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무법지대에서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 서열이란 친밀감과 의리라는 용해제에 쉽게 녹곤 했지만, 그래도 엄연히 머리가 셋 이상 모인 무리에는 모두를 통솔하고 이끄는 리더라고 부를만한 존재가 생기곤 했지.
뭐, 그래. 사실 말을 좀 어렵게 해서 그렇지, 그 무리의 리더라는 건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을의 골목대장역할이라 할 수 있었다.
“아이린!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아침 일찍부터 놀러나갔던 딸이 엉망이 되어 돌아왔다. 아무리 옛날부터 무법지대의 악몽이라 불리며 카르텔들을 청소하고 다닌 루엔이라도, 이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흙먼지가 묻은 옷을 재빠르게 눈으로 훑어본 그는 제 딸이 무언가 큰 사건에라도 휘말리고 온 줄 알고 주먹을 꽉 쥐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건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었다.
“서열정리하고 왔어.”
“서열정리?”
“이제부터 내가 대장이야!”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린이 더없이 기뻐 보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무언가 큰 업적이라도 이루고 온 모양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과 데스페라도의 딸인 만큼 어디 가서 지는 일은 없을 거라 믿고 있는 루엔은 빗을 들고 와 딸을 머리를 새로 묶어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체 누구랑 싸우고 온 거니?”
“파울이랑!”
“파울이라면…, 식료품 가게 아들?”
“응.”
“그 애, 13살 쯤 되지 않아?”
“그럴걸? 흥, 나보다 나이 많다고 으스대더니 꼴좋다.”
제 딸은 올해 11살이다. 아무리 아직까지는 여자애가 크는 게 더 빠른 나이라지만, 2살이나 많은 남자애랑 붙어서도 이기다니. 어쩐지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오른다. 희미한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딸의 머리에서 손을 뗀 루엔은 옷을 털어주기 위해 아이린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이런 걸 먼저 물으면 안 되겠지만, 어떻게 싸우고 온 거니? 총을 쓴 건 아니지?”
“아니야! 그럼 죽잖아!”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 그럼? 주먹다짐이라도 한 거니?”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법이다. 총성이 울리는 건 ‘싸움’의 선을 넘는 거니 곤란하지만, 주먹다짐 정도는 너무 크게 혼내고 싶지 않았다. 나름대로 자신을 관대한 부모라 생각하고 있던 루엔은 아이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다쳐서 온 당사자는 도무지 두려울 게 없는지 오히려 제게 있었던 일을 자랑하고 있었다.
“술래잡기했어. 이기는 쪽이 골목대장!”
“응? 겨우?”
“겨우 라니, 얼마나 힘들었다고. 쫒아오지 못하게 함정도 파고, 새총으로 위협사격도 하고….”
아니, 이건 술래잡기가 아니라 총 없는 전쟁 아닌가. 요즘 애들은 참으로 무섭구나. 나 때는 그냥 머리채 잡고 발길질 하는 것이 다였는데.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너무 꼰대 같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은 루엔이 침묵을 지키는 동안, 누나의 귀환을 눈치 챈 동생 라이엇이 구급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누나, 이거.”
“고마워 라이~! 후, 이제 우리한테 까부는 사람은 없을 거야!”
“…우리한테 뭐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데.”
“없긴 왜 없어! 매일 엄마아빠 들먹이며 뭐라고 하잖아!”
‘유명인의 자식이라는 것도 피곤하다니까~’ 태평한 소리를 하는 아이린은 혼자서도 능숙하게 제 상처에 약을 발랐다.
분명 아이가 혼자서 제 몸을 치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조금의 헛동작도 없는 것을 보아하니 저건 한두 번 해온 솜씨가 아니다. 이런 건 부모에게 도와달라고 해도 좋을 텐데, 언제 제 딸이 이렇게 커버린 걸까. 아득한 눈으로 딸을 보던 루엔은 갈아입을 옷이라도 가져다주려고 방으로 들어왔다가,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남편과 마주쳤다.
“모전여전이라더니….”
“…그거 무슨 소리야, 데스페라도?”
“아니, 너도 어릴 때 가는 마을마다 골목대장 잡아서 족치고 네가 대장노릇 했다며.”
바깥에서 나눈 대화를 다 들었던 걸까. 데스페라도는 사뭇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루엔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때랑 지금은 시대가 전혀 다르잖아? 그리고 난 마차생활을 하며 돌아다닌 입장이니,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 머무르는 곳 마다 기선제압 좀 하고 다녔던 것뿐이야.”
“그래, 그래. 그렇게 생각하던가. 어찌됐든 난 아이린이 널 닮아 다행이라 생각해 한 말이니.”
“아이린은 널 더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첫 딸은 원래 아빠 닮는다더라.”
“그런 미신 같은 소리를….”
말은 미신이니 뭐니 하면서도, 내심 기분은 좋은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코트까지 걸친 데스페라도는 ‘다녀올게’라는 간단한 인사만 남긴 채 자식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갔다.
‘다녀오세요, 아빠!’ 타이밍이 딱 맞게 동시에 외친 아이린과 라이엇은 같이 구급상자를 정리하더니, 루엔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엄마, 그런데 오늘 간식은 없어요?”
“나, 파이 먹고 싶은데!”
아까 전 서열이 어쩌고 하며 혼자서 척척 응급처치를 할 때는 제법 어른 같아 보였는데, 이렇게 보니 역시 제 자식들은 아직 어린애들일 뿐이다. 자신과 데스페라도는 반반씩 닮은 남매의 얼굴에 문득 가슴이 벅차오른 루엔은 두 아이를 가볍게 껴안았다.
“그래, 엄마가 파이 사올게 같이 먹자.”
“신난다! 이건 내 골목대장이 된 기념 파이인 거야, 라이!”
“…누나, 그렇게 좋아?”
“당연히 좋지. 내가 이제 이 마을 대장인데.”
누가 악몽과 사신의 딸 아니랄까봐. 비범하기도 하지.
자랑스럽게 말하는 딸을 보며 소리죽여 웃은 루엔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부디 아이린이 대장 노릇을 하는 것은 이 시절에서 끝나기를. 자신과 데스페라도가 그랬던 것처럼, 어른이 된 후에도 살기 위해 무기를 들고 어딘가에서 리더 노릇을 하거나 할 일이 없기를. 진심을 담아서, 간절하게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