무나도 당당한 대답에 치기 어린 말이 무색해졌다. 셜록의 시선이 장난기에서 당황스러움으로 변하는 표정을 잡아내고 그 아래의 어쩔 줄 몰라 하는 입술과 숨을 들이키는 상체를 지나서 찻잔을 들고 멈춘 손까지 뻗어갔다. 매끄러운 손길로 손에 들린 찻잔 위로 손을 겹친다. 섬세한 다기를 티테이블에 내려놓아 둔한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하나 더 있었다. 몸을 숙이면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게 되는 존재감이었다. 부드럽게 허리에 감싸이는 팔에 물러나지 못하고 어느 사이엔가 머리 뒤로 소파의 팔걸이가 닿았다. 시엘은 눈을 깜빡이며 드리우는 음영을 바라만 보았다. 오후의 그림자가 드리워 파리하게 빛나는 피부, 물빛 눈동자의 일렁임 위로 팔랑이는 속눈썹의 끝이 빛에 닿아 금빛으로 부서지는 찰나가 내리 뜬 시선 사이로 점멸한다. 파란, 사람의 모든 신경을 사로잡는 고양이의 그것과 같이 좁혀드는 눈동자가 마주친다. 파란색은 차분하게 해주는 색이라던데. 그런 것들은 전부 허구인지, 시엘은 잠시 생각한다. 호흡을 가다듬으려 숨을 들이켜기 무색하게 말랑한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멍하니 뜨인 눈이 깜빡, 빛을 달리했다.

 “자, 잠깐만요. 셜록, 나 방금 샌드위치 먹었는데.”

 “마치 식사 중에 키스한 게 처음인 것처럼 말하는군.”

 아무렇지 않게 미간을 좁히며 말하는 탓에 은은한 홍차의 향기가 숨결에 흩어진다. 분명 같은 시간을 보냈는데 어째서 그는 매번 이렇게 좋은 향기만 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코끝이 스칠 거리에서 멈춘 그가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눈을 깜빡인다. 시엘은 길들인 맹수조차도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는 법이라던 말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그 강인하고 아름다운 생물이 발톱을 숨기고 얌전히 귀를 기울인다면. 그렇다면, 그런 위험 따위 두렵지 않게 되는 게 인간이 지닌 오만의 순기능이 아닌가. 스치는 생각을 흘려보내고, 시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식사는 잘 안됐나 보군. 욕실에서 나온 셜록은 때맞춰 플랫으로 들어서는 존과 마주쳤다. 밖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가운을 걸치고 머리카락의 남은 물기를 털어내며 셜록이 턱짓했다.

 “아까 먹던 샌드위치가 냉장고에 남아있어.”

 존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불퉁한 얼굴로 냉장고로 향했다. 어떻게 알았냐는 말은 아끼고 싶은 듯했다. 냉장고에 잘 넣어둔 샌드위치와 밤잠을 도울 차를 내리면서 전직 군의관은 친구에게 말을 붙였다.

 “시엘양은?”

 “잠들었지.”

 “자기에는 이른 시간 아니야?”

 “음-.”

 돌아보는 존의 말에 셜록은 대답이라 하기엔 애매한 소리를 냈다. 궁금증을 담은 표정을 존은 채 숨기지도 못했다. 젖은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을 힐끗 보고 존은 자신의 머그잔을 내려다봤다.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무언가 깨달은 듯 입을 열고자 할 때, 셜록은 그를 내버려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은은한 차의 향기만이 고요한 플랫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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