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 사교계에 새로이 떠오르는 부호, 레이디 페레라는 홍차에 설탕 두 스푼을 넣어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는 교외에서 요양을 하다가 가까운 집안 어른이 죽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참이었다. 상속받은 재산에 관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런던행을 결심한 페레라는 넘실거리는 바다와도 같은 인파에 놀랄 시간을 제대로 갖지도 못하고 온갖 모임에 참석해야만 했다. 죽은 부호가 남긴 재산들 중에는 사업체도 꽤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경영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던 것이다. 노소를 불문하고 런던에서 한가닥 한다는 경영인들이 갓 성인이 된 상속녀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넣어 일정을 묻고 약속을 잡았다.
페레라와 티타임을 가질 기회를 얻은 경영인들 중에는 이제 막 중년 축에 들기 시작한 남성이 한 사람 끼어 있었다.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로 편지를 보냈는데, 이름 없는 편지를 페레라에게 전달해준 사람이 꽤 거물이라 다른 이보다 손쉽게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페레라는 그를 그저 ‘N’이라고만 불렀다.
“날씨가 좋네요, 그렇죠?”
“두말하면 서운할 정도로 그렇습니다. 스트랜드 가는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네요. 이전까지 계속 요양 중이셨다고 들었습니다.”
페레라가 말문을 열자, N이 정중한 말투로 대답했다. N은 전형적인 상류층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페레라와 비슷한 어조였다. 페레라는 습관대로 홍차에 설탕을 두 스푼 넣어 빙빙 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트랜튼 가가 그렇게 마음에 들 줄은 몰랐답니다. 그곳에 제 소유의 건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자랐으니 당연하겠지만요.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에요.”
페레라가 대답했다. N이 간단히 맞장구를 쳐줬다. 레이디 페레라는 부족함 없는 집안에서 자라 갑자기 많은 돈을 상속받게 된 아가씨의 전형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교육받은 대로 날씨 같은 주제를 꺼내 대화를 시작하지만, 새로 생긴 재산을 자랑할 기회가 생기면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차를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신 레이디는 자신이 재산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랐는지, 곧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제가 아는 어떤 명망 있는 어른께서 말씀하시길 N께서 이 가게들에 도움을 줄 의향이 있으시다던데요. 솔직히 말해 처음엔 믿지 못했어요. 약속을 잡은 건 순전히 편지가 크게 불쾌하지 않아서예요.”
“네, 편지에 자세히 쓰지 못한 점은 대단히 죄송합니다. 사업에는 신뢰가 중요하니까요. 만나 뵙고 설명드리고 싶었습니다.”
“괜찮아요, 이해한답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아 보이는 N을 보면서, 페레라가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신뢰란 재산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아니겠어요? 제가 N의 눈에 보기에 믿어 볼 만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네요.”
“레이디를 평가하기 위해 만남을 청한 건 아닙니다. 그저 만전을 기하려는 의도니 개의치 마시기 바랍니다, 페레라 양. 저의 제안은……”
*
에스더 리베라는 런던 암살단의 유일한 ‘일반’ 암살자였다. 암살단의 런던 지부는 크로포드 스타릭의 죽음 이후에도 소규모로 유지되고 있어서, 마스터 암살자 세 명에 에스더 리베라까지 네 명이서 넓은 런던을 전부 관리하는 중이었다. 제이콥과 이비가 정비한 갱단 ‘루크스’는 신조니 훈련이니 하는 문제도 있고, 엄밀히 말해 ‘이비와 제이콥 프라이 및 그 동료들’의 편이지 ‘암살단’의 편은 아니었다. 런던이 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암살단 수뇌부는 추가 인원 파견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런던 암살단 입장에서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런던 수복을 목표로 삼은 템플 기사단이 상류층에 마약을 풀기 시작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면 수뇌부를 향한 두통은 더욱 커지곤 했다. 만성적 인력 부족이 어느 때보다 크게 빛을 발했다. 런던을 끊임없이 순회하는 암살단의 열차 안에서, 마스터 암살자들이 에스더를 데리고 술과 차를 적절히 섞은 대화의 장을 마련한 이유도 이런 상황에 있었다.
“밀수품을 막을 수는 없어요? 대량으로 들여오려면 기차나 배편, 둘 중 하나잖아요. 그쪽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끊어 나가면요?”
에스더가 홍차를 담은 찻잔에 손가락을 감으며 물었다. 어린 암살자의 맞은편에 제이콥 프라이, 오른편에 이비 프라이, 이비의 맞은편에 헨리 그린이 앉아 있었다. 제이콥의 자리 앞에만 맥주병이 놓였고, 나머지는 전부 차를 마셨다. 설탕이나 우유는 없었다. 느긋한 목적의 티타임이 아니었을뿐더러 자리에 앉은 누구도 설탕이나 우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헨리 그린이 에스더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부터 신경을 써서 유통망을 잔뜩 조여 볼 수는 있겠지만, 이미 꽤 많은 양이 런던에 들어왔어. 우리의 눈을 피하려고 조금씩 들여온 후 런던을 헤집기에 충분한 양이 될 때까지 숨겨뒀나 봐.”
“그게 풀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약물이 상류층에 풀린다고 했으니, 의원들과 장관들이 중독될 수 있지. 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약을 얻기 위해 기사단의 편의를 봐주기 시작하면 수습이 어려워져.”
에스더는 헨리에게 질문했지만, 대답은 이비에게서 돌아왔다. 제이콥이 반 습관적으로 다 쓸어버리는 해결책을 내려다가, 그렇게 해서 끝날 일이 아님을 아는지라 말꼬리를 흐려버렸다. 헨리가 눈치를 보더니 몸을 슬쩍 앞으로 기울였다.
“들어봐. 스타릭의 블라이터스가 거의 박멸되다시피 했고, 유통망도 기사단 소속이 아닌 데다 기사단의 위장 기업들을 할 수 있는 한 없앴으니 기사단이 상류층에 원활히 약을 유통하면서 추후에 사용할 자금도 받아내려면 새로운 방법을 찾을 거야.”
“그 방법이 뭔지 알아냈다는 눈치인데.”
이비가 넌지시 물었다. 헨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 가운데로 내밀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레이디 페레라야. 레이디라곤 하지만 사실 귀족 집안은 아니고 작위도 없어. 최근 사업체를 몇 개 상속받고 어제 막 런던으로 올라왔지. 주로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인데, 독자적인 유통망도 작지만 존재해. 템플 기사단에서 아마 이 여성에게 접촉하려는 것 같아. 암살단이나 기사단의 존재를 모르는 민간인으로 보이고. 기사단원들은 사업이 처음이니 매출을 올리게 해주겠다며 이미 들여온 약들부터 기존의 제품에 섞어서 팔 생각을 하겠지. 매출이 크게 상승한 걸 레이디 페레라가 알게 된 시점이면…….”
“그 유통망을 사용해서 약을 더 들여올 생각을 하겠네요.”
“그건 당연한 이야기지, 에스더. 당연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 거슬릴 수도 있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말이야…… 레이디는, 적어도 우리가 아는 바로는, 아직 템플 기사단이니 암살단이니 하는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신조에 따라 레이디나 휘하 사람들을 마냥 때려부술 수도 없다는 사실이야. 잘 했어, 그리니.”
제이콥이 씩 웃으며 헨리에게 눈짓을 하더니, 맛 없는 맥주를 몇 모금 더 마셨다.
*
“마법의 가루요?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물론 믿지 못하실 수도 있겠지만, 런던 밖에서는 몇 번 사업을 성공시킨 적이 있습니다. 가루 자체를 판매하라는 제안도 아니에요.”
N은 여유있게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조곤조곤했고, 발음은 정확했다. N은 티타임에서 허용된 모든 방법을 사용해 신뢰와 주목을 끄는 중이었고, 레이디는 사교에 능숙한 사람답게 N보다 케이크에 더 관심이 있는 척 했다. 선연한 붉은빛이 드러난 딸기 생크림 케이크의 정교한 생크림 문양에 시선을 고정하고, 완벽한 모양의 케이크를 어떻게 망가뜨리느냐에만 관심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이건 조미료 같은 거랍니다. 향신료 같은 종류 말이에요. 후추나 설탕처럼 맛을 더해주지는 않지만, 대신 심신에 안정을 가져다주고 두통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어 꼭 다시 찾게 됩니다.”
“왠지 의약품에 더 가까워 보이는 설명인데요.”
“하지만 의약품은 아닙니다. 근본적인 병을 치료하지는 않거든요. 그저 먹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게 할 뿐입니다. 먹는 사람에게 평안을 가져다주는 음식을 파는 겁니다. 매출이 상상 못할 정도로 올라갈 거예요.”
페레라는 잠시 말을 아끼며, 잘게 자른 케이크와 홍차를 입에 넣었다. N은 잠깐의 대화 끝에 페레라가 케이크에 정신을 팔면서도 자신을 심심치 않게 바라봐 주며 대화의 주제도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했고, 이에 자신감을 얻어 더 은근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로서는 제조량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이 가루를 넣은 상품들을 고급화시켜서, 특별한 몇 분들께만 먼저 제공하는 겁니다. 귀족들과 의원들, 그리고 궁에 출입하시는 분들을 중심으로 구매층을 늘려가면서 모인 돈으로 생산량과 단가를 낮출 수 있습니다.”
“제가 상속받은 것들 중 배 몇 척과 작은 운수 회사 한 곳도 있던데요. 그곳을 이용해서 유통량을 늘릴 수는 없나요?”
“물론 가능하지요, 레이디. 레이디의 유통망이면 충분합니다.”
*
기차에 타고 있는 루크스는 없었다. 심지어 나이젤도 나갔다. 암살단의 갱들은 이미 런던 전역에서 밀수품을 지고 오는 블라이터스를 찾아 막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비록 목표가 ‘밀수품’보다 ‘블라이터스’에 가까워 보이기는 했지만. 기차에는 아그네스도 없었다. 아그네스는 식료품을 사기 위해 채링 크로스에서 내렸고, 기차가 런던을 한 바퀴 돌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었다.
기차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곤 이비 프라이, 제이콥 프라이, 헨리 그린, 에스더 리베라의 네 명이 전부였다. 네 명은 30분째 레이디 페레라에 대한 대책으로 티타임을 불태우는 중이었는데, 에스더의 잔이 한 번 비어서 제이콥이 채워준 일을 제외하면 잔이 비는 일이 않았다. 모두가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디즈레일리 부인이 레이디 페레라를 안다고 했어.”
이비 프라이가 말했다. 영국의 수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벤자민 디즈레일리와 그 부인인 메리 앤 디즈레일리는 암살단과 프라이 남매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니, 메리 앤을 통해 미리 접촉하면 어떻겠냐는 뜻이었다.
“그러면 그 부인을 통해 레이디 페레라의 일정을 알아내면 어때? 머무르는 곳의 주소만 알아내도 일정표나 편지들을 볼 수 있을 테고.”
제이콥이 아무렇지도 않게 가택 침입을 제안했다. 생각해낼 수 있는 방식 중 가장 온건한 축에 드는 것이라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시민을 직접 해칠 수야 없지 않은가.
“일정을 알아내면 템플러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지는 알 수 있겠네요. 그 장소에 미리 가 있다가 그자를 납치해서 본거지를 알아낼 생각인가요? 기사단원도 문제지만, 마약도 문제잖아요. 본거지를 꼭 알아내야죠.”
에스더가 합당한 질문을 제시했다. 만나는 시각, 사람, 장소를 아는 것과 본거지를 아는 건 다르다. 마약이 제시된 창고도 페레라와 기사단원의 만남을 막는 것만큼이나 중요했다.
“방금 생각난 게 하나 있는데.”
헨리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헨리는 에스더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그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레이디 페레라는 키가 1미터 하고도 60센티미터고, 약간 마른 체형이라고 해. 다소 작은 두상에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고 특이한 점 하나 없다고 하더라.”
“네, 초상화만 봐도 그런 느낌이네요. 그래서……?”
에스더는 다소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비는 다소 크지.”
이비와 제이콥이 단번에 헨리의 말을 이해하고서 에스더를 쳐다보았다. 에스더는 한 박자 늦게 방법을 깨달은 후 다소 창백해진 안색으로 외쳤다.
“난 못 해요! 레이디 페레라가 계약을 거절하거나, 조금 다른 낌새를 보이는 즉시 죽일 게 뻔하잖아요. 게다가 기사단이 혼자 오겠냐고요. 주변에 블라이터스니 다른 템플러니 하는 사람들이 많겠죠. 드레스를 입고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면서 상대의 눈에 띄지 않게 주변을 청소한다는 발상부터가 말이 안 돼요. 연막탄을 뿌릴 수도 없고.”
끼어들 틈 없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에스더는 중간에 큰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말을 쏟아냈다.
“제가 레이디 페레라 역을 하게 되면 분명 드레스를 입어야 할 건데…… 드레스를 입으면 잘 싸울 수도 없어요. 드레스에는 주머니도 없고 벨트도 못 차니까 던질 연막탄이 없을 수도 있겠네요. 쿠크리는 고사하고 너클이나 총도 하나 못 숨겨요. 단검 세 개 정도는 가능하려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남았는데요, 제가 레이디 페레라랑 닮은 것도 아니잖아요.”
“닮았어.”
에스더가 두 번째 심호흡을 위해 멈추는 순간에 제이콥이 간신히 끼어들었다. 에스더는 평소 제 스승들에게 절대 하지 않는 눈빛을 하고 제이콥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닮았는걸. 모자나 보닛 없이도 쉽게 넘어갈 거야. 그리고, 정말 우리가 무기도 없이 혼자 보낼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나랑 이비가 다른 사람들을 처리할게. 너는……”
“적당히 수락하는 척 하면서 유통망 이야기를 해.”
에스더의 행동방침을 말해줘야 할 시점에서 제이콥은 이비를 바라보았다. 쌍둥이의 눈치로 제이콥의 어물거림을 알아들은 이비가 귀신같이 말을 채갔다.
“먼저 말을 꺼내도 좋지만, 기사단의 유통망이 망가진 건 사실이니 상대가 넌지시 이야기할지도 몰라. 어느 쪽이든 레이디 페레라가 가진 유통망 이야기를 하면서, 재고가 어디 있고 어떻게 들여오면 되는지 물어봐.”
“순순히 알려줄까요?”
“그러기를 바라야지.”
“그러면 진짜 레이디 페레라는요?”
제이콥이 의자 뒤로 한껏 기대더니 탁자 위로 다리를 올려놓았다. 막 대답하려던 이비가 그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제이콥은 자신만만한데다 유쾌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에스더에게 대답했다.
“레이디는 내가 알아서 모실게.”
“소란 피우면 안 돼.”
“그 정도야 당연하지.”
제이콥의 손가락이 가슴 위로 십자가를 그리며 지나갔다. 루시 쏜의 마차를 습격하는 일에 끼워달라며 하던 몸짓과 똑같아서, 이비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일이 커지면 안 돼.”
“조심해서 처리할게.”
*
레이디 페레라, 다른 말로 에스더 리베라는 N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주위 환경을 살피고 있었다. 암살자의 우월한 감각과 시선은 다듬어지지 않은 에스더도 벽 뒤와 건물 위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게끔 만들었다.
웨스트민스터 한켠에 있는 야외 살롱은 N과 에스더의 만남을 위해 전부 비워진 상태였다. 살롱 주변을 네모 형태로 둘러싼 건물 위에 사람들이 있었다. 지붕에만 총 여섯 명이 있었지만 이야기하는 중에 여덟로 불어나더니, 곧 둘로 줄었다.
남은 두 명은 에스더가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쉽게 다량을 유통하려면 그 창고의 위치를 알아야 해요, N. 제가 소유한 창고는 이미 여유가 없고, 확충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니까요. 당신께서 호언장담한 그 성장률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이제 와서 창고를 사들이기엔 늦은 것 아시잖아요.”
N은 뒤통수를 맞은 표정을 지었다. 레이디 페레라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놀란 것이다. 미미한 변화였지만 에스더 리베라는 표정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함께 일할 사이잖아요. 아니면 그렇게 많은 양이 유통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중인가요? 자신이 없으신 거군요.”
“자신이 없기는요, 레이디 페레라.”
“아니면 저를 못 믿으시나요? 저를 못 믿더라도 제 유통망은 믿으셔야 할 거예요. 제 사람들은 N의 생각보다 일을 잘 한답니다.”
N은 난감한 눈빛을 보였지만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그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도와줄 동료를 찾는 몸짓이었다. N은 프라이 쌍둥이가 주위를 정리하고 시신까지 전부 숨긴 일을 모르고 있었다. 레이디 페레라와 동맹 관계를 굳건히 하고, 레이디가 유통한 가루가 마약임을 알려 협박하고, 유통망까지 확실히 손에 넣은 후에야 창고 위치를 알려줄까 싶었던 계획을 수정하는 N을 에스더가 가만히 쳐다보았다.
“좋습니다, 레이디. 우리는 동업자니까요.”
N은 두 번 접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물건은 그 창고들에 있습니다. 당장 팔 정도의 양은 될 겁니다. 런던 밖에 조금 더 있고요. 들여오는 날짜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니, 추후에 알려드려도 되겠습니까?”
날짜 정보는 헨리가 이미 입수한 것이었다. 에스더는 종이를 펴본 후 주소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저를 믿어주셔서 고마워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제 한 배를 탄 사이인데요. 그럼 계약서를 쓰고 싶은데요, 레이디. 아까 설명드린 단가와 양은 확정하는 쪽으로 결정하시는 거겠죠?”
에스더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고 위치도 다 알려주셨으니 그 조건은 수정하지 않도록 할게요. 계약서를 쓸 일이 있을까봐 도와주실 분들을 모셔왔는데, 소개할 때가 된 것 같네요.”
“도와주실 분들이요?”
“아주 명망 높으신 분들이죠. 이런 일들을 많이 다뤄보신 분들이기도 하답니다. 제가 아직 어리니 법적 처리나 기타 어려운 일에 대해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자문을 구하셨군요. 레이디 페레라의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에스더의 귓가에 미약한 소리가 잡혔다. 암살자 장갑에서 작은 장치가 발사되어 건물의 꼭대기에 고정되는 소리였다. 프라이 쌍둥이가 살롱의 정자 위 상공에 줄을 걸고 매달려 있었다.
“그러면 소개하도록 하죠, 신사분.”
에스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N도 따라 일어났다. 에스더는 반격할 무기도 없는 상태에서 공격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사람을 부르려는 자세로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N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이콥 프라이 경과 이비 프라이 여사님이랍니다.”
동시에, 준비를 마친 제이콥과 이비가 떨어져 내려 N을 덮쳤다. 테이블이 엎어지면서 채 먹지 못한 케이크가 바닥에 뿌려졌다. 잔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제이콥이 N을 제압할 동안 이비는 에스더에게 쪽지를 건넸다.
“분명 창고‘들’이라 했는데, 여기엔 주소 하나밖에 없어요, 이비. 그러니까 죽이지 마요, 제이콥! 스승님들! 그 사람 잡고 더 캐물어야 해요. 이 주소에서도 누구 한 사람 납치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드레스 차림이라 못 움직…… 네, 스승님, 언제나 빨리 사라지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