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가 좋은 어느 주말, 소극장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번화가 거리. 아직 문이 닫혀있는 어느 극장 앞 나란히 서 있는 한 쌍의 남녀는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학생들끼리 데이트라도 온 건가.’ ‘그런데, 저 극장에서 하는 극이라면 분명…….’ ‘그런데, 저 학교는 남학교 아니었나? 여학생도 있었던가?’ 주변의 조용한 수군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로를 마주 본 채 조잘조잘 떠들고 있는 한 쌍은 꽤 다정해, 퍽 보기 좋았다.
“아이렌 군, 괜찮나?”
“저는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아주 멀쩡해요.”
“하지만 초조해 보이는걸?”
“이건 초조한 게 아니라, 설레는 거예요.”
과연 그럴까. 루크는 평소엔 볼 수 없는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러 의미로 진정하지 못하는 후배의 모습은 퍽 귀엽긴 하지만, 저건 누가 봐도 데이트를 하러 나온 사람의 얼굴은 아니지 않나.
루크는 예매 페이지를 띄워두고 이것저것 읽어보는 아이렌을 내버려 둔 채, 자신과 아이렌이 어쩌다 이 시간 여기 오게 되었나를 되짚어 보았다.
‘선배, 혹시 연극 보러 갈래요? 전에 오페라 보여주셨으니까, 저도 작게나마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얼마 전, 아이렌이 그렇게 물어왔을 때는 얼마나 기뻤던지. 방과 후 동아리 활동을 위해 이동 중이었던 루크는, 자세한 설명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곧바로 제안을 승낙했었다.
안 그래도 원래부터 무대를 보는 걸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이와 단둘이 극을 관람하러 간다? 그런 걸 제가 어찌 거절하겠나!
그렇게 루크는 매일매일 약속 날만 기다리며 오늘을 맞이했는데……. 아무래도 아이렌은 자신과 단둘이 데이트를 왔다는 두근거림보단, 지금 볼 연극에 대한 기대가 더 큰 모양이다.
“토할 것 같아…….”
“이런, 아이렌 군. 정말로 괜찮은 게 맞겠지?”
“괜찮아요. 늘 이러니까. 저는 너무 설레면 토할 거 같아지더라고요. 매일 하는 소리니까 전혀 신경 쓰실 것 없어요.”
크게 심호흡한 아이렌은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가방 안에서 작은 파우치를 꺼냈다. 티켓 봉투와 도장이 찍힌 작은 종이들이 가지런히 들어있는 그 파우치 겉면에는, 주인의 이름이 자수로 작게 새겨져 있었다.
저 파우치의 용도를 알 것 같은 루크는, 문득 상대가 얼마나 이 취미에 진심인지 알 것 같아 소리 없이 탄식했다.
“기대되는 걸, 네가 좋아하는 연극이라니. 창작 초연 작품을 보는 건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야. 후후.”
아이렌이 굳이 자신과 함께 온 건 자신들이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생각해보면 사실 서운해할 이유가 없었다. 이토록 기대하는 극인데 아무하고 같이 보고 싶지 않을 것 아닌가.
말하자면, 자신은 선택받은 동반자 같은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달리하자 여유가 생긴 루크였기에 저렇게 말한 것인데, 아이렌의 표정은 오히려 더 복잡해질 뿐이었다.
“재미없어하시면 어쩌지?”
다 들리는 혼잣말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것도, 아주 무거운 근심이 말이다.
무대 관람 하나에 저리 진지하게 걱정하는 건 아마도 극 하나를 보기 위해 소모되는 시간과 체력이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이겠지. 루크는 심히 잘 알 것 같은 아이렌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오. 그럴 리가. 모든 작품은 그 나름의 멋이 있는 법인걸.”
“그건 그렇지만 말이죠. 세상엔 잘 만든 작품이지만 취향에 안 맞는 창작물이 있고, 이게 뭐지 싶은 작품이지만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창작물이 있잖아요. 취향에 안 맞으면 역시 푯값이 좀 아깝기도 하고…….”
‘마치 읽기 쉬운 글이 재미있는 글이 아닌 듯 말이죠.’ 지나치게 사실적인 예시와 추상적인 예시를 연달아 말한 아이렌은 다시 한번 스마트폰으로 예매 페이지를 확인해 보았다.
아, 제 소감이 걱정되어 이리 전전긍긍하다니.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루크는 제 옆의 이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예매 페이지를 보았다.
“그나저나 소극장은 오랜만이구나. 극은 처음이라도, 배우는 익숙한 이가 있으니 아주 낯설지는 않은걸?”
“앗, 그래요? 어느 배우요?”
“여기, 이 배우. 매년 많은 작품을 하는 배우라 여러 번 본 적이 있지.”
“아! 노마 배우님 말이죠? 이분 연기 엄청나게 잘하죠! 저는 전에 뮤지컬에서 봤는데…….”
혹 좋아하는 배우였던 걸까. 루크가 가리킨 이를 본 아이렌은 신이 나서 배우에 대해 떠들어댔다.
제 얼굴을 마주 보고 쫑알거리는 후배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듣던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자수정 색 눈동자에 숨을 삼켰다.
‘아이렌 군, 정말로 즐거워 보이는걸.’
평소엔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학교생활을 하고, 감정 표현을 하더라도 절제미가 있던 아이렌이 이토록 아이처럼 좋아하는 걸 보게 되다니. 언젠가 한창 뜨기 시작하던 아이돌 그룹의 멤버에 대해 말할 때도 이런 표정을 보여주긴 했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이 더 즐거워 보인다. 그건 아마도 이 여자가 피부가 닿는 사람보다는 조금 더 추상적인 개념을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는 캐릭터나, 매일 같은 듯 다르게 자아지는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앗, 벌써 시간이……. 표 찾아올게요.”
입에 침이 마르게 조잘거리던 아이렌은 시간을 확인하곤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지금 시각은 오후 2시. 극이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다.
“음? 아직 극 시작까지 1시간이나 남았는데?”
“이 극장 로비는 너무 좁아서 사람 없을 때 가서 표 찾아와야 해요. 표 찾아서 커피라도 한잔하러 가요. 이 앞의 카페가 음료도 빨리 나오고 맛있는데, 거기 갈까요? 저희 어차피 통로석이니까 늦게 들어가도 돼요.”
“…….”
무대 관람이 취미인 루크로서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자신의 르나르가 진지하게 이런 소리를 하는 걸 보고 있자니 참으로 기분이 묘하다. 그래. 꼭 거울을 보는 것 같달까.
문이 열린 극장 입구로 빠르게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보던 루크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깨를 떨며 웃었다.
✻ ✻ ✻
그리고 몇 시간 뒤, 4시 40분경.
퇴장하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로비에서 한발 늦게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던 루크는 혹 동행을 잃어버릴까 봐 손을 꼭 맞잡았다.
“음, 정말 미학이 가득한 극이구나! 연출도 독특하고, 멋진 창작 초연이야!”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극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옆자리에 앉은 아이렌의 반응은 거의 보지도 못하고 무대에만 완전히 집중했었던 그는 이제야 상대의 얼굴과 마주 보게 되었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 아이렌 군. 정말로 재미있게 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아까 전 좌석에서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것 같던 아이렌이, 지금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등으로 얼굴을 훔치고 있었다.
“아이렌 군?”
제가 뭔가 잘못 본 건가. 그렇게 생각해서 눈을 비빈 루크였지만, 눈앞의 모습이 달라지진 않았다.
올 1년 중 가장 크게 당황한 루크는 겉으로는 침착하려고 했지만, 꾹 다문 입이 들썩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몽 르나르(mon renard)가……, 운다고?’
아이렌도 사람이니 당연히 울 수 있지. 하지만, 그는 아이렌이 우는 걸 본 게 이번이 처음이다. 전에 함께 오페라를 보았을 때 ‘감동해서 울 거 같다’라는 감상을 내놓긴 했지만, 그때는 울지 않았단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 16살 계집애는 평소에도 도통 우는 일이 없었다. 오버 블롯에 휘말려 목숨이 위험해졌을 때도, 온갖 부조리에 시달릴 때도. 늘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꿋꿋하게 굴었는데.
그런데, 연극을 보고 울어버렸다고? 물론 감동적이고 훌륭한 극이었지만, 정말로? 역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루크는 도무지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렌을 위해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을 살필 여유 정도는 있는지, 그는 금방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죄송해요.”
“오, 사과하지 말아줘. 아이렌 군. 전혀 사과할 일이 아니니.”
좀 짓궂은 말이지만, 자신은 오히려 지금 대단히 득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이들은 볼 일 없는 아이렌의 우는 얼굴을 이리도 가까이서 보지 않았나. 마음 같아선 평생 자신만 이 얼굴을 보고 싶다.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으니, 정말로 사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루크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제 본심을 꾹꾹 눌러둔 채, 상대가 진정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극장 근처 벤치에 아이렌을 앉혔다.
얌전히 자리에 앉아 얼굴을 닦은 아이렌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한 후, 그제야 평소와 같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재미있게 보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저만 재미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아직도 그걸 걱정하고 있었나.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해도 모르겠지만, 정말 귀여운 후배다.
울다 그친 사람 앞에서 마음 놓고 웃을 수 없는 루크는 몰래 입 안 살을 씹으며 입가에 번지려는 미소를 참았다.
“손수건은 세탁해서 돌려드려도 될까요?”
“그러지 않아도 돼. 그냥 주어도 된단다.”
“아뇨. 엉망이 됐으니 그럴 순 없죠.”
눈물 젖은 손수건을 주머니 속에 챙겨 넣은 아이렌은 아직도 여운이 가시질 않는지, 의자 등받이에 기대 크게 한숨 쉬었다.
“오늘 정말 감동의 극치다…….”
아무래도 오늘 공연이 평소보다 합도 잘 맞고 호흡도 좋았나 보다. 같은 공연을 여러 번 본 이들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아는 루크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후훗.”
“……응? 왜 웃으세요?”
“아니. 아이렌 군이 정말로 귀여워서.”
다음에 또 같이 공연을 보러 와야지. 오페라와 연극을 보았으니, 다음에는 무용은 어떨까. 뮤지컬도 좋겠고, 연주회도 좋겠다. 그때도 이렇게 감격하며 울어주면 좋을 텐데.
물기가 마르지 않은 상대의 뺨을 손가락으로 훑은 루크의 얼굴은 여전히 감동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