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여랑.png

※본 합작에는 최유기 외전의 약 스포와 함께 원작 개변 서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천계를 떠들썩하게 했다면 떠들썩하게 했던 ‘망나니 장군’ 권렴과 주연의 결혼은 그들이 결혼 후 제 일로 돌아가자 빠르게 가라앉았다. 주연은 가문의 방침에 따라 권렴과 함께 있었던 서방군을 탈퇴하고 가주(家主)가 되었고, 권렴은 별다른 인사이동 없이 서방군의 대장직을 맡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잔잔한 일상이었다.

 

그들의 두 번째 아이, 이후(怡煦)는 부모님을 무서워했다. 정확히는 그의 어머니, 주연을 두려워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는 주연이 화를 내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었고, 가문의 식솔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주연이 그렇게 낸 화를 가라앉히는데 권렴마저도 사흘 밤낮이 걸렸다고 했다. 이후 주연이 그에게 몹쓸 짓을 보였다며 사과하긴 했으나 그는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뭐, 주연이 한번 눈이 돌아가면 누구도 못 말리죠. 그런 말도 있잖아요? ‘늘 웃고 있는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라는. 그래도 주연이 사과했다면 안심해도 상관없을걸요? 그는 한 번 고개 숙여 사과하면 다시는 그러지 않으니까.”

“하지만 스승님, 전 무섭다고요. 언제 누나와 제게 또 그렇게 화를 내실지….”

 

이후가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의 말에 어깨를 늘어뜨리며 축 처졌다. 서방군의 원수인 그 남자는 이후가 알고 있던 군인이라는 이미지를 깨버린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권렴도 군인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 남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검은 생머리는 관리조차 하기 귀찮았는지, 반쯤 잡아 대충 넘긴듯했고, 군인이라면 입어야 할 군복조차 입지 않고, 적당한 와이셔츠에 가운을 하나 달랑 걸친 모습에, 그마저도 이후의 아버지인 권렴이 넥타이를 매어 줘야 할 정도로 생활력이 엉망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방안은 늘 책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는데, 간간이 권렴이 찾아와 청소해 줘야 할 정도로 생활력이 없었다. 더구나 담배는 어찌도 그리 피워대는지, 그의 입가엔 늘 담배가 떠나지 않았다. 이후가 그런 이 사내를 스승으로 모시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사람이라면 새로운 무언가를 깨닫게 해줄지 몰라.’하는 이유였다. 이후의 스승, 천봉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크로열’이라 상표가 적힌 담뱃갑에서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주연이 그들의 상사인 용왕, 오윤에게 그랬듯이 자신에게 불쑥 찾아와 ‘스승이 되어 달라.’며 늘 자신을 쫓아다니던 이 아이를, 천봉은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의 동료이자 상관인 권렴의 아들이라는 점도 있었으나 천봉은 어린 나이에도 절대 어리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이후가 마음에 들었었다. 여느 소년들이 그렇듯이 늘 호기심과 사고를 치고 다니면서도 자신만의 ‘신념’을 세우고 그것을 꺾는 자에게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천봉은 ‘골목대장’이라고 이야기할 만한 그 모습이 마치 그의 아버지인 권렴과 닮아서 마음에 들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푸념이 많네요?”

 

천봉이 이후의 앞에 앉아 턱을 괴었다. 길고 정갈하게 땋아 내린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이후가 천봉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지금까지 횡설수설 내뱉은 말을 가만히 들어준 천봉에게 감사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숙인 그가 곧 고개를 들고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요즘 누나는 누나 나름의 일이 있거든요. 기왕이면 누나가 들어줬으면 했는데….”

“그 아이가요?”

 

이후의 말에 천봉이 이후의 누나, 세이(世怡)를 떠올렸다. ‘천방지축’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형상화 시켜놓은 듯한 그 아이는 아버지를 닮은 이후와는 달리 어머니인 주연을 더 닮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아직 어려서 그랬겠거니 했던 모두의 예상을 빗나가 그 아이는 청소년이 되고 나서도 늘 천방지축이었다. 그런 아이가 자신의 동생을 버려둘 정도의 일이라니. 잠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후를 바라보던 천봉이 눈앞의 아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주연에게 무섭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네?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니라면 지금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을 이유가 없잖아요? 뭐, 오늘 수업은 귀찮았기도 하니…. 주연과 권렴이 있는 곳으로 갈까요? 거기까진 같이 가 드릴 테니.”

 

이후가 천봉을 보며 뭐라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사소한 일이 하나 생겼다고 중요한 수업을 빼먹겠다니. 그런 이후를 바라보며 천봉이 당연하다는 듯이 반쯤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욱여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천봉을 따라 주연과 권렴이 있을 주연의 집으로 발을 옮긴 이후와 천봉이 그곳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권렴이었다.

 

“어라, 권렴. 무슨 일로 여기 계신 거예요?”“천봉? 후도 있었어? 오늘 공부는 어쩌고.”

“쨌습니다.”

“그런 걸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건 여전하고만.”

 

천봉의 대답에 권렴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권렴의 표정을 본 건지, 만 건지 천봉이 안경 너머의 탁한 보랏빛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저택 내부를 구경했다.

주연의 저택은 사람이 적다는 것만 제외하면 투신을 앞세워 천계의 실세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이탑천의 저택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가히 ‘대단하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탑천은 주연이 가주의 자리를 이어받고 두각을 드러내 그를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권력을 잃었다. ‘부정한 자’라 일컬어지는 투신을 이용한 역모를 낱낱이 밝혀낸 주연은 당시 실세였던 이탑천의 역모를 밝혀낸 공로로 지금은 아주 손쉽게 손가락 하나로도 수많은 자를 부릴 수 있을 만큼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는지 자신의 하나하나가 감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저택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대단하네요. 주연이나, 당신이나.”

 

천봉이 진심이 어린 말을 툭 내뱉었다. 어찌 보면 그 결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이탑천이라는 하나의 씨앗을 막기 위해서 짊어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가문의 방침’이라는 허울 좋은 이유였으나 그건 희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권렴이나 천봉, 주연은 이 권태롭고 지루한, 썩어빠진 천계를 등지고 오로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기 위해 군에 입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고 그 권태롭고 썩어빠진 곳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들에게 있어선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 중심에서 자신을 희생한 것이 주연이었고, 그 여파를 고스란히 받는 것이 권렴이었다.

 

“원수님이 웬일이래, 내 칭찬을 다 하고.”

“그보다 권렴, 주연은요?”

“연이라면 자고 있을걸. 세이의 교육도 있고 서류도 있어서 꽤 피곤해 보이던 모양인데 가능하면 쉬게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방금 자는 거 확인하고 돌아가려던 참이야.”

 

이후가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동경 대상이자 라이벌. 투신, 나타와도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강한 그의 아버지인 권렴은 자신의 힘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후의 눈에는 그것이 멋있어 보였다. 아직 어렸지만 추구해야 할 이상이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후라는 어린아이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길을 잡을 수 있었다.

 

“아빠. 그, 누나는요?”

“엄마 옆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데? 누나 만나러 왔어?”

 

주연을 피하려고 이후가 조심스레 말을 내뱉었으나 권렴의 말에 다시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천봉의 뒤로 숨었다. 그의 행동에 “이것 참….”이라며 난처하다는 듯이 자신의 머리를 긁던 천봉이 이후를 슬쩍 바라봤다. 이후와 천봉이 함께 온 이유를 단박에 알아챈 권렴이 그런 이후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걷잡을 수 없었던 주연의 감정이지만 아이에게 보여선 안 될 꼴을 보였다. 그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이탑천을 막기 위해 일을 진행하던 중에 있었던 그 일은 자신의 잘못이기도 했다.

이탑천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 낸 ‘살인 인형’ 나타는 자신의 친구인 오공을 구하기 위해 자살에 가까운 선택을 한 일이 있었고, 오공은 그로 인해 한번, 반역에 가까운 짓을 저질렀었다. 그 뒷감당을 하던 주연의 스트레스로 인해 권렴조차 평소에 보지 못했을 정도로 화를 내던 주연은 결국 사흘 밤낮을 그렇게 화를 내다 기절했다.

이후의 사정도, 주연의 사정도 알고 있는 권렴으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권렴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의 안경을 고쳐 쓴 천봉이 말을 이었다.

 

“언제쯤 일어날 것 같던가요?”

“글쎄, 애초에 기절했다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그렇게 쉽게 일어나진 않을 것 같은데. 아, 세이라면 금세 일어날 텐데 누나가 일어나면 같이 놀기라도 할까?”

 

권렴이 씩 웃으며 이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말에 금세 다시 활기를 찾은 이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권렴이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이 작게 숨을 내뱉으며 주연이 있을 곳을 슬쩍 바라봤다.

 

 

 

※※※

 

 

 

 

 

권렴이 나가자 주연이 눈을 떠 몸을 일으켰다. 고급스러운 침대 시트가 그가 움직이는 대로 구겨진다. 피곤한 건지 아직 몽롱한 듯 눈을 비비며 일어난 주연이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들어있는 자신의 아이를 바라봤다. 자신의 품이 그리웠다는 듯이 주연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가 조심히 아이를 침대에 다시 눕히고 일어난다. 최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지끈거리며 몰려오는 두통에 한숨을 작게 내뱉으며 책상에 앉아 서류를 읽어내리며 펜을 들었다. 자신이 서방군을 탈퇴하고 가주의 자리를 이어받을 때 이런 힘든 삶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알고 있었기에 더 자신이 겪어야 했다. 오래가지 않아 서류를 내려놓고 두통을 잠재우려 고개를 뒤로 젖히던 주연이 아직 잠들어있는 자신의 아이, 세이를 바라봤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 그가 하는 일은 저 작은 아이에게로 넘어갔을 것이었다. 집안 내의 오래된 가풍(家風)을 바꾸는 일과 주변 정치의 흐름을 타는 일, 또한 반역을 저질렀던 이탑천의 견제까지. 아직 저 어린아이가 하기엔 너무도 벅찬 일뿐이었다. 그래서 주연은 세이가 자신의 뒤를 잇겠다며 수업을 시켜달라는 말을 꺼냈을 때도 주연은 그 선택에 반대했었다.

 

“엄마?”

 

세이가 그의 시선을 느낀 건지 눈을 비비며 부스스 일어났다. 주연이 서류를 처리하는 사이 움직이기라도 했는지 산발이 된 아이의 머리에 작게 웃음을 흘린 주연이 짧게 “응”이라며 대답했다. 아직 저 어린아이가 가주라는 일을 정하기엔 너무도 경험이 없었다. 가능하면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의 방향을 정했으면 하는 것이 주연이었다. 자신 역시 그랬고,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생사를 넘나들기도 하고,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한 그조차도 이 자리에 앉고 나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 작은아이가 경험도 없이 이 자리에 앉았을 때 무슨 고생을 할지, 그는 늘 걱정이었다. 그런 주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이는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그 보랏빛 눈동자를 빛냈다.

 

“아직 졸릴 텐데 좀 더 자.”

“아냐, 괜찮아. 다 잤어.”

“눈에 눈곱 붙이고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다는 거 알지?”

“앗….”

 

급하게 자신의 눈에 붙은 눈곱을 떼어내며 세이가 잔뜩 볼을 부풀렸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세이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는 어머니가 생각하는 만큼 생각도 없이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주연이 자신이 선택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힘들어하는 것도 보았고, 늘 그를 위해 자신이 힘들어하는 것을 숨기려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세이는 주연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그것은 곧 자신의 길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엄마, 엄마. 나 나가서 후랑 놀고 와도 돼?”

“응, 조심해서 놀다 오고. 늦게 들어오면 안 돼?”

“에이, 엄마는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인 줄 알아?”

 

세이가 배시시 웃으며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갔다.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한숨을 작게 내뱉었다. 말로는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자신은 한참 어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수도 많이 하고, 주연이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을 보면, 자신은 아직 꼬맹이일 뿐이었다. 아버지인 권렴이야 특유의 털털한 성격도 있었고 아버지의 옆에 자신의 동생인 이후가 있으니 큰 걱정이라 말할 것도 없었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자신의 기억을 되돌려 기억의 시작점으로 향하면 자신의 어머니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얼마나 힘들어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 밝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인 것처럼 행동했다.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어머니가 알게 된다면 적어도 지금의 어머니는 자신을 관리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며 무너질 것이었다.

세이가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동생이 있을 서방군으로 향했다. 아버지인 권렴의 방문이 열려있어 조심히 틈새로 안을 바라보던 세이의 시야에 권렴과 천봉, 이후가 소파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권렴과 이후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천봉의 군사학 강의라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세이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후! 나 왔지요!”

“누…. 누나?! 제발 노크는 하고 들어와 줘…!”

 

이후의 표정이 확 밝아지는 것이 세이의 시야에 들어왔다. 권렴이 잠시 세이를 바라보다 손을 흔들었다. 밝게 웃어 보인 세이가 이후의 말을 무시하고 권렴에게 달려가 안겼다. 세이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천봉이 말을 멈추자 그제야 권렴 역시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하이라이트’라고 적힌 담배를 꺼내 들어 입에 물었다. 권렴이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누구보다 천방지축이고 흔히 말하는 ‘답이 없다.’라고 이야기할만한 이 아이는 보기보다 속이 깊었다. 권렴이 잠시 시선을 열린 문으로 옮겼다. 일부러 살짝 열어둔 문 틈새로 세이의 시선이 느껴졌었다. 아직 어린아이인지라 자신의 기척을 숨기거나 혹은 거짓말을 하거나 하는 것에는 서툴렀으나 확실히 자신의 안색을 살피고 들어왔다고 생각한 권렴이 이후와 장난을 치고 있는 세이를 바라봤다.

 

“권렴, 뭔가 신경 쓰이는 것이라도 있어요?”

“아니…. 요즘 아이들은 빨리도 크는구나 싶어서 말이야.”

 

권렴의 말에 천봉이 권렴의 시선을 따라 이후와 세이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권렴의 말대로 아직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은 저 아이들도 언젠가 자신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만큼 자라날 것이다. 천봉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권렴에게 시선을 던지다 평소와 같이 웃음을 흘렸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늙었네요, 권렴 대장님.”

“뭐? 아직 난 젊거든!”

“아빠, 아빠! 나, 후랑 오공 오빠랑 놀아도 돼?”

 

세이가 권렴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권렴이 제 연인의 반짝거리는 눈을 떠올리며 짧게 웃음을 픽 흘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동생의 팔을 잡고 오공이 있을 금선의 방으로 향한 세이가 방문을 똑똑 두드리려던 찰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답지 않게 바짝 긴장한 표정을 보였다.

 

“어? 너희가 여긴 무슨 일이야? 오공이라면 지금 뒤뜰에서 쉬고 있을 텐데.”

“그, 그런가요, 나타 태자님…!”

 

세이가 나타의 시선을 피한다. 가볍게 인사하고 저 멀리 도망가려는 세이를 잡은 나타가 물어볼 것이 있다며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이자 세이의 얼굴이 폭탄이 터진 마냥 펑, 소리가 날 것 같이 새빨개졌다. 이후가 한숨을 내쉬며 세이와 나타의 사이를 살짝 가로막으며 나타를 바라봤다. 인상을 살짝 찌푸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타가 익숙하다는 듯이 다시 웃어 보이며 세이와 이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타 태자. 이후는 잠시 그에 대해 떠올렸다. 오로지 이탑천의 권력을 위해 만들어진 살인 인형. 살생이 불가능한 천계에서 유일하게 손에 피를 묻힐 운명을 타고난 ‘부정한 자.’ 그러나 그 이탑천은 자신들의 어머니인 주연과 그의 친구들에 의해 몰락했고, 그 여파로 폐기될 뻔한 나타를 구해낸 것도 그었다. 이후가 주연에게 듣기론 주연 자신이 나타를 양아들로 삼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고 들었던 탓인가, 이후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어린 아이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이 천계에서 유일하게 성장하지 않는 「인형」인 나타는 가끔가다 이상한 행동을 보이곤 했다. 이탑천이 옥에 갇히게 된 후 오랫동안 검진을 받지 않았던 탓에 오류를 일으키고 있다고 판단한 이후는 그런 ‘불량품’을 자신의 누나가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연 님은 혹시 집에 계셔?”

“아, 네! 엄마는 가주의 방에 계실 거예요!”

“그래? 주연 님께 전해야 하는 게 있어서. 고마워. 너희는 오공과 함께 있을거지? 일이 끝나면 찾아갈게.”

 

나타의 말에 세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나타는 자신의 아버지, 반란군 이탑천에 대해 전할 게 있어 그를 찾는 것일거라고 생각한 세이가 더이상 그를 막지 않겠다는 듯 자리를 살짝 피했다. 그 웃음에 나타가 마주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돌렸다. 나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이가 손을 흔들어주곤 이후를 잡아 이끌어 꽃밭이 있는 뒤뜰로 향했다. 얼떨결에 세이에게 끌려가게 된 이후가 저 멀리서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오공에게 뛰어가는 세이를 보고 한숨을 작게 픽, 내뱉었다. 자신의 누나는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좋아했다. 자신이 상처를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서도 사람을 좋아하던 자신의 누나는 그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주연의 화를 보고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며 자신의 어머니 곁으로 달려갔다.

 

“아, 너희구나. 여긴 어쩐 일이야?”

“오공 오빠 보러왔는데!! 우리랑 놀자!”

 

오공이 자신의 긴 머리를 아래로 내려 하나로 묶으며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세이가 따라 웃어 보이다 “안돼.”하는 단호한 거절의 말에 축 어깨를 늘어뜨렸다.

 

“금선이 돌아오면 분명 또 뭐라 할거거든.”

“금선 동자님이?”

“응, ‘이 원숭이! 또 꽃밭에서 놀다 왔지! 씻기는 한 거냐!’ 하면서, 그래서 슬슬 돌아가려 했었어. 그야 금선이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가만히 보면 과보호하는 것 같다니까. 완전히 아빠야, 아빠.”

 

오공의 투덜거림에 세이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금선동자 님은 어디 가셨는데?” 하고 묻는 세이의 말에 잠시 생각을 이어가던 오공이 아, 하고 말을 이었다.

 

“아마 연 누나를 만나러 갔을걸?”

“엄마를?”

“응,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던데.”

 

세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동자님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천봉과 권렴에게서 받은 서류를 읽던 주연이 그것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신성한 금색의 머리를 늘어뜨려 낮게 내려 묶은 금선은 주연이 다 올려다보지도 못할 만큼 키가 컸다. 워낙 험악한 인상인 탓에 늘 오해를 받곤 하는 그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주연의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아 주연을 바라봤다.

 

“할망구한테서 들었어. 후계를 그 꼬맹이로 정했다고?”

“보살님께서 말씀하시던가요? 사실은 저도 그다지 그렇게 정하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세이가 그렇게 원하고 있으니….”

 

주연이 작게 한숨을 내뱉는 모습에 금선이 그를 바라보며 팔짱을 끼곤 주연이 보고 있던 서류를 슬쩍 바라봤다. 정갈하게 쓰여있는 글씨를 보니 권렴이 적은 서류인 것 같았다. 잠시 말없이 주연을 바라보던 금선이 침묵을 깨고 말을 이었다.

 

“너답지 않게 고민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자식의 일이니까요. 제가 바꿔놓은 것들을 언짢아하는 자들이 과연 세이를 가만히 둘지부터….”

“그 녀석이라면 잘할걸.”

 

금선이 말을 툭 내뱉었다. 영문모를 소리에 주연이 놀란 눈으로 금선을 바라보자 금선이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풀곤 자세를 고쳤다. 주연은 금선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금선의 뒷배도 있었지만, 금선은 이탑천이 일으키려던 반란을 한차례 겪고 나서 달라졌다. 무엇보다 이탑천의 반란 첫 번째 조건이 나타의 친구이자 금선이 보호하고 있는 오공을 제거하는 것이었으니 그를 지켜내려면 무료하고 권태로웠던 그 전의 모습에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주연이 금선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했던 일들을 잘 생각해봐. 이건 꼬맹이를 먼저 키웠던 관점에서 말하는 거니까.”

“아무리 그래도.”

“권렴도 그렇고 천봉도 그렇고. 다 아는 것 같은데 정작 가주라는 사람이 이렇게 걱정이 많아서야. 지금 그 꼬맹이한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건 너야.”

 

주연이 금선의 말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고작 이런 말을 하려고 자신을 찾아온 건가? 주연의 표정을 보고서도 꼼짝하지 않고 말을 이어가던 금선이 주연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꼬맹이, 그렇게 순수하고 천방지축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 같아도 결국엔 자기가 벌인 일은 늘 자기가 수습해왔어. 사고를 쳤다면 네가 걱정하지 않는 그 동생 쪽이 더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지. 잘 생각해봐. 세이가 늘 우선시 하는 게 뭐였는지.”

 

금선의 말에 주연이 한숨을 살짝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늘 그가 보기에 세이는 아직 어리고 순수한 꼬마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바뀌었다. 무엇보다, 주연은 ‘가장 순수한 아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네요. 확실히 오공보다는 키우기 편하죠. 안 그래요, 오공이 아빠?”

“누가 아빠냐. 사육주라니까.”

“어라, 아까는 본인이 오공이를 키워냈다면서요?”

 

주연의 장난에 금선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가장 큰 걱정거리가 사라진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연을 보며 금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연은 모르겠지만 자신이 지금껏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주연이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높은 가문에 태어나 평탄한 대로를 걸어갈 수 있음에도 굳이 가시밭길을 선택한 사람. 가시밭길을 자를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그 길의 끝에 도달한 사람. 금선은 늘 그를 보며 멍청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공을 만난 뒤의 금선은 오히려 멍청했던 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 그를 따라 가시밭길을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뒤에서 밀어준 것이 주연이라는 사실을 금선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권력을 이용해 이탑천을 견제하고, 동시에 오공과 금선이 정권의 중앙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 사람. 고민조차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스승 같은 사람이 이렇게 집안에 틀어박혀 두려워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금선이 자신의 스승에게서 진 빚을 갚았던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건, 주연도 모르고 있었다.

 

“고마워요. 마침 권렴과 천봉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잠깐 시험을 좀 해봤는데 분명 세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그 자식들 답네. 정치가 장난이냐. 동생 쪽은?”

“후라면 천봉과 권렴이 있으니 잘 클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당신이 오공과 장난치는 것보단 덜할걸요?”

“그건 진짜 장난이고!”

 

주연이 웃었다. 마침 이야기는 끝났냐며 어디서 데려왔는지 오공과 세이, 이후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오는 권렴과 천봉이 주연을 바라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럼 오랜만에 술 한잔 꺾으러 갈까?”

“렴, 늘 말하지만 너는 술을 너무 마셔. 알아? 그러다가 한방에 꺾인다?”

“금선! 나도 술 마시면 안 돼?”

“안돼! 원숭이가 뭘 마시겠다고!”

“뭐 어때요. 이제 오공도 어린아이는 아니잖아요.”

“천봉, 너는 진짜…!”

“엄마! 나타 태자님도 부르자!”

“난장판….”

 

주연이 난장판이 된 자신의 방을 바라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방이 이렇게 시끄러웠던 것이 몇 년 만이지? 잠시 생각을 이어가던 그가 생각을 끊고 만년 벚꽃이 만개해 화려하게 피어있는 것을 바라보다 잠시 웃어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네요, 아예 이참에 하계로 내려가서 진짜 난장판 치면서 마셔볼까요?”

Copyright (c) by Esoruen / Free IMG : Pngtre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