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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AU

*멀 딕슨과 대릴 딕슨 형제에 대한 개인 설정을 기반한 날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는 넌 누구냐, 꼬마야?”

 

준은 제 손으로 쥐기 위해서는 제법 힘을 주어 잡아야하는 무선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비누 거품을 내어 씻은 손바닥에서는 달큰하고 보송한 향기가 분홍빛으로 아른거렸다. 준 딕슨은 어머니의 품에 안기면 가득하게 쏟아지는 살내음과 비슷한 이 향기를 정말 좋아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향기에 무심코 볼을 붉히며 웃을 정신도 없이 당황하고야 말았다. 누구냐니? 봄날 새로 싹을 틔운 어린 나무처럼 연한 시선이 거실의 창문을 타고 바닥을 가로지르는 햇볕을 따라 황망하게 미끄러졌다. 그렇지만, 우리 집에 전화를 건 사람은 아저씨잖아요...?

 

 

 

 

준 딕슨은 주변 사람들에게 제 나이에 맞지 않게 순하고 얌전한 아이라고 거듭 칭찬을 듣는 아이였긴 했으나, 그렇다고 조용한 주말 아침에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다 읽은 책들로 제 주변에 벽을 둘러놓거나 아무도 없는 거실 소파를 차지하고 좋아하는 텔레비전 채널을 독점하는 소소한 일탈을 즐기는 아이는 아니었다. 도리어 제 아버지가, 리틀 제이,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꿈나라냐? 하고 장난스레 타박하며 어깨죽지 아래에 손을 끼워넣어 이불 밖으로 빼낼 때까지 침대 위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것이 소년이 가장 즐겁게 주말을 보내는 방법 중 하나였다.

 

때문에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부득이하게 깨어 밖으로 나온 이 시간은 준에게는 영 낯선 시간일 수 밖에 없었다. 흐릿한 백열등의 불빛 아래에서도 까맣게 졸아들었다가 흐릿하게 풀리기를 반복했던 아이의 어린 시선은 은은하나마 빛을 내던 화장실의 불빛과 검푸른 그림자에 푹 젖어 남빛으로 넘실대는 거실 사이의 대비에 순간적으로 아찔하게 흔들렸다.

 

눈 아파.... 준은 젖은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눈가를 문지르며 입술을 비죽였다. 입 안으로 잔뜩 하품이 차올라 당장이라도 바로 침대로 걸어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눈 앞이 번쩍거리며 아플 때에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엄마의 말이 떠올라 아이는 일단 벽에 뒤통수를 기댄 채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어디에라도 기대지 않으면 눈이 부셔서가 아니라 너무 졸려서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나아, 두울. 아무렇게나 반짝이던 시야가 숫자를 세는 사이에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준은 길게 하품을 했다. 세엣, 네엣, 다아서엇.... 수가 늘어날수록 그 끝에 붙는 공백이 더욱 길어졌다. 아직 모난 곳 하나 없이 둥근 턱 끝이 꾸벅꾸벅 앞으로 기울어질 때였다.

 

“전화기 소리....?”

 

아직 사람이 나오지 않아 서늘한 아침 공기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거실로 가느다란 소리가 파고들었다. 선잠에 든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 낯선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준은 잠옷으로 입는 얇은 티셔츠의 옷깃에 파묻힐 지경이었던 코 끝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이른 아침에 듣기에는 낯선 소리가 규칙적으로 집 안에 퍼졌다가 사그라지기를 몇 번 씩 반복하고 있었다. 누구지? 소년은 등을 기대고 있던 화장실 문 옆의 벽에서 조금 몸을 떨어뜨리고 길게 목을 늘여 거실을 바라보았다. 저를 제외한 잠든 다른 가족들을 깨우기에는 너무 연약한 소리였는지 거실은 여전히 서늘한 그림자에 잠겨 있을 뿐 어떤 발소리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준은 버릇처럼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손으로 빗어내리듯 손가락 사이에 끼워 가볍게 당겼다.

 

전화를 받는 것이 낯설거나 두려워서 머뭇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준은 이미 여덟 살-무려 여덟 살이었고, 가끔씩 부모님이 전화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면 대신 전화를 받아 부모님에게 내용을 전달해 준 적도 왕왕 있었다. 그러니 지금 걸려온 저 전화도 가끔 그러했듯이 대신 받아 내용을 전해주면 그만이었다.

 

다만 전화가 걸려온 시간이 어린 마음에도 유독 신경이 쓰여 준은 몇 번이고 앞머리를 손으로 빗어내렸다. 대체 누가 이런 시간에, 그것도 다른 때보다 사람들이 늦게 일어나는 주말 아침에 집으로 전화를 건단 말인가? 꼭 아무도 받지 않았으면 하는 것처럼. 하지만 정말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기를 바라고 건 것치고는 전화가 울리는 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거실 안을 들쑤시고 있었다. 준은 너무 매만져 부슬거리기 시작한 앞머리를 손가락 사이에서 놓아주었다. 아예 잠들어서 듣지 못했으면 모를까, 들리기 시작한 전화벨 소리를 무시하고 들어가서 잘 수 있을만큼 준은 대범하지 못했다.

 

누군지 물어보고, 누구한테 뭘 전해달라는지만 듣고, 그리고 얼른 들어가서 자야지. 아직 제 발보다 조금 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팍거리는 소리가 나는 슬리퍼를 끌며 소년은 생각했다. 정말로, 빨리 듣고, 얼른 더 자러 가야지..... 비누의 향기가 아직도 오래도록 묻어있는 손이 장식장 위, 텔레비전의 모니터 옆에 놓여진 무선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거실과 그 안을 가득 채운 새벽의 냄새 틈으로 어린 목소리가 쏟아졌다. 딕슨 네 집입니다아. 오래도록 목구멍 안에 고여있던 소리들이 미끄러져 끌을 길게 늘였다.

 

“전화 거신 분은 누구세요?”

 

그 순간 건너편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고, 언젠가의 준은 그렇게 기억해냈다.

 

 

 

 

 

귓가에서 딱, 하고. 무언가 강하게 부딪쳤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터져나와 준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귓가에 닿는 전화기의 플라스틱 몸체가 제 체온으로 달궈진 탓인지 미지근하게 피부에 달라붙고 있었다. 그제서야 준은 제가 아직도 전화기를 들고 있고, 심지어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었던 중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오래도록 대답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도. 그럼 아까 그 소리는 혀를 차는 소리였을까? 준은 아버지가 가끔 입천장에 혓바닥 끝을 댔다가 세게 떨어뜨릴 때 그런 소리가 났던 것을 기억했다. 누나와 준은, 그리고 특히 준의 누나는 아버지가 그런 소리를 낼 때마다 신기해했다. 아빠는 어떻게 그렇게 소리가 크게 나? 몇 번이나 입천장 안 쪽에 혀 끝을 가져다대며 누나는 말했다. 나는 아무리 해도 그런 소리는 안 나는데!

 

“전화기 들고 잠이라도 자냐?”

“자, 자는 거 아닌데......”

 

그럼 대체 뭘 하는데?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귓바퀴 안 쪽으로 우르르 밀려들어왔다. 그것이 꼭 뾰죽한 나뭇가지로 귀 안 쪽을 들쑤시는 것 같이 우악스러워 준은 우물우물 입술을 물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는 처음의 질문에서부터 준에게 유난스럽게 난폭하게 굴었다. 전화를 거신 분은 누구세요, 라고. 그냥 낯선 사람의 전화를 받을 때는 그렇게 물어봐야 한다고 배웠던대로 물어봤을 뿐인데도 그랬다. 얼마나 화 난 목소리로 말을 하는지 누가 들었으면 준이 이 이른 아침부터 낯선 남자에게 전화를 건 것이라고 착각이라도 할 것 같았다.

 

뭘 하느냐니. 그거야 당연히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니까, 꼭 내가 전화를 잘못 건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 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그런데 아저씨 목소리가 꼭 우리 아빠가 우리를 혼 낼 때 내는 목소리랑 비슷해서.... 난데없는 퉁박에 시달려 의기소침해진 채로 그런 말을 늘어놓으려다가 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거... 내가 대답할 일이 아니지 않나? 우리 집에 전화를 건 사람은 이 아저씨인데? 간신히 그런 생각을 해 낸 준은 혓바닥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와 있던 말들을 꿀꺽 삼키고 다시 말을 꺼냈다. 어물어물 주워섬기는 말들이 여린 발등 위에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근데,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어른 말씀에 토 달겠다는거냐?”

“그치만 누군지 알아야지 누가 전화했다고 전해줄 수 있잖아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전화를 받은 것이었지만, 준은 이 수화기 너머의 낯선 사람이 적어도 저와 제 누나에게 전화를 건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귓바퀴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확실하게 어른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끝이 갈퀴처럼 잔뜩 구부러져서 귀 안쪽에 아프게 걸리고,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준이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어른의 목소리.

 

누구였지? 아주 익숙한데도 잘 떠오르지 않는 목소리를 몇 번이고 생각하며 입술을 물고 있자 다시 저 건너편에서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 준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서 낸 크고 위협적인 소리보다는 그나마 조금 더 부드러운 소리였지만, 어린 녀석이, 하고 뒤따라 들려오는 소리를 보면 또 기분이 아주 좋아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엄마가 자기가 누군지 말하지 않는 어른에게는 절대 이름을 가르쳐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내 이름을 들은 값은 비싸게 치러야 할 거다, 꼬마야.... 내 이름은 멀이야.”

 

한동안 고요하던 거실 속의 공방전에서 이긴 것은 결국 준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멀은 누가 들어도 짜증이 잔뜩 난 것처럼 그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어쩌면 자기같은 다 큰 어른이 준처럼 어린 아이와 싸우는 게 바보처럼 느껴져서 포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준은 오랜 시간을 들여 알아낸-사실 느낌이 그랬지,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짧은 이름을 입 안으로 곱씹어보았다. 워낙 낯설어서인지 한 글자로 된 짧은 이름은 자꾸 혀 위에서 헛돌기만 했다.

 

준이 말을 처음 배운 어린아이처럼 그의 이름을 ‘머-을’이나 ‘마-를’ 따위의 이상한 발음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잠자코 듣고만 있어주던 멀은 결국 준이 그의 이름을 ‘머-룰’로 잘못 부를 때가 되어서야 아무튼,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됐냐? 그럼 어디 네 그 비싼 이름 좀 들어보자. 넌 뭐하는 녀석이냐?”

“어... 맞다, 그게.... 내 이름은 준이에요. 준 딕슨.”

 

그리고 아저씨가 전화를 건 집은 우리 집이고, 나는 여기서 살아요. 여덟 살 어린아이치고는 이 이상 깔끔할 수 없는 자기 소개를 마친 준은 그렇게나 제게 누구냐고 들볶아대던 때가 언제라고 고요하기만 한 수화기 건너편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걸까? 그렇게나 준이 누구인지 궁금해 했으면서. 혹시 궁금한 게 그게 아니었던걸까? 전화를 받기 위해 오래도록 서 있어서 그런지 슬그머니 다리가 아파 준은 가로로 길쭉하게 늘어진 장식장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엄마는 준과 누나가 텔레비전 옆에 앉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가끔 남매가 그 곳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주곤 했다. 뭐, 늬들 둘이 앉는다고 내려앉을만한 것도 아니고, 하는 웃음 섞인 말도 함께였다.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마룻바닥을 발 끝으로 문지르고 있자 뭔가 할 말이 생각 난 모앙인지 수화기 속에서 길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준은 수화기를 고쳐잡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거실 바닥에 희미하게 그림자가 지기 시작한 것이 보였다.

 

“준 딕슨?”

“네. 근데 뒤에 e는 안 붙어요. 6월 할 때 준(June)이 아니구, 그냥 준(Jun)이에요. 엄마가 태어난 곳에서 쓰는 이름이래요.”

“성이 딕슨이라고?”

“어.... 그런데요....?”

 

우리 집 성이 뭔가 잘못됐나? 준은 제 대답을 듣자마자 다시 터져나오는 한숨 소리에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였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소리 하나하나마다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모르는 사람의 앞에서는 은근하게 낯을 가리는 소년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도저히 준의 어린 머릿속으로는 이 성격이 나쁜 게 확실한데다 준의 말 하나하나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 이 낯선 전화 상대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를 냈다가, 뭔가를 물어보고선 대답을 듣고 한참 말이 없다가,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채 생각을 정리해보기도 전에, 준은 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새끼 새처럼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네 아빠 이름이 대릴 딕슨이냐?”

“아저씨 우리 아빠 이름 어떻게 알아요?”

 

그 말에 더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어쩌면 아버지의 친구일지도 모르는 남자는 준의 질문에 대답도 없이 낮게 쉿쉿거리는 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중간중간 건방진 녀석이라던가, 대릴-그러니까 아버지의 이름이라던가, 대를리나가 어쩌구, 키운 세월이 이러쿵 저러쿵, 입을 싹 씻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들이 들리기는 했으나 준이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 해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시 전화를 받지 말고 그냥 들어가서 자는 게 나았을까? 이미 떠나버린 가능성을 헤아리면서도 준은 꿋꿋하게 수화기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준 딕슨은 들어버리고야 만 전화벨 소리를 무시하고 잠들어버리거나 전화를 끊지 않은 대화 상대를 내버려두고 수화기를 내려둘 만큼 대범하고 냉정한 성격은 되지 못하는 아이였다.

 

멀이 드디어 준에게 다시 말을 건 것은 준이 기다림에 지쳐 멀리 던져 둔 슬리퍼를 끌어오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장식장의 끝에 걸쳐앉은 채 다리를 펴고 있을 때였다. 준이랬냐? 처음 준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삐죽삐죽한 가시를 반은 넘게 꺾어낸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는 왜인지 피곤할 때의 아버지의 목소리와 너무 닮아있어서, 준은 무심코 아버지에게 대답하듯 응, 하고 대답하려다가 겨우 삼키고 네에, 하고 길게 끝을 늘여 답했다.

 

“그래서 네가 그 녀석이랑..... 아무튼, 아들이라는거지.”

“그 녀석? 아저씨, 우리 아빠 알아요?”

“당연히 알지. 내가 네...”

 

수화기 너머가 다시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전처럼 마구 무언가를 중얼거리거나, 뭔가 이상한 걸 들은 충격 때문에 말을 잃은 것 같은 침묵과는 달랐다. 때문에 준 역시도 아까 전과는 달리 무어라 말을 붙이지 않고 조용히 끊어진 나머지 말을 기다렸다. 숨을 몇 번이나 들이마시고 내쉬었을까, 결국 뭔가를 결정한 듯이 침착해진 목소리가 잘려나간 말 끝을 이었다.

 

“...네 아빠 친구니까.”

 

아빠 친구. 준은 수화기로 연결된 건너편에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입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사실 준은 아버지의 친구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준의 집과 가장 가까운 이웃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보안관인 릭 삼촌, 칼 형, 주디스 누나, 미숀 아줌마, 소피아 누나와 캐럴 아줌마, 가끔 농장으로 놀러가면 말을 태워주곤 하는 허셜 할아버지, 매기 이모, 글렌 삼촌, 할로윈에는 늘 직접 구운 과자를 주는 애런 아저씨와 에릭 삼촌, 그 외에도 마을의 곳곳에는 농사가 서툰 농부가 땅 위에 흘린 씨앗처럼 아버지와 엄마의 친구이자 가족들의 이웃이 많았다.

 

그럼 이 아저씨도 예전에 여기 살던 사람일까? 아직 저와 누나가 없었을 때의 아버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해 아버지 역시도 자신처럼 이 마을에서 계속해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아이는 당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친구라면 이 마을에 살았었을 거라고.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글렌 삼촌이나, 캐럴 아줌마나, 릭 삼촌 같은.... 준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잠깐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렸다.

 

"근데, 아빠 아직 주무세요."

"알아, 그러니까 네가 대신 전화 받고 있겠지. 여전히 낮까지 퍼질러 자냐?"

"아냐, 아빠 원래 일찍 일어나요. 근데 오늘은 주말이니까 아직 주무시는거에요. 울 아빠는 엄청 부지런하시거든요."

 

진짜야, 하고 덧붙이자 멀은 아들 한 번 잘 키웠네, 하고 낄낄거렸다. 말만 들으면 분명 칭찬일텐데도 그것을 말하는 목소리는 이상하게 놀려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준은 저도 모르게 양껏 입을 비죽하게 내밀었다. 전화는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 아무리 싫은 표정이나 기분이 상한 표정을 지어도 누구에게 들킬 염려가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준의 얼굴은 가끔 준의 기분에 지나치게 솔직해질 때가 있었다.

 

엄마처럼 내 맘대로 표정을 바꿀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쉰 준은 전화를 받은 처음 전화를 받을 때부터 제가 하려고 했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냈다. 그러면, 아빠한테요. 익숙하지 않은 말을 들은 사람이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는 것처럼 뭔가 꽉 졸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어, 그러니까, 멀 아저씨가 전화하셨다고 전해드릴까요?"

"뭐? 아니, 필요 없어. 어차피 네 아빠 들어봐야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 왜요?"

 

말을 전해줄 필요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준은 둥그렇게 뜬 눈을 연신 깜박였다. 아빠한테만 이야기할 게 있다는 말인가? 그럼 전화기를 안방으로 가져가야 하는건가? 다행이도 준은 수화기와 본체가 연결되어 있는 종류의 전화기가 아니라 무선 전화기로 전화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안방으로 수화기를 들고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안방의 문은 가끔 닫혀있을 때가 있었고 그러면 준이 아버지를 깨우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졌다. 안방의 문은 제법 두꺼워 어지간히 세게 두드리지 않으면 방 안에서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준이나 누나가 악몽을 꾸고 안방 앞을 서성일 때면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마법처럼 아버지나 엄마가 문을 열고 나오기는 했지만 그 때와 지금은 다른 상황이지 않은가? 그리고 아무리 부모님의 방이라지만 마음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좋지 않다고 칼 형이 가르쳐줬다. 하지만 이런 준의 고민도 부질없이, 뭔가를 잔뜩 놀리고 싶어하는 사람 특유의 춤을 추는 듯 마음대로 높아졌다가 낮아지며 출렁거리는 목소리로 멀이 킬킬 웃었다.

 

"네 아빠는 쫌팽이고, 난 네 아빠랑 싸웠거든. 서로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싸웠으니까 모르는 척이나 하면 다행일거다.“

“우리 아빠 쫌팽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준은 반사적으로 되받아쳤다. 무슨 단어인지 전혀 알 수는 없었지만 왜인지 단어만 들어도 좋은 말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뜻을 알 수 없지만 단어부터가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준이 이 거실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대방을 향해 눈을 흘기고 있자 꼭 그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멀이 또 한 번 거 아들 한 번 진짜 잘 키웠구만, 하고 중얼거렸다. 방금 전과는 달리 준을 놀리려고 한 말 같지는 않았다.

 

"근데 어른도 싸워요? 나, 아빠가 다른 사람이랑 싸우는 거 한 번도 못 봤어."

"그럼 뭐 어른은 사람 아니냐? 살다보면 싸울 수도 있는거지."

"우.... 그런가....?"

 

전화기의 둥근 몸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 준에게 멀은 당연하지, 하고 쐐기를 박았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준은 캐럴 아줌마나 글렌 삼촌이 옛날-그러니까 준이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를 해줄 때 아버지가 지금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더 무섭고, 더 많이 사람들을 낯설어했고, 지금보다 더 거친 말을 쓸 때가 있었다고. 물론 누군가와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사실 있었더라도 그걸 굳이 준에게 이야기해주진 않았을테니 준이 그걸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과 많이 달랐다면 누군가와 싸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논리적이라고 하기엔 어렵지만 어떤 방향으로든 스스로를 납득시킨 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구나. 하고 저도 모르게 종알거린 혼잣말을 들었는지 멀이 기침처럼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대체 어디가 그렇게 재미있는지도 모르는 부분에서 마구 웃고, 왜 조용해지는지 알 수 없는 부분에서 조용해졌다. 게다가 전화를 해놓고선 말을 전해줄 필요도 없다고 하고....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지, 하고 고민에 빠진 준의 어깨 위로 아까 전까지의 제멋대로인 흔들거리던 것은 거짓말인 것처럼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려 떨어졌다.

 

"그냥 한 번 해 본거야. 안 받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 정도 쯤 되니까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해졌거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아직 어린 준에게도 잔뜩 쓸쓸해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나직했다. 준에게 대답을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꼭 멀 스스로가 들으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끔 엄마가 그렇게 말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준은 기억하고 있었다. 별 일 아니었어, 우리 아가. 그러니까 엄마는 괜찮아.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할 때의 엄마는 어째서인지 무거운 것들을 잔뜩 매달고 걷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렇다면 멀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준은 다리를 접어 올렸다. 발이 거두어져 동그마니 생긴 빈 공간 끝으로 창문 틈새를 뚫고 찾아온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 때의 엄마와 똑같이, 그림이 그려지다가 만 채로 저 멀리 치워진 스케치북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왜인지 제 마음 속도 꼭 조여드는 것 같아서 준은 무릎과 어깨 사이의 빈 공간으로 폭 고개를 수그렸다. 이상한 사람,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하다니.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다면서도 그렇게 무거워서 듣고만 있어도 같이 쿵 내려앉을 것 같은 목소리를 내다니. 준은 이런 것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다. 정말이지 전화를 받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에 가지 말 걸, 가도 조금 더 침대에서 졸다가 나오기라도 할 걸. 그랬으면 이렇게 아침부터 마음이 무거워지지는 않았을텐데.

 

수화기를 들어버린 과거의 자신을 탓하며 준은 입술을 자근자근 물었다. 그렇지만 준은 이미 멀의 말을 들어버렸고, 그래서 멀이 그렇게, 엄마가 지었던 표정과 똑같이 책이 잔뜩 든 책가방을 들고 걸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했다. 얼굴도 모르고 그저 이름과 목소리만 아는, 이상하고 낯선 사람이라고 해도 그랬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의 엄마는 아주 추워보이고, 혼자만 남겨진 것처럼 쓸쓸해보이고, 그래서 꼭 안아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한참을 좁은 어둠 속에서 고민하던 준은 결국 단 하나만이 남은 방법을 곱씹으며 결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저기, 있잖아요. 그렇게 말을 걸자 준이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함께 침묵해주던 남자가 듣고 있다는 듯이 한숨처럼 숨을 뱉었다.

 

"뭐가 또?"

"이따 아빠 일어나시며언, 아저씨가 전화했다고 전해드릴게요."

“....필요없다고 했지.”

 

날카롭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 후에 떨어진 대답은 처음 준에게 이름을 물어 볼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가시가 돋아 있었다. 준은 그 사나운 기세에 저도 모르게 움칠 몸을 떨었다가 곧 눈썹 사이를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렸다. 그렇게 쓸쓸한 목소리를 들려주고서는 이제 와서 무서운 척을 하며 괜찮다고 해봤자 전혀 무섭지 않았다. 준은 화가 나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 없게 따끔거리는 목으로 연신 침을 삼키며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치만, 그래도, 그렇게 말할 때면, 엄마, 엄청 쓸쓸하고 힘들어보이는 얼굴이었단 말이야."

“....뭐?”

“엄마는 괜찮다고 말해도 사실은 전혀 안 괜찮아 보이고, 하나도 안 힘들다면서 사실은 엄청 힘들어보였는데.”

 

꾹꾹 눌러서 말하는 목소리에 자꾸 열이 실렸다. 목구멍에서 자꾸 왈칵왈칵 뭔가가 올라오려는 것 같아서 준은 말 끝으로 열심히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지 않았다간 큰 소리가 나도록 와르르 쏟아내서 모두를 깨울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울게 되어버릴 것 같기도 했다. 말을 하면서 자꾸 코 끝이 바짝 말랐을 때처럼 아파오는 걸 보면 확실했다. 하지만 준은 그렇게 하고싶지 않았다. 말을 하다가 울어버리는 건 꼭 아기같은 행동이었다. 그래서 준은 말을 하면서 계속 꾹꾹 혀 위까지 올라오는 것들을 참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자꾸 똑같은 말들이 입 속에서 빙글거렸다. 수화기 너머는 고요했다. 준의 말을 여러 번 생각하면서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니까 아저씨도 사실은, 아빠랑 얘기하고 싶어서 전화한 거 같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전해줄거야. 마지막 말에는 조금 훌쩍이는 소리가 들어갔지만 그래도 준은 훌륭하게 울지않고 말을 끝낼 수 있었다. 코 끝이 아프고 눈이 따가웠지만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말을 하다가 엉엉 울어버리지 않았으니까. 나름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한 스스로에 뿌듯해하는 준에게 수화기 건너편에서 허, 하고 숨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웃는 소리같기도 했고, 또 어떻게 들으면 황당해하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절대 기분이 나쁜 것처럼 들리진 않았다. 이 맹랑한 애송이 녀석아.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로 멀이 중얼거렸다. 새롭게 등장한 호칭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준은 착실하게 코를 훌쩍이는 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어린 게 오지랖은 넓어서. 그런 건 누굴 닮은 거냐? 네.... 젠장, 그래, 네 엄마?”

“....아저씨 우리 엄마도 알아요?”

“알지. 그리고 다시는 나랑 네 엄마랑 비교하지 마라. 네 엄마가 얼마나 사람 열받게 하는 줄 아냐? 말꼬리 잡기엔 아주 선수인 것도?”

“응, 우리 엄마 하나도 모르는구나.”

 

질문에 대답할 생각도 없이 준은 단박에 멀의 말을 잘랐다. 멀이 다시 큰 소리를 투덜거렸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것이, 엄마는 단 한 번도 사람들을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눈매가 잔뜩 날카로워지고 조금만 잘못하면 큰 소리를 내며 무너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엄마는 신기하게도 사람들을 가라앉히고 무너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일들을 차곡차곡 다시 쌓아올리곤 했다.

 

엄마는 신기해, 어떻게 사람들이 화를 안 내게 만들 수 있어? 준이 안긴 채로 그렇게 물으면 엄마는 준의 둥근 머리 위에 뺨을 대고 조용히 웃었다. 엄마는 ‘사랑받고 싶어서’ 노력했거든. 어떻게 해야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받는지, 어떤 걸 ‘따라해야’ 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화를 내지 않는지도 조금 알게 된 것 뿐이야. 그것을 들은 준이 대단하다, 나도 알고 싶어, 하고 말하자 엄마는 준이 조금 숨이 막힐 정도로 꼭 끌어안고서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엄마는 누나도 리틀 제이도 그런 건 절대 배울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걸....

 

그 때의 엄마의 목소리는 꼭 우는 것 같았어서, 그걸 떠올린 준은 다시 왈칵 코 끝이 욱신거려 저도 모르게 훌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들은 멀이, 준이 그가 했던 말들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는지 입을 딱 다물었다가, 어휴, 하고 큰 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준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손가락의 등으로 코를 문질렀다. 아무도 보지 않아서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어디 하고싶은 대로 한 번 해봐라. 대신 네 아빠나 엄마가 너한테 화내도 나는 책임 안 진다.”

“우리 엄마랑 아빠는 화 잘 안 내는데......”

“네 아빠가 화를 잘 안 낸다고? 허, 이 자식 제 아들 앞에서 뭔 내숭을 떠는거야?”

 

그렇지만 준은 한 점의 거짓말도 없이 진심이었다. 부모님은 준과 누나에게 화를 낸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 누나가 주방의 가장 높은 선반에 넣어둔 초콜릿 통(준과 누나는 한 때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어 충치가 잔뜩 생긴 적이 있었다)을 꺼내기 위해 식탁의 의자를 두 개나 겹쳐놓고 올라가려다 들켰을 때나, 준이 책장을 타고 올라가려고 했을 때와 같은 심각한 상황이 아니면 아버지가 남매를 향해 이 사고뭉치들이, 늙은 아빠를 아주 말려 죽이려고 하는구나, 같은 말로 가볍게 꾸중을 할 뿐이었다.

 

그러니 아마 이번에도 준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준이 편을 들어주면 어쩌면 멀에게도 화를 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멀이 직접 전화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는 또 모르겠지만. 이 성격 나쁜 아버지의 옛날 친구와 아버지가 직접 전화하는 날을 생각하자 어린 마음에도 한 걱정이 드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은 생각하느라 바쁜 아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꼬마야. 이름을 알면서도 왜 자꾸 그렇게 부르는 걸까. 준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네에, 하고 대답했다. 길게 허리를 피면 새벽의 푸른 그림자로 어둑했던 거실의 빈 자리를 햇빛이 부지런히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삼촌(uncle)이라고 불러봐라.”

“삼촌?”

“그래, 삼촌. 멀 삼촌이라고.”

 

릭 삼촌처럼? 그렇게 되묻자 건너편에서는 또다시 준이 알아듣지 못할 빠른 속도로 그라임스라던가, 보안관이 어쩌고, 그 작자한테 삼촌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말들이 쏘아져 나가는 것이 들렸다. 이젠 슬슬 익숙해져가는 그 소리들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삼촌이라고 불러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피로 이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준에게는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당장 릭 삼촌만 해도 그랬고, 글렌 삼촌이나 애런 삼촌과 같은 아버지와 엄마의 남자인 친구들에게 준은 습관처럼 삼촌이라고 부르곤 했다. 물론 전화하는 내내 준을 자꾸 놀리려고 들고 가끔은 화를 내서 덩달아 화가 나게 만들거나 놀라게 하기는 했지만, 준은 속이 깊고 착한 아이였으므로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었다. 장식장의 가장자리에 걸친 발을 까딱이며 준은 입을 열었다.

 

“머-”

“....리틀 제이?”

 

준은 채 입 밖에 내지도 못한 호칭을 입술 위에 대롱대롱 매달고 눈을 깜박였다. 자던 중에 막 일어난 것인지 뒷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아버지는 목이 늘어난 티셔츠의 끝단을 잡아내리던 자세 그대로 눈가를 잔뜩 찡그린 채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전화기 너머에서 나는 소리는 어떻게 들은 것인지 귓가에서는 뚜, 뚜, 뚜, 하는 신호음만 연신 울렸다. 설마 직접 이야기 할 기회가 왔는데도 이렇게 끊어버릴지는 몰랐다. 준은 짧게 입술을 비죽였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전화는 이미 끊어졌으니 준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준은 너무 오래도록 들고 있어 따끈따끈해지는 것을 넘어 뜨거워졌을 정도인 전화기를 한숨과 함께 충전기 안에 꽂아두고 앉아있던 장식장 위에서 팔짝 뛰어내렸다. 아빠. 그렇게 부르며 팔을 벌리자 눈썹 한 쪽을 치켜올리고 있던 아버지가 무언가 묻고싶은 것이 잔뜩 있는 얼굴을 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준을 번쩍 안아들었다. 준은 아버지의 목덜미에 마구 이마를 문질렀다. 아버지에게서는 익숙한 냄새들이 났다. 가족들이 모두 쓰는 섬유유연제의 달콤한 향기, 옅은 담배 연기의 냄새, 아주 약간의 땀냄새와 흐릿한 기름 냄새.....

 

“간지러워, 인석아.”

“히히...”

“평소에는 깨워도 안 일어나려고 하는 녀석이. 오늘은 또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아침나절부터 전화기는 왜 들고 있고? 큰 손이 다정하게 어린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준은 대답을 하는 대신에 팔 안쪽으로 아버지의 목덜미를 더 꼭 끌어안았다. 리틀 제이? 그렇게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 위로 꼬마 녀석아, 하고 불렀던 그 목소리가 문득 겹쳐졌다. 그제서야 준은 전화를 걸어온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서 제가 연상해낸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냈다. 맞아, 아빠랑 목소리가 비슷했어. 조용하게 말하면, 꼭 아빠 목소리처럼 들렸어....

 

“어라, 준이 벌써 일어났어요?”

“엄마아-”

 

숙인 고개 위로 아버지의 것과는 다른 폭신폭신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윤, 하고 조용히 엄마의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렸다. 준은 아버지의 귓불 아래에 마구잡이로 문지르던 이마를 떼고 습관처럼 손을 허우적거렸다. 우리 막내. 머리 끝이 약간 구불거리도록 헝클어진 엄마가 준을 부르며 꼭 눈이 부실 때처럼 눈썹을 찡그려 웃는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엄마의 한 쪽 손이 준의 아무렇게나 팔랑이는 손들을 모아 잡았다. 남은 손은 준의 숱 많은 머리카락 사이를 가볍게 파고들어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이 기분 좋아서 준은 키득키득 가는 손길을 따라 코 끝을 움직였다.

 

“우리 이불 달팽이가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전화기도 들고 앉아있던데. 이 똥강아지가, 제 누나도 아직 안 하는 짓을 하고 있어.”

“? 전화기를요? 이 이른 시간에?”

 

누가 전화라도 했었니? 엄마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어 엄마의 눈높이보다 조금 더 높이 올라 와 있는 준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턱 끝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그러고보니 그 아저씨, 엄마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해놓고서는 사실 엄마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었다. 말트집을 잡는다느니, 사람을 열받게 한다느니. 흉을 봐도 어떻게 아들한테 흉을 볼 생각을 했담? 준은 아마 이 세상에서 엄마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에 한 명일텐데.

 

“....맞다. 이거 얘기해줬어야 하는데.....”

“...응? 무슨 말을 해 줘?”

“우리 엄마는 다른 사람 말을 제일 잘 들어주고, 슬퍼하면 같이 옆에 있어주고, 사람들을 엄청 행복하게 해주는 데 선수라고.... 말해줘야하는데 다른 얘기 하다가 까먹었어.”

“그러니까 누구한테 그런 얘기를 해주려고 했니....?”

 

엄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았다가, 아버지에게로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물어보듯이 눈을 깜박였다. 준이 턱을 기대고 있던 아버지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거리는 것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그것이 아버지의 대답인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전해줘야 하는 말을 까먹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곰질거리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몇 번 휘저은 준은 아버지에게서 몸을 떨어뜨리고 부모님과 눈을 마주했다.

 

준의 것과 똑같은 옅은 푸른 눈동자와 언젠가 가족끼리 함께 갔었던 파도가 치는 자국이 남아있는 갈색 눈동자가 방금 전까지의 당황스러움을 지우고 준을 향해 함께 따뜻하고 조용한 시선을 던졌다. 있잖아요. 운을 떼는 준을 다그치지 않고 아버지는 대답 대신에 준의 몸을 받친 팔을 가볍게 들썩였다. 엄마가 준의 손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준은 왠지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있잖아, 아까 전에 전화가 왔었는데요......”

 

새벽녘의 거실을 가득 채웠던 그림자는 하얗게 빛나는 아침 햇살 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비킨 지 오래였다. 머리카락 끝을 백금빛으로 반짝이는 햇빛을 가득하게 받으며, 준은 배시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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