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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손에 든 찻잔의 온도가 아까와 달리 미지근한 느낌에 유키노죠는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요즘 들어 타치바나 유키노죠는 이런 일이 많았다. 티타임을 가질 때면 차를 곧장 마시지 않고, 딴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며 미지근한 차를 제 입에 대고 마는 것이다.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나 되도록이면 어떤 음식이든 먹기 적절한 때를 골라 먹는 게 음식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그는 반복되는 제 행위에 차에 대한 미안함마저 갖게 될 지경이었다. 미지근한 차를 제 입에 머금자 역시나 처음 차를 우렸을 때 기대했던 맛은 아니었다. 차는 따듯함이 느껴질 때 마시는 게 좋은데. 유키노죠가 차를 마시는 타이밍을 놓치는 건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최근 마시는 차에 느껴지는 향이 익숙하나 어디서 맡았는지 기억나지 않는 탓이었다. 익숙하나 낯선 향은 모순적이라 느껴지며 하루종일 차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유키노죠는 하나를 생각하면, 눈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라도 자신의 생각에 빠져 신경 쓰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섬세함이 없다고 표현하자면 가부키계의 프린세스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법 했으나 유키노죠는 이마저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섬세함만으로 무대를 만드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무언가 놓치는 게 있다면 레오 뿐만 아니라 에델로즈의 동료들이 도와준 탓에 살면서 문제 될 만한 일도 거의 없었다. 이번에도 차에 대해 생각하다 하루를 보낼 게 틀림없었다. 이러다 연습에 집중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누구에게든 찾아가 답을 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유키노죠의 시선은 찻잎이 담긴 틴케이스로 향했다.
음식에 관한 부분이라면 미나토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지. 하늘색에 금색박이 둘러진 틴케이스는 최근 일주일간 자신이 차를 마신 탓에 처음보다 쉽게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 말고 차를 마시는 사람은 없는 듯 싶었다. 유키노죠는 식은 찻잔을 그대로 내려놓고, 미나토를 찾아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사를 준비할 시간은 아니더라도, 미나토는 에델로즈의 식사를 담당했고 자신이 들고 온 티세트도 눈에 띄는 장소에 곧장 있었으니 평소 모두의 입맛을 고려해 식사를 만드는 그라면 분명 찻잎도 유키노죠를 위해 잘 보이는 장소에 둔 게 틀림없었다. 다른 사람을 떠올리려고 해도 미나토만큼 센스가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니 전체적으로 음식과 주방을 담당하는 그를 찾는다면 주방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단순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 미나토, 있나? ”
하지만 일이 쉽게 풀릴 예정은 아닌지 주방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점심을 먹은지 한참 지난 시간이었으니 당장 사용한 흔적도 없어보였다. 그렇다고 저녁 먹을 시간도 아닌 탓에 식재료 준비를 하는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다. 장을 보러 갔나? 차라리 계단 근처에서 그를 기다리는 게 나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어진 생각은 프리즘쇼 연습을 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개인적인 일로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으나 유키노죠는 미나토의 개인적인 일정을 알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굳이 그가 아니더라도 에델 로즈의 사람들과 서로의 일정을 공유하며 지내는 사이도 아니고. 유키노죠의 발걸음은 주방 안을 맴돌다 연습장을 찾아갔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어디든 가는 게 나을 일이었다. 식은 찻잔에서 그가 느꼈던 향기는 점점 옅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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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 …아, 카케루. ”
“ 어라, 쨩유키~? 연습하러 온 거야? ”
“ 아니, 미나토를 찾으러 왔어. ”
“ 미나톳치? ”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연습실 안에 있던 카케루의 행동과 시선은 자연스레 문쪽으로 향하였다. 미나토를 찾으러 왔다는 유키노죠의 말에 먹고 싶은 저녁메뉴라도 떠오른 거야? 장난스런 목소리를 담아 말하였으나 유키노죠는 단호하게 아니라 답하였다. 카케루의 말과 유키노죠의 반응은 익숙한지 서로 어색한 기류 없이 마저 대화를 이어갔다. 한참 연습한 흔적이 남아 카케루는 수건으로 제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낸 후, 유키노죠에게 다가갔다.
“ 무슨 일인데? ”
“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
그렇게 말하는 유키노죠의 시선은 카케루를 향해 있었다. 연습실 안에 찾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안 이상 걸음을 금방 옮기기 마련인데, 유키노죠의 발걸음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나톳치를 급하게 찾아야 하는 거 아냐? 하며 물어본 카케루였으나 말없이 자신을 한참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자신의 질문을 듣기도 전, 유키노죠는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듯 싶었다. 이마저도 익숙한지 카케루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서있는 채였다. 유키노죠의 생각은 복잡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카케루가 답을 알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는 매번 다양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일 때문에 티타임을 갖는 시간도 많을테니 미나토를 찾아가는 것보다 그에게 당장 묻는 게 원하는 답을 얻을 만한 방법 같기도 했다. 유키노죠는 자신의 생각을 끝냈는지 평소와 같은 얼굴이지만, 왠지 비장한 분위기로 카케루의 어깨를 붙잡았다.
“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카케루. ”
“ 나, 나? 미나톳치가 아니라…? ”
방금 미나톳치를 찾는다고 했잖아? 카케루는 찾는 대상이 정해져 있다면 대화의 주제도 분명 대상과 관련된 이야기라 생각했으나 곧장 저에게 오는 질문에 순간 당황한 얼굴을 짓고 말았다. 게다가 제 어깨에 힘을 주는 손이 그가 꽤 진지하다는 건 금방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러지? 혹은 자신에게도 질문이 있던 건가?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었나? 온갖 의문이 들어도 상대는 다름 아닌 타치바나 유키노죠였다.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라도 알기 어려운 사람에게 추측이란 건 큰 의미가 없었다. 결국 카케루가 할 수 있는 건 유키노죠의 말을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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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차에서 나는 향기가 어떤 향인지 아냐고…? ”
“ 그래. ”
하늘색의 틴케이스를 카케루는 손에 들고 유키노죠를 바라보았다. 차의 종류를 보아 오렌지향이 나는 찻잎인 건 알겠는데… 유키노죠가 원하는 답은 차의 향기가 어떤 향인지에 대한 답이 아닌, 주변에 차의 향과 비슷한 향이 나는 존재를 아는지에 대한 대답이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걸 미나토에게 물어보려고 한 거야…? 단순히 차에 대해 묻는 게 아니라 주변에 대해 관찰력이 높은 사람에게 묻는 게 좀 더 좋을 것 같은데… 카케루의 머릿속에 온갖 물음이 지나갔으나 심각한 얼굴을 하며 틴케이스를 바라보는 유키노죠의 얼굴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보다 이걸 들고 온 사람은 유즈쨩이잖아. 혹시 모르나? 하긴, 유즈루도 식품에 관련된 물건이라면 다른 사람들보다 미나토에게 먼저 권했을 게 뻔한 일이었다. 이 찻잎을 선물할 때, 우연히 옆에 있던 건 카케루 본인 뿐이었으니 유키노죠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은 모를 만한 일이었다. 그치만 선물해준 사람이 그녀라는 걸 알아도 유키노죠가 차에서 나는 향을 어디서 맡았는지 카케루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차가 담긴 잔에 향을 맡아도 유키노죠가 처음 차를 우렸을 때에 비해 훨씬 약해진 향은 카케루의 입장에서 더더욱 알기 어렵기만 했다.
“ 쨩유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건 알기 어렵다궁~ ”
그런가? 카케루의 말에 또 혼자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려고 하는 유키노죠를 보고 카케루는 얼른 말을 다시 이어갔다. 그러지 말고, 유즈쨩에게 물어보면 어때? 이거, 유즈쨩이 선물해준 차거든~ 유즈루가? 웅, 이거 아마 시도 회사에 내놓은 제품일걸? 계속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 유키노죠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알려줘서 고마워. ”
짧은 답을 남기고 유키노죠는 정답을 내리기 위해 등장한 또다른 사람을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득 든 생각에 한 발자국 움직인 걸음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하지? 생각해보면 유즈루를 찾기 위해 유키노죠가 직접 나선 적은 거의 없었다. 찾기도 전에 이미 곁에 있던 나날이 익숙해 찾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 유키노죠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곧장 휴대폰을 꺼내 연락을 넣었을 상황이지만, 유키노죠는 제 휴대폰에 그녀의 전화번호가 있다는 사실조차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곁에 있었는데, 연락을 넣기 위해 전화번호를 찾는 일이 있었을리가 없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휴대폰을 누르는 유키노죠의 손은 또래에 비해 느린 편이었다. 차라리 카케루에게 부탁해 연락을 취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원하는 답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느낌에 유키노죠의 마음은 가벼워진 참이었다. 유키노죠의 입에서 카케루의 이름이 나오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실례합니다~ 타치바나씨 있어요~? ”
문이 열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나타난 건 바로 유키노죠가 찾고 있던 시도 유즈루였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다며 카케루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익숙한 향이 유키노죠의 코 끝에 닿아 유키노죠는 작게 소리를 내었다. 이거… 그의 반응에 카케루와 유즈루는 고개를 기울여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움직인 카케루는 순간적으로 느껴진 향에 별 말 없이 그의 반응을 눈치챈 듯 했지만, 유즈루는 자신이 들어오기 전 있었던 일에 대해 알 리가 없어 두 사람을 따라 시선만 움직이고 있었다. 유키노죠는 금방 걸음을 옮겨 그녀의 앞에 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답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자신은 얼마나 헤맸는지. 언제나 제 곁에 있을 것이란 생각이 오히려 그 사람의 존재를 잊을 수도 있구나. 이미 식어간 차의 향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자신이 찾고 있던 향은 익숙하게 제 곁을 맴돌았다.
내가 찾아 헤맨 이 향은 너의 향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