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주 일정은 어떻게 돼요?”
“네?”
“응?”
아키라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오른쪽에서 걷고 있는 치하야를 쳐다봤다. 꼭 머리 위로 물음표라도 떠 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마 자신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겠지.
고백의 답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얼마나 될까. 부끄러워 붉어진 얼굴로 받아들이거나, 난처한 듯 웃으며 거절하거나, 아니면 거절의 말조차 하지 않은 채 매몰차게 자리를 뜨거나, 너무 갑작스러우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다거나. 그 정도려나. 아키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치하야 씨라면 아마 곤란하다는 표정을 하곤 좋게 거절하겠지. 그래서 아키라가 고백을 한 것은, 그 표정을 그리워했던 탓도 있다. 몇 번이고 꿈에 그리던 언어들이 자꾸만 혀끝에 맴돌아서, 몇 번이고 꿈에 나오던 그 표정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서 충동적으로 내뱉은 고백이었다.
그러나 치하야가 출력해낸 답은…….
고백해온 상대의 다음주 일정을 묻는다. 이것은 승낙인 걸까 거절인 걸까? 거절하기 미안하니까 말을 돌리는 것으로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말인가? 아키라가 자신의 고백과 치하야의 승낙 사이의 연관성을 어떻게든 찾아내려 애쓴다.
“나는 대학생이니까 내가 토우야 군에게 맞추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치하야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복잡한 머리 탓에 무심코 눈을 찌푸린 탓일까. 아키라가 오른손을 들어 검지로 눈가를 꾹꾹 누르며 표정을 풀었다. 치아햐의 말을 해석하자면, 다음주에 남는 시간에 토우야 아키라를 만나주겠다는 뜻이겠지. 이야기의 전개가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아키라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아, 아뇨. 그러니까, 그게 아닌 게 아니라.”
하지만 입은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곤란한 얼굴을 보고 싶어서 한 고백이었는데, 어째서 제가 제 무덤을 파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키라는 최대한 표정을 가다듬으며 치하야를 흘깃 훔쳐봤다. 그가 아키라의 추태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치하야의 낯에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은은한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아키라는 안심했다. 이 정도의 실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기자. 고백한 상대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고도 (상대의 의도야 어찌 됐든)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키라는 자기 암시를 걸었다.
“주말은 어떠세요? 저도 주말은 비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럼 다음주 토요일에 볼까요? 1시 쯤에 역 앞에서,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치하야의 옆모습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태연해 보였다. 여전히 속으로 바둑알을 세며 겨우 마음을 다스리는 아키라와는 다르게. 아키라는 이젠 복잡한 속을 다스리기 위해 억지로 짓는 미소가 버거울 지경이었다.
아키라는 그 시절부터 늘 치하야가 저를 어리게만 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써 수없이 많은 어른들을 상대했다. 이른 나이에 어른의 세계로 입성했다. 어쩌면 또래보다 어른들에게 더 익숙했다. 그렇기에 ‘나이 차이’를 들먹이는 치하야의 말은 핑계라고만 여겼다. 아키라는 지금에서야 치하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5년의 공백은 그렇게 쉽게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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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어요?”
“아, 니에요…….”
아키라는 무심코 혀를 씹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 멍해진 머리에 자신이 혀를 씹었다는 사실조차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바보 같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경쓰지 않는 듯 무심히 지나치는 치하야가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길 바랄 뿐이다.
“미안해요. 출구를 잘못 찾아서.”
치하야의 사복 차림을 처음 보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한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고, 그 몇 번 되지 않는 만남도 전부 아키라의 억지로 이루어진 만남이라 치하야의 옷차림까지 자세히 살필 시간은 없었다. 게다가 아키라의 기억 속 치하야는 언제나 교복 차림이었다. 그러니 당연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낯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침만 꼴깍 삼키는 아키라를 보며 치하야는 다정히 웃었다. 꼭 아이를 달랠 때나 짓는 웃음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키라는 그것을 속으로 삼킬 뿐이었다. 티내봤자 치하야는 어른의 여유로움으로 아키라를 대할 것이다. 겨우 ‘데이트’까지 왔다. 아키라는 이 사이 공기를 다시 예전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건 생각해봤어요?”
“어, 저는…….”
아키라는 입술만 달싹였다. 물론 치하야와 하고 싶은 것은 많았다. 아키라는 꽤 최근까지도 무언가를 할 때도, 어딘가를 갈 때도, 맛있는 것을 먹을 때도 치하야 씨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하곤 했었다. 지금도 머릿속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떠다녔다. 하지만 치하야의 얼굴을 보자 어쩐지 입술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극장은 괜찮아요? 토우야 군과 보고 싶은 영화가 있거든요.”
결국엔 또 치하야가 먼저 선택지를 제시한다. 아키라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치하야의 제안을 거절할 배짱도 없었으므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쨌든 그것은 토우야 아키라 자신의 문제였지 치하야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조금 억지를 부리자면 ‘나의’ 마음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행태는 조금 탓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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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가 보자던 영화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제목의 영화였다. 이제 막 개봉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영화도,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는 해외의 블록버스터 시리즈 영화도 아니고 꼭 이 영화를 고른 이유가 무엇일까. 아키라는 나름 기대를 가지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하루에 한 번 겨우 상영하는 영화 답게 영화 시작 시간에 딱 맞춰서 들어갔음에도 좌석은 거의 비어있었다.
영화는 평범한 로맨스 영화였다. 오해로 시작된 남녀 관계가 계속해서 맞물리면서 점차 호감으로 변해가고 간질거리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남자가 먼저 고백한다. 그러나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한 연애는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만 삐걱거리고 틀어진다. 지친 남녀는 이만 관계를 정리하기로 한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상대방을 완벽히 정리하지 못한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워하고 미련이 남은 채로 우연을 가장하며 서로의 곁을 맴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속내를 털어놓고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렇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우치고 그것을 손에 남녀를 뒤로 하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아키라는, 로맨스 영화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첫 감상은 그랬다. 치하야 씨도 이런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구나.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뻔하지만, 그렇기에 실패도 없는 전개의 영화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배우들의 연기와 영상미가 좋아 보는 사람의 감정을 한껏 동하게 만들었다. 아키라는 영화의 절정이 흘러가고 있을 즈음 이 장면에서는 어쩌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하고 얼마 없는 관객을 살피기도 했다.
그러니까, 토우야 아키라는 영화에 온전히 집중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그야 당연했다. 바로 옆자리에 하리바야시 치하야가 앉아 있었으니까. 팔걸이에 동시에 팔을 걸친다거나, 어두운 곳에서 손이 스친다거나 하는 이제는 삼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치하야는 그 존재만으로 아키라의 오감을 빼앗는 사람이었다.
아키라는 스크린에 영화가 흘러나오는 내내 치하야의 얼굴을 훔쳐봤다. 치하야는 한 순간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영화의 흐름에 따라 눈을 살짝 찌푸리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하고, 손가락을 움찔거리기도 했다. 평범한 관객의 자세였다. 마치 옆자리에 누가 앉아 있어도 전혀 상관 없다는 듯이.
이 영화가 그렇게 재밌는 걸까. 아키라도 치하야를 따라 영화에 집중하고자 했으나 생각이 자꾸만 다른 길로 샜다. 남녀 주인공에 자신과 옆자리의 남자를 대입해보는, 말할 수 없는 상상. 영화의 막바지에 남자가 여자와 헤어진 기간 동안 어떤 마음으로 지냈는지 미련을 털어놓자 여자가 그것을 들으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펑펑 우는 장면을 보며 상상했다. 만약에 토우야 아키라가 하리바야시 치하야에게 그동안의 마음을 진지하고 솔직하게 전부 이야기한다면, 그 두 사람도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될 수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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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땠어요?”
“뭐, 음, 좋았어요.”
치하야는 이어지는 질문 없이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곤 앞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영화에 대해 더 물으면 어쩌나 긴장하던 아키라는 내심 안도하며 허벅지에 축축해진 손바닥을 문질렀다.
영화가 끝나고 두 사람은 근처 카페에 왔다. 골목의 안쪽에 위치해 넓은 내부에 비해 손님은 한 테이블만 차 있었다. 그만큼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라 아키라는 오히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치하야는 고등학교 시절 종종 찾던 가게라고 했다.
둘은 4인용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치하야를 마주 보고 있어서 그런가 아키라는 자꾸만 목이 탔다. 음료가 나온지 이제 고작 십 분 가량이 지났을 무렵 아키라의 잔은 반 이상 비었지만 치하야의 잔은 두어 입 가량이 줄어있을 뿐이었다. 아키라가 또 다시 잔으로 손을 가져가려는데 치하야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 쓱 밀었다. 에. 아키라의 입에서 바보 같은 소리가 나왔다.
“토우야 군은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아, 그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좋고.”
“왜 저였어요? 영화, 같이 보고 싶다고 한 거.”
여러 의도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어째서 이 영화가 보고 싶었던 것인지. 왜 하필 이 영화를 당신에게 고백한 사람과 보고 싶었던 것인지. 고백한 사람에게 함께 로맨스 영화를 보러 가자는 청을 받는 당사자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인지. 아키라는 슬슬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치하야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모로 기웃거리다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을 검지로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사실 다음 작품으로는 본격적인 로맨스를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난 로맨스는 해본 적이 없으니까…… 고민하던 중에 그걸 들은 편집자님이 마침 좋은 영화가 개봉했다고 참고가 될 거라고 추천해주더라구요. 혼자 보는 것보단 다른 사람의 감상을 듣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아키라는 대답을 들으며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아니, 어떻게든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치하야의 입에서 기대하는 말이 나올 리 없다는 것은 아키라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싹을 잘라버리는 말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았다. 언제나였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말인데도. 고작 극장 한 번 같이 갔다고 들떠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뜨거워지는 속에 아키라는 차가운 잔을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셨다. 에이드의 탄산이 되려 속을 풀어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풀리지 않은 마음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간다.
“그래서 오늘 만난 거예요?”
“응?”
“다음 작품 때문에 인터뷰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예요? 그래서 같이 영화도 본 거예요? 다른 사람의 영화 감상이 궁금해서,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던 아키라는 치하야의 묘한 표정을 보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표정으로 계속 아키라를 바라보던 치하야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상승했다. 치하야는 급히 손을 입가로 가져가 입술을 가렸지만, 새어나오는 웃음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습게 보이는 걸까. 아키라는 후회되는 마음에 가만히 치하야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 시선을 멀리 하고 한 모금 남은 에이드를 전부 마셔버렸다. 그렇게 치하야의 시선을 피하며 대치하기를 얼마일까 (고작 십 초 남짓한 시간이었겠지만 아키라에게는 십 분이 넘는 시간으로 느껴졌다) 치하야가 테이블 위를 톡톡 쳐 아키라의 시선을 끌어온다.
“아…… 그러니까, 데이트 신청이었는데. 하하.”
아키라는 치하야의 얼굴을 보고 모든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민망한 듯 볼께를 긁적이는 치하야는 눈썹은 아래로 살짝 쳐져 있고, 억지로 웃는 듯 오른쪽 입꼬리만 올라가 오른쪽 눈만 찡그려진 채였다.
“갑자기 토우야 군이 좋아진다거나, 그렇진 못하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래도 나 그런 쪽으로 생각을 아예 안 해본 건 아니거든요. 데이트라도 한 번 해보면 나도 토우야 군도 뭔가 보이지 않을까 해서. 영화 관람은 왕도의 데이트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
아키라는 당장이라도 대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만 작은 목소리로 겨우 내뱉었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처음 느끼는 감각이다. 치하야와 함께 있으면 그에게 가진 가장 밑바닥 감정까지 전부 드러내고 싶은 욕심이 들어 조심할 필요가 있을 정도였다.
쉬이 말을 더 잇지 못하는 아키라 대신 치하야가 먼저 운을 뗀다.
“오늘 어땠어요?”
“좋았어요.”
“다시 말해줄래요?”
“어, 좋았다?”
“아니, 그거 말고. 지난주에 했던 말 있잖아요.”
지난주에 했던 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단번에 이해했다. 아키라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얼마나 냉정하지 못하고, 쉼게 침착함을 잃고, 감정적인 사람인지 깨달았다. 한 번도 사치라고 생각했던 고백이다. 두 번은 더욱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이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은 아키라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토우야 아키라는, 아무리 머리가 복잡해도 판세를 읽고 누구보다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전해야 했다. 전하고 싶다.
“치하야 씨. 좋아합니다. 저랑 사귀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