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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거치는 ‘어린 시절’이란 경이로운 시기이며 어찌 보면 크나큰 분기점이기도 하다. 영원할 것만 같은 순진무구함을 존중한다면 어느 순간 아이는 성숙하게 가꾼 일면으로 어른을 압도하고야 말지만, 한순간의 천진난만함을 짓밟는다면 아이의 세상은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만큼이나 파격적으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 중요한 시기를 조숙한 채로 지냈던 리즈로서는 자식의 현 상황, 그러니까 드디어 맞이하게 된 사춘기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깊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아빠가 나한테 뭘 해줬는데? 내가 뭘 하든 신경 좀 끄라고! 변성기를 거치는 도중인 탁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리즈의 입술 틈으로 한숨이 새려는 것을, 로셀레의 검지가 와서 빠르고도 조용하게 막아냈다.

 

“저기, 리즈. 안색이 안 좋아 보여.”

“……로셀레.”

 

밝은 불빛을 등지고 있어도 예나 지금이나 청아한 자수정을 닮은 두 눈동자는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리즈는 앉아 있던 소파의 옆자리를 툭툭, 투박하게 두드렸고 로셀레 또한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가 원래 자신의 보금자리였다는 것처럼 자연스레 자리에 앉았다. 그것만으로도 리즈의 안색은 평온을 되찾았다.

 

“내가 예전에 말했던가? 내가 자란 환경은 편부 가정이었다고.”

“응, 말했었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아버지가 많은 걸 가르쳐줬다고도 했어.”

“그런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내 성정이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아버지와는 크게 싸우거나 의견이 엇갈린 적은 없었지. 둘 다 대화에 서툰 탓도 있긴 했지만.”

 

특별한 대답은 없다. 하지만 로셀레가 말 마디마다 빼놓지 않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건 굳게 신뢰할 수 있다. 리즈가 말을 고르는 동안, 로셀레의 서늘한 손은 리즈의 체온에 데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손가락 틈을 파고들어 이윽고 깍지를 끼었다.

 

“나도 저 나이 때엔 내가 살던 마을의 치안이 좋지 않아서 종종 나서서 싸우거나 남의 싸움에 휘말리긴 했으니 뭐라 할 처지는 못 되겠지만, 요즘 들어 싸운 흔적이 자주 보이길래 그거에 관해 물어봤거든.”

“저기, 뭐라고 물어봤었는데? 그렇게 싸우고 다니다가 골목대장이라도 될 셈이냐고?”

“그럴 리가 있겠냐.”

 

결혼한 지 십수 년은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검지로 이마를 톡, 건드리는 손길 하나에도 신혼 시절과 다름이 없는 살가운 애정이 담겼다. 그대로 쓰러지는 척 어깨에 기대어 오는 로셀레의 고개를, 리즈가 기꺼이 받아내며 그의 어깨를 받아주는 것 또한 그런 애정에 기반한 행동이었다. 이번에 새어 나오는 한숨은 막히지 않았기에 TV에서 흘러나오는 상스러운 웃음소리와 환호 틈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지. 그리고 안 좋은 일에 휘말린 거라면 따로 말하라고도 했어.”

“그랬구나. 그래서, 대답은 들었어?”

“이상하게 화를 내던데. 역시 대화로 해결하는 건 영 어려워.”

“한창 예민할 시기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리즈는 어른스러워서 그런 시기를 안 거쳐서 모른 걸지도 모르지만.”

“나? 마냥 어른스럽진 않은 편이었어. 나도 사람이라 화내거나 빈정거리는 일이 없진 않았고, 말보다 손이 앞서는 일도 꽤 있었으니까. 지금 돌이켜 보면, 마을 녀석들이 보기엔 건방진 편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리즈가 뱉는 어조에서는 어른이 된 후로는 도저히 찾아가 보지 못한, 찾아갈 용기가 좀처럼 나지 않았던, 고향에 대한 향수가 희미하게 풍겼다.

 

“리즈가 하고 싶었던 말은 걱정이었던 거고, 도움이 필요하면 돕고 싶었던 거지?”

“그렇지.”

“그럼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고 오는 게 어떨까. 아까는 잔소리처럼 들었겠지만, 저 아이는 리즈를 닮아서 상냥하니까, 다시 제대로 설명하면 잘 알아들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그렇게 말을 이으려던 리즈의 입술이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로셀레가 눈짓을 보낸 시선 끝에는 방금까지 굳게 닫혀 있었을 문틈에서 익숙한 옅은 자수정 빛이 비쳤기 때문에. 아쉬운 듯이 깍지를 풀면서도

 

“상냥한 성정이 있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널 닮은 거겠지.”

“정말 겸손하네.”

“누가 할 소릴.”

“아. 맞다. 저기, 소리 지르거나 훈계하는 것도 안 돼. 얘기를 들어 주기만 해.”

“노력은 해 보지. 알았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 지나간 손길과 온기는 로셀레에게 있어서 언제나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황홀한 작은 구원과도 같았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편의 뒷모습과 부끄러운 듯이 숨어버리고 마는 아이의 솔직하지 못한 행동을 눈으로 좇던, 아내이자 어머니 또한 이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의 서먹함을 마저 풀어 주기 위한 다정한 저녁을 만드는 건 지금부터도 늦지 않았으리라. 서로를 잠시 단절해 두던 문과 함께 마음의 문도 수줍게 열리는 소리에 힘입어 소매를 걷고 식재료를 꺼내러 가는 몸짓에 한층 더 기합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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