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와 여자가 어느 카페의 한 테이블에 서로 마주 앉은 지 20분이 지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지만 그건 연애초기와 같은 간질간질한 긴장감 같은 게 아니었다. 적어도 둘 다 그런 공기는 전혀 없음을 서로 잘 이해하고 있었다.
“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었어? ”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마츠다 진페이 쪽에서 입을 먼저 열었다.
“ 별로 특별히 할 말이 있었던 건 아니야. ”
“ 뭐? 남의 시간을 뺏어놓고 할 말이 있었던 건 아니다? ”
마츠다 진페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묻자 그녀는 왜 그가 그리 화가 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지금 처음 대화해보는 걸텐데, 이렇게 차 한 잔 할 정도로 친했었나? ”
그의 질문에 그녀는 그제야 그가 왜 황당한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하며 대답했다.
“ 네 기억이 맞아. ”
“ 그렇다면 왜 내가 모처럼의 휴일에 너와 어울려줘야─ ”
그러나 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그녀의 이어진 대답 때문이었다.
“ 그래서 이제부터 친해져보려고. ”
“ ……뭐? ”
“ 친구가 되자는 말이야. ”
마츠다의 표정은 황당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사고가 멈췄다. 고백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담백한 말과 표정으로 보아, 아마 이건 ‘연인’을 전제로 친구 사이부터 단계를 밟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남자를 꺼려하는 걸로 유명하지 않은가.
“ 너, 혹시 사람을 착각한 거 아냐? ”
“ 한 번 본 사람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기억해. 너희들의 경우, 그 정도로 시끄럽게 구는데도 모를 정도로 둔감하다면 경찰 그만두는 편이 좋지. ”
신랄하게 내뱉는 말에 악의는 없었다. 자신의 기억력을 과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로 그가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는 뜻이었다. 마츠다는 자기가 해온 행동이 얼마나 눈에 띄는 것이었을 지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대답에 의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 친해져서 뭐하려고? ”
무엇 때문에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제안해오는 것인지 궁금했기에 그는 그녀의 제안을 곧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수긍하지도 않았다. 친구라는 것이 친구가 되자는 선언으로 만들어지는 것일 리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마츠다는 그녀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선물을 하고 싶어서. ”
“ 선물? ”
그녀는 가방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고급스러워보이는 다과 세트를 내밀었다. 안이 비치는 반투명의 포장지 위로 리본이 장식되어있었다.
“ 집에 가서 가족들이랑 함께 나눠먹도록 해. 그럼 시간 내줘서 고마워. 다음 주말에 또 여기서 같은 시간에 보자. ”
마츠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과자에 잠시 독이 들었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상대에게서 악의를 느끼지 못했을 뿐더러 일개 학생이 독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오히려 그녀가 자신과 함께 다니는 친구들 중 하나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녀가 접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이 그나마 가능성이 큰 얘기였다.
* *
마츠다는 그 날 이후로 자신에게 꽂히는 강렬한 시선 하나가 있다는 것에 눈치챘다. 호의나 악의가 담긴 시선은 아니었으나 무슨 의도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는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보면, 상대방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연스레 그의 시선을 피했다.
“ 안 그래, 진페이 쨩? ”
무언가 말을 쏟아내던 하기와라 켄지는 마츠다가 다른 곳으로 시선이 가있는 것을 보고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여자동기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하기와라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해왔다. 단 한 명만 빼고.
“ 하기와라 군! 이따가 미팅 잊지 마! ”
“ 물론이지. 꼭 갈게. ”
가볍게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어주던 하기와라는 여자동기들이 시선을 돌리고서야 손을 내리며 말했다.
“ 리나 쨩은 여전히 이쪽을 봐주지 않네. ”
센도 리나. 그녀는 선배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알려져있을 정도로 뛰어난 외모를 가진 동기였다. 그러나 그녀가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법은 없었다. 기껏 해봐야 고백을 차갑게 쳐내거나 훈련 및 실습을 할 때에 필요한 사무적인 대화들 뿐이었다. 여자동기들과 제일 사이가 좋은 하기와라마저도 그녀에게는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 마츠다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주말 약속을 잡고는 친구가 되자며 멋대로 선물을 쥐어주고간 장본인이었다.
“ 그런데 웬일이야? 진페이 쨩이 여자한테 관심을 다 갖고. ”
“ 응? 마츠다가? ”
다테 와타루가 처음 듣는 얘기에 되물었다. 하기와라의 얘기를 한 귀로 흘려듣던 후루야 레이도 어느 새 두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 아까부터 내가 하는 말도 못 듣고 저쪽을 계속 쳐다보고 있더라고. 진페이 쨩은 누가 취향이야? ”
아까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던 여자동기들의 이름을 하나씩 거론하면서 마츠다에게 물었으나 그는 잘못 짚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 그런 거 아냐. 시선이 느껴져서 쳐다봤을 뿐이야. ”
“ 그래? ”
하기와라는 언제나 여자동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자신이 여자동기들 쪽을 쳐다보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던 여자애들 때문에 마츠다가 반대편을 본 것이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후루야만이 한참을 마츠다의 시선 끝에 있었던 이들을 쳐다보다가 친구들이 이름을 부르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또다시 주말이 찾아왔다. 마츠다는 자신이 굳이 그녀의 말에 따라줄 이유가 없음을 알았다. 아쉬우면 자기가 먼저 이유를 설명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번에는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비가 오지만 않았다면.
휴대폰 번호나 메일을 교환한 것도 아니었고 서로의 기숙사방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가 누구와 자주 어울리는 지조차 모른다. 여자동기들과는 사이가 좋은 편으로 보이지만 애초에 마츠다가 여자동기들에게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데다가 훈련이나 연습을 할 때에도 그녀와 수업이 겹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 젠장! ”
마츠다는 서둘러 우산을 들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 * *
리나는 빗줄기가 내리는 것을 보고 테라스에서 카페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꽤 기다렸음에도 마츠다가 오지 않자, 오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해지고 싶은 남자동기가 있다고 친구한테 상담해서 조언해준 대로 했는데 아무래도 실패였던 모양이다. 조언을 해준 친구에게도 괜히 미안해졌다.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바깥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서 리나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기로 했다. 비가 온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마츠다가 시간 안에 왔다면 일찍 들어갈 예정이었기에 우산이 필요하지 않았다. 때마침 우산이 망가진 것뿐이어서 나온 김에 사가지고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될 줄 몰랐기에 그녀가 집에 가기 위해서는 비가 멈추길 기다리던가, 아니면 비를 뚫고 집까지 뛰어가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그 때, 바깥에서 우산을 들고 달려가다가 넘어진 어린이가 눈에 들어왔다. 리나는 벌떡 일어나 비가 내리는데도 아이를 세우고 우산을 씌워주었다. 아이는 곧 울음을 터뜨렸고 곧이어 뒤에서 엄마로 추정되는 인물이 뛰어왔다. 아이의 어머니가 리나에게 고맙다며 우산을 같이 쓰겠느냐고 권했으나 리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자신의 꼴이 눈에 들어왔다.
“ 아… 이 상태로 카페 안에 들어가면 폐가 되겠지. ”
카페 안에는 리나의 가방이 있었고, 가방에는 오늘 마츠다에게 전달해줄 선물이 들어있었다. 이번 역시 가족들과 꼭 ‘함께’ 먹어줬으면 하는 선물이었다.
비가 많이 오기 시작하자 열려있던 카페문을 닫으려고 잠시 나왔던 직원이 리나의 꼴을 보고 놀라 괜찮으냐고 물었다. 리나는 자신의 짐만 잠시 맡아줄 수 없겠냐고 양해를 구하고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다행히 기숙사 키는 안주머니에 넣어둔 상태였다.
“ 하아, 하아. ”
그런데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마츠다가 놀란 얼굴로 자신의 앞에 서있는게 아닌가.
“ 마츠다? ”
그는 자기에게 우산을 씌워주면서도 굉장히 화가 난듯 무서운 얼굴로 리나에게 소리쳤다.
“ 이 바보야! 비가 와도 안 오면 기다리지 말았어야지! ”
아마 마츠다는 비가 오는 와중에도 리나가 홀딱 젖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 착각한 모양이었다. 리나는 그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으나 말을 하기도 전에 재채기가 먼저 튀어나왔다.
“ 택시 불렀으니 우선 돌아가자. ”
“ 하지만 이렇게 젖은 상태로는- ”
“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
마츠다는 리나의 손을 잡고 택시의 뒷문을 열고는 자기의 외투를 뒷자석에 깔았다. 그리고는 리나를 그 위에 앉히며 자기는 반대로 돌아 반대쪽 뒷자석의 문을 열며 올라탔다. 돌아가는 내내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의 손이 오늘따라 유난히 뜨거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P.S
리나가 마츠다 진페이랑 친해지고 싶어하는 이유는 마츠다 진페이의 아버지 팬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갑자기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사라지게 된 걸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감기 걸려서 다음날 수업에 못 나온 리나에게 마츠다가 문병을 가는데… 그 이후의 얘기도 언젠가 풀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