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마, 빌렸어요?"
"자리가 없길래 어쩔 수 없었어."
"뭐가 어쩔 수 없어요? 잠깐 떨어져 앉는 게 어때서요."
"넌 몰라도 난 안돼."
"정말이지…"
채유하는 텅 빈 영화관 안을 바라보았다. 개봉하자마자 전석 매진일 정도로 유명한 로맨스 영화를 백지한과 보러온 참이었다. 평소에 즐겨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채유하는 백지한과 보는 영화를 대부분 로맨스로 골랐다. 그도 그럴 게, 저를 사랑한다고 대뜸 나타난 이가 정작 연애조차 해본 적 없다니 문학 작품이라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니, 애초에 영화를 제대로 보지 않으니 도움될 거란 기대는 안 하지만. 그와 다니는 대부분은 그랬다. 갑자기 놀이공원을 전부 빌린다거나 백화점을 빌린다거나. 대체 그의 재산은 얼마이길래 단순히 저를 남들에게 보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건물들을 빌릴 수 있는 걸까? …정말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의 매력이 돈도 아니고, 월급쟁이의 통장을 생각하자면 비참해지니까. 채유하는 제 품에 있는 팝콘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 자리를 찾아 발을 옮겼다. 저는 영화관을 턱하니 빌리는 상대로 팝콘은 제가 사줄게요, 같은 말을 한 거구나. 이런 모습을 백지한이 좋아해서 다행이지. 그나저나…
"예매한 자리가 어디였죠?"
"상관있어? 우리 밖에 없는데."
제 뒤를 조용히 따라오던 백지한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눈을 깜박였다. 키가 큰 건 알고 있었는데, 새삼 계단 몇 개를 사이에 놔도 비슷한 시선인 게 신기할 지경이다. 한참 그의 얼굴을 살피자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백지한이 입을 열었다.
"안 앉을 거야? 영화 곧 시작하는데. 기대했다며."
"선택지가 많으니 오히려 못 고르겠네요…"
그의 얼굴을 구경하느라 발걸음이 늦은 거지만, 애써 핑계를 대고, 평소 자주 앉는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보는 영화에 따라, 영화관에 따라 영화를 보기 좋은 자리가 다르다는데, 역시 저는 중간에서 뒤쪽 자리를 앉는 게 마음이 편했다. 오늘은 뒤에 사람이 없으니 더욱더 마음 편하게 앉을 수 있고. 이번에 보는 로맨스 영화는 고전영화였다. 꽤 오래된 영화가 다시 개봉하는 탓에 자리를 잡는 게 어려울 지경이었다. 집근처에 있는 영화관을 그때마다 예약해 보던 때와 다른 수준이었다. 그렇게 겨우 잡은 두 자리는 아쉽게도 각각 한 자리씩 남은 자리로 당당하게 백지한 씨에게 말했는데. 그는 퉁명스런 표정을 지으며 너무 떨어져 있어, 라는 답 따위를 내놓았다. 그럼 어떡해요, 자리가 없는데. 대놓고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내자 백지한은 이 영화를 꼭 봐야겠어? 라는 질문과 함께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날짜와 시간을 알려준 게 전부였다. 설마 했는데, 정말 영화관 하나를 전부 빌렸을 줄은…
"…백지한 씨."
"왜."
"스크린은 앞에 있어요."
"알아."
아, 이 대화. 왠지 익숙하다. 그러고보니 그날도 영화를 보러 갔었는데. 영화를 보지 않고 저를 보는 시선에 잔소리를 했으나 전혀 들은 척을 하지 않았던 날이었다. 이후로 영화를 볼 때마다 그는 영화가 아니라 제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럴 때마다 앞을 보라고 꾸준히 말해도 듣지 않으니 제 쪽에서 먼저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제게 있어 부담스럽다. 같이 영화를 보러 왔으면, 영화를 봐야 할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영화관의 불이 꺼지고 영화사 소개를 시작하며 배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영화답게 내용은 얼추 알고 있었다. 화려한 파티장 안에서 마주하는 두 사람의 시선, 사랑에 빠지고, 상대가 저와 같은 마음인지 확인하고 싶어하고, 오해가 생기고… 로맨스 영화라면 있을 법한 장면들이 지나고 나서야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가장 유명한 장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바로 주연들이 바다를 걷는 장면이었다. 아, 저 여배우 진짜 예쁘다. 노을진 배경으로 모래사장을 걷는 여자 주인공은 긴 머리가 휘날린 채 남자 주인공에게 대사를 말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낮출 생각은 전혀 아니지만, 백지한 씨도 분명 저 얼굴을 보면 저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을텐데. 그를 찾는 배우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솔직히, 남자 주인공보다 잘생긴 얼굴이니까. 그런 그가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어 저도 모르게 흘긋 바라보았다. 찰나의 시선도 놓치기 싫은 듯이 백지한은 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제 쪽이었다. 민망하게.
'나는 당신에게 내 마음을 주었다오.'
문득, 저를 크리스틴이라 부르던 얼굴을 떠오른다. 영화관에서 겪은 신기한 일은 이후로 겪은 적이 없었다. 제가 영화 속으로 들어가 남자 주인공이 저를 여자 주인공으로 알고 있던 상황. 그는 제가 알고 있는 남자 배우의 얼굴이 아니라 백지한의 얼굴이었으나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틴을 원했고, 갖고자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했고, 자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 말했다. 유령은 말했다. 자신의 모습이 백지한 씨의 모습인 걸 당사자에게 말하지 말라고. 그는 제가 보고 싶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그때의 그는 제가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을까? 확신해서 답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사랑하는 일에 망설임이 있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백지한은 당당하게 말했다.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거라고, 그리고 지금 백지한을 사랑하게 된 저는 결단코 그가 그런 말을 했기에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뭐가 됐든, 그날 본 백지한의 모습을 본인에게 말한다면 좋아할 게 뻔했다. 그는 설화계 사람이니 내가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해도 믿어줄 사람이었다. 단순히 꿈이라고 결론을 지었으니 꿈에 나왔다고 해도 좋아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말해주기 싫네."
"뭐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겁기는."
"영화는 재밌었어요?"
두 주인공이 바다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웃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났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자리에 일어나 백지한에게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나름."
"제대로 보지도 않았으면서…"
"나한테 너보다 재밌는 건 없어."
"또 그런 말이나 하고…"
그의 입에서 단골 멘트처럼 나오는 말이니 이제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저를 보는 게 재밌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혹시 웃긴 표정을 짓나 고민이 들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수줍게 웃던 여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질문은 무언가 기대를 갖고 한다는데… 솔직히 원하는 답이 있긴 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면, 이 정도는 원해도 괜찮지 않을까? 괜히 목을 가다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와 다르게 내려가는 계단에서 그를 올려다보자 무언가에 압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내 뒤를 쫓아다녔구나.
"아까 여자 주인공이요. 어땠어요?"
"뭔 말이야?"
"되게 예쁘게 생겼죠?"
"기억 안 나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해요?"
"머리가 길었던 건 알아. 너랑 비슷한 길이라서."
이 사람, 정말… 그 얼굴에 관심도 안 가졌단 말이야? 그가 하는 말에는 전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저와 비슷한 부분만 기억하는 그를 보자니 밀려오는 감정을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제가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점과 그가 내보이는 애정이 무거우면서도 기쁘다. 이러다 영영 그를 시험하게 되면 어쩌지. 백지한이라면 그 또한 좋다고 답할 테지만. 다음 데이트 장소도 영화관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