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이트 장소: 극장
메인 주제: 데이트
그녀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을 좋아한다. 그녀의 입술에서 지루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녀가 지루하다고 말했다.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였지만 분명하게 들렸다. 지루하다고.
그녀는 눈치 챈 것이다. 시간이 제자리에서 돌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결말부분에서 다시 처음시작 부분으로 돌아오고, 우리가 먹고 있는 팝콘의 양은 줄어들지 않고, 화장실을 가려고 하면 영화관으로 돌아오게 된다. 무엇보다 이 공간 안에 나와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다. 이능력이라면 나의 반 이능력으로 없애버릴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이능력이 아니다. 누군가, 이능력을 넘어선 범주의 행위이다.
영화는 삶을 가리킨다.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는 다큐멘터리인데 한 여성의 삶이 담겨있다. 여성은 남성과 결혼하면서 아이를 낳고, 폭력성을 드러낸 남성을 향해 저항도 해보고 애원도 해보다가 끝내 포기한다. 여성은 깨닫는다. 삶은 나와 아이에게 덩그러니 놓여 있다고. 아이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와 다른 삶을 살길 원한다. 카메라가 잠든 모녀를 비춘다. 잠깐의 평화...남성은 평화를 깨뜨리면서 등장한다. 남성은 돈을 요구할 때만 집에 들어왔다. 아내는 생각한다. 저 남자만 없다면 행복할까? 여성은 칼을 들었고, 푹푹, 끔찍한 소리가 영화관에 울렸다.
영화관 좌석에 앉아 그녀의 삶을 관람했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자이는 마음만 먹으면 영화를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영화관에서 빠져나가는 방법 따위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이 영화를 좀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작할 때마다 내용이 추가되거나 바뀌었다. 언제나 영화 속에는 그녀가 있었으므로, 영화의 주제는 그녀의 삶이었다.
그녀는 밝고 우아한 삶을 동경했다.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을 보면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밝고 우아하게 생활하려 노력했지만 속은 썩어문드러져 있었다. 뒷골목에서 담배 피는 그녀의 모습이 쓸쓸해보였다. 걸음걸이는 위태로운 술주정뱅이 같았다. 흑백 영화는 그녀의 삶이 회색임을 암시한다.
다자이로서는 의외의 과거였다. 다자이가 아는 그녀는 밝고 우아했다. 태양처럼 눈부신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담배도 피지 않고, 몸에서는 향기가 난다. 걸음걸이도 모델처럼 우아하다.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영화 속 그녀에게서 다자이가 아는 그녀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조작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단지 픽션일 뿐이라고 넘어갈 수 없었던 건 옆에서 무너지고 있는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가 있다. 온몸을 발가벗기듯 그녀의 치부가 까발려졌다. 먹구름에 가려진 태양처럼 빛을 잃은 그녀의 혈색은 죽어가고 있음이 보인다. 이 공간이, 이능력도 아닌 그 어떤 인과율이, 어쩌면 신이라는 존재가 그녀의 존재를 약하게 만들고 죽이려는 셈이다. 그녀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려는 내 입술도 꿰맨 듯이 열리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영화관 좌석에 앉아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죽어가는 그녀를 목격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죽음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것이 다자이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그녀에게 죽음은 힘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평온한 미소로 잠들 듯이, 혹은 꿈꾸는 표정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그녀는 어떤 유언도 남기지 않았고, 어떤 마지막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무엇도 미련이 없었다. 원래 돌아갈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그녀는 다자이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