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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계와 산옥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법이 있다면 둘만이 갖는 티타임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특별히 맛있는 다과를 즐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적설차 하나만 있어도 둘은 충분해 보였다. 그렇다고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가끔은 아무 말 없이 차만 홀짝이기도 했다. 평소 둘 사이에 말을 주로 거는 산옥조차 티타임 중에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팔계는 처음 산옥과 차를 마실 때부터 그가 조용했기에 익숙해졌지만 가끔 둘 사이에 껴서 차를 마신 오공과 오정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이러한 상황에서 팔계가 어떻게 지루해하지 않는지 그들은 궁금했다.

 처음 산옥은 일행들과 함께 하는 티타임에 자주 끼지 않았다. 차를 마시고 싶으면 혼자 마시곤 했다. 그런 그를 보다 못한 팔계가 산옥을 일행들 사이에 섞일 수 있게 도왔는데, 나중에 들으니 어색했던 것도 있었지만 그를 향한 연심을 참을 수 없어 자리를 떠 버렸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혼자 차를 마시고 있던 산옥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보는 것 같더라니 그런 이유였나. 서로가 미묘한 감정을 갖기 시작할 즈음, 팔계는 산옥만 즐기던 티타임에 끼어들었다. 그래. 이건 끼어들었다고 표현하는 게 적합했다. 산옥은 조금 놀라더니 이내 제 맞은편을 가리켰다. 그렇게 둘이 함께 하는 티타임이 시작됐다.

 여느 때처럼 둘은 차만 마시고 있었다. 날이 좋아 창가에 있던 팔계 쪽으로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팔계는 찻잔에 시선을 두고 있었고, 산옥이 우린 차가 맛있는지 옅게 웃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를 향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 산옥을 제 옆에 둔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에게로 완전히 다가오기까지 고된 순간을 몇 번이고 지나갔다. 물론 초기에는 산옥 마음을 알지도 못했겠지만. 역시 그 이유는 호의였을까. 산옥이 입을 열었다.

 “내 사랑.”

 팔계는 한 번도 산옥이 입에 올린 적 없는 호칭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산옥은 서글픈 듯, 애틋한 얼굴로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나는 꽤 오랜 시간 팔계 씨가 준 다정에 중독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긴 시간을 사랑했던 거겠지. 만약 팔계가 조금이라도 냉정한 이였다면 그런 일은 없었으리라 생각한 산옥이었다.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지만 전과는 다른 정적이었다. 이번에는 팔계가 산옥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빈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랐는지 산옥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당신이 내 다정에 중독됐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오히려 내 쪽이 당신 다정에, 강인함에 중독됐다면 모를까.”

 “대체 어디가 그래요. 난 누구보다 잔인하고 냉정했는데.”

 팔계는 고개를 저었다. 산옥이 잔인함을 가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팔계와 달리 처음부터 요괴 피를 가지고 태어난 순수 요괴인 산옥은 일행들 중에서 제일 무자비했다. 적들과 싸울 때 그런 성향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팔계는 산옥을 꽤 오래 보면서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본인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누구보다 냉정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지내왔다. 그것도 모자라 제 감정을 억누르며 버텼다. 보통은 감히 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절대 누구에게든 폐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팔계는 생각해 왔다. 게다가 산옥은 제게 피해를 입히는 이들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든 선뜻 손을 내밀었다.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웃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종종 여행 도중 산옥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팔계는 여러모로 당혹스러웠다. 당시 팔계는 산옥이 자신을 사모하는 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지만 그를 몹시 신경 쓰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애정 어린 시선을 주던 산옥이지만 마음에 상처 하나 입히지 않을 것 같은 말투로 산옥을 대하는 이들을 보며 어쩌면 산옥에게 필요한 존재는 그런 이들이 아닐까 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속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었다. 이 부분을 삼장에게 털어놓았더니 그는 한 마디를 뱉었다.

 “걔도 아니고 네가 왜 그런 걸 느끼는데?”

 팔계는 정곡을 찔려 입을 다물었다. 삼장은 차를 쭉 들이켜고 나서 입을 열었다.

 “걔는 널 좋아하는 걸 스스로 알고 있고, 그래서 불안할 수 있다 쳐. 그런데 넌 아니잖아. 왜 네가 그런 걸 느껴? 걔가 지금 널 좋아한다고 해서 끝까지 좋아할 거라고, 그래서 계속 너한테 착하게 굴 거라고 넌 얼마나 확신할 수 있는데? 애초에 걔가 너한테 그렇게 대하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니잖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는 말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삼장이 하는 말이라 더욱 그랬다. 그는 그 때까지 산옥이 유일하게 진심으로 고민을 털어놓는 상대였기에. 옆에 앉아 있던 오정이 한 마디 했다.

 “그거 중독이야.”

 “네?”

 “왜 그러는지 궁금하다며. 그거 중독이라고. 걔가 너한테 유독 친절하게 구는 거에 익숙해진 거야. 아, 그러고 보니 걔가 나한테 그 얘기는 했다.”

 “무슨 이야기요?”

 “온도를 올리기 힘들대.”

 온도? 팔계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나중에 산옥과 차를 함께 마시며 직접 물었다. 그는 그 질문을 받고 한참 말이 없더니 조금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불꽃은 푸를수록 뜨겁잖아요? 그런데 제가 가슴에 품은 불꽃은 아직 붉거든요. 전 이 불꽃이 푸른색이 될 때 주고 싶어요. 그러면 받는 분도 제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제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내어 다가가고 있는지 알지 않을까요?”

 간접 고백이었다. 빙 돌려 표현했지만 그게 저를 향한 열렬한 고백임을 모를 팔계가 아니었다. 잘 마셨습니다. 라고 말하며 일어선 산옥 잔에는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차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밤, 그는 산옥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용기와 나약 중간이지, 걔는.”

 오정이 전에 했던 말이 왜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팔계는 문고리를 쥐려다 말고 그만두었다.

 “왜 당신보다 나약한 내게 마음을 주는 거예요?”

 산옥이 대답하지 않을 걸 알면서 팔계는 중얼거렸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있음을 깨닫고 그는 터벅터벅 제 방으로 향했다.

 그 날 이후로 산옥은 팔계가 자신을 더욱 모른 척 하겠거니 하는 마음에 전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팔계는 예상을 뛰어넘어 산옥에게 다가왔다. 그것도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이. 산옥 혼자 차를 마실 때 같이 마시는 일이 늘었다. 산옥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홀로 마음을 졸였더랬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처음으로 애틋한 입맞춤을 나눈 후, 팔계는 어느새 산옥과 함께 차를 마시는 일이 익숙해졌다. 오정이 한 말 대로 그는 어쩌면 산옥이 주는 애정에 길들여져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산옥이 혼자 우는 날이 많았다는 걸 알고, 마음을 쏟는 일이 얼마나 그에게 고된 일이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팔계는 자리에서 일어나 산옥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온기가 번져 따스해지자 산옥은 눈을 감았다.

 “당신이 언제나 나를 봐 주길 바란다고 하면 욕심이겠죠?”

 “그런 욕심은 원 없이 부려도 괜찮아요.”

 산옥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웃는 산옥에게 팔계 역시 옅게 미소 지어 주었다. 둘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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