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덕여왕 비담 외사랑 드림
※ 죽음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새주. 신라를 위해 모든 것을 움켜쥐고자 했던 나의 왕. 신라를 두고 벌인 이 내기에서 패하고 만 나의 주군.
사희는 틀리지 않은 제 예상에 떨려오는 손을 애써 붙잡았다. 단정하고도 화려한 마지막이 너무도 새주다워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알고 계셨습니까.”
“마지막으로 차 한 잔 하지 않겠습니까, 비담공.”
텅 빈 비담의 눈이 담담한 사희에게로 향했다. 울분인가 원망인가, 그도 아니면 슬픔인 건가. 사희에게는 비담 본인조차 알 수 없는 감정이 투명하게 비쳤다. 그럼에도 그의 눈이 제게 향하는 것이 기꺼워, 사희는 자조적인 웃음을 삼키며 태연히 차를 권했다.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찻주전자는 이미 식은 지 오래였지만, 조금은 휘몰아치는 감정을 가라앉혀 주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전쟁은 이미 폐하의 승리로 끝났고, 미…실은 죽었습니다. 그러니 라운도……”
“항복하라고요? 반항하지 말고?”
“예.”
좀 전까지만 해도 적나라하게 튀어나오던 비담의 감정들이 속으로 숨어버렸다.
역시, 당신은.
“예. 그럴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마지막 다과 시간을 즐기도록 하죠, 우리.”
안 그런 척하지만 비담은 그 누구보다 미실을 닮았다. 이제는 새끼 호랑이가 아닌, 호랑이가 되어 버린 비담을 보며 사희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않았다.
“라운? 진짜 다과라도 하겠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지금?”
“본디 귀족이라면 어디서든 여유를 즐길 줄 알아야 하는 법이랍니다, 비담.”
사희가 품에서 당과까지 내놓자 비담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시간 정도로 생각했는데 본격적으로 차에 간식까지 준비되자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사희는 뻔뻔한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담담한 척하였으나 사실 사희의 속은 빠르게 무너져 가고 있었다. 아무리 끝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뿐인 자신의 왕이 눈앞에서 차갑게 식어갔다. 제 과거와 현재, 미래,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인데 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새주가 새주다운 마지막을 맞이한 것처럼, 자신 또한 ‘김사희’다운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해 이 악물고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비담이 있어 주었으면 해서.
사희는 이 상황이 조금은 재미있었다. ‘미실 세력’의 1인자와 2인자가 마지막에 선택한 사람이 모두 비담이라니. 심지어 저쪽은 제 정체를 아직도 모를 텐데.
비담. 새주의 아들, 덕만의 수하. 비담은 자신과 무척이나 닮았다. 알을 깨고 나온 새끼 오리는 처음 본 사람만을 맹목적으로 쫓는다 하였는가. 자신이 그랬고, 비담이 그랬다. 제게 새주는 신념 그 자체였고, 비담에게 덕만은 삶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새주를 닮은 비담에게 제 마음이 향한 것도, 덕만을 바라보는 비담이 제 눈에 들어와 버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희는 비담은 평생 덕만을 좇을 것이며, 끝까지 제 마음을 알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지막 정도는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새주가 마지막 순간을 당신과 보낸 것처럼, 저 또한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비담은 알까. 지금 마시고 있는 이 차가 어느 날 당신이 맛있다고 홀짝이던 그 차라는 것을, 언제부턴가 당신이 즐겨 먹던 당과를 품에 지니고 다녔던 것을.
김사희의 인생은 온통 미실 뿐이었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만큼은 비담, 오로지 당신만을 담아가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