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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갈까요?

아무리 그래도 이 한마디로 하와이행 비행기를 탈 수 있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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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퀘는 칼데아에서의 모든 일이 끝나고, 무료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예전처럼 다중 계약으로 서번트를 부릴 이유도 없으므로 칼데아 모두에게 작별 인사도 고한 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별하지 않은 예외가 있었다. 마력이 한참 부족한, 달퀘같은 마스터는 혼자의 힘으로 서번트의 영체를 유지시킬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육체를 입은 영웅왕-길가메시가 당당히 달퀘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현재 둘은 동거, ...반쯤 사실혼 관계였다. 칼데아에 있을 때부터 연인 사이였으니, 새삼스러운 것도 없었다.

데이트랍시고 제법 즉흥적으로 놀러 다녔다. 그럴 여유, 그럴 재력이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일 년간 인리를 위해 힘낸 달퀘를 위한 마땅한 포상에 더 가까웠다. 처음에는 자신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금액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던 달퀘였지만 슬슬 뭐든 최고급으로 다니는 것에 익숙해졌다. 손은 여전히 떨렸지만, 표정 관리는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바다로 놀러 갈까요?”

공기가 점점 물기를 머금고 후텁지근해지는 시기. 달퀘는 더위를 잘 타는 체질인 탓에 계절 중 여름이 가장 괴로웠다. 싫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처질 수밖에 없는 날씨는, 아주 좋아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바다는 여름의 로망 같은 거니까. 티비에 나오는 푸른 물결은 사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흐음, 길가메시는 별말 없이 달퀘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달퀘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다가 붉은 눈동자에서 멈춘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쪽은 달퀘였다. 허락 없이 입을 맞추는 건 달퀘에게만 허락된 왕의 자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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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냥 해본 말이었고, 왕님도 대답하지 않으셔서 끝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얼결에 이른 아침, 호텔 체크인까지 끝낸 달퀘가 놀란 건지 그냥 멍한 건지 모를 표정으로 제 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것조차 벨보이가 금방 들고 가버렸으므로, 사실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안내인의 뒤를 따라 올라가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아 몇 번이나 바다를 향해 난 창을 바라보았다. 해변과 특히 가까워 투명한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마치 바다 위를 날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방으로 들어서면, 그야말로 호화롭다는 말로 표현되지 않을 풍경. 해변을 향해 난 창은 거실 한 면을 모두 채울 정도로 컸다. 창가로 달려가 태양 빛이 내리쬐는 눈부신 바다를 바라보았다. 예쁘다... 아까의 혼란스러움, 당황스러움 따위가 날아가버리는 경치였다. 가격에 관한 생각은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니 다행이군.”

원래라면 안내인에게 각 방의 설명과 서비스에 대한 안내를 받아야 했지만 달퀘가 창밖의 풍경에 넋을 놓자, 길가메시는 안내인을 돌려보냈다. 달퀘가 이곳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없다. 사용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안내인은 있을 필요가 없었다. 달퀘는 해변으로 나갈 준비를 하면서도 힐끔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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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가 되어가지만, 여전히 모래사장에 쏟아지는 볕은 따가웠다. 날이 꽤 좋은데도 불구하고 바닷가에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와이 땅을 밟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익숙해진 달퀘는 남색 비키니 위에 하얀 겉옷을 걸친 차림으로 파라솔 그늘에 비치된 제 선베드에 앉았다. 호텔 내부 카페에서 사 온 과일주스를 쪼옵 마시며 마찬가지로 선베드에 누워있는 길가메시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편한 차림이었다.

“즐거워 보이는군?”

“네, 재밌어요.”

처음 왔을 때는 벙찐 얼굴이었으니까. 달퀘는 얼굴 만연에 미소를 띤 채로 다시 빨대를 물었다. 다 마셔가는 컵에서 쿠르륵, 하는 공기 소리가 들렸다. 맛있다. 가서 다른 것도 시켜볼까. 그런 생각을 하는 달퀘를 제법 흡족한 표정으로 보던 길가메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에는 들어가지 않느냐?”

“음~ 왕님도 안 들어가실 거잖아요?”

나중에 호텔 수영장 먼저 써볼까 봐요, 라고 덧붙였다.

“흐음, 같이 들어가는 게 좋다면 욕조도 있는데 말이다.”

“거절은 하지 않겠지만 전 바다가 더 좋아요.”

예전이었다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새빨개진 채로 도망쳤을 달퀘였지만, 긴 시간을 함께했다고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혼자 들어가서 놀기 싫다는 건 결국 들어가고 싶긴 하다는 소리였다. 어린아이더냐, 네놈은. 달퀘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놓은 길가메시가 선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원한다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달퀘는 환한 얼굴로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둘은 컵의 얼음이 다 녹아버릴 때까지 선베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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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퀘는 호텔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너무 열심히 놀았나, 피곤하네. 말끔히 씻고 뽀송뽀송해진 채로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으니 노곤해서 가물가물 눈이 감겼다.

“아직 저녁 안 먹었는데에...”

잠을 쫓으려 쭈욱 기지개를 켠 달퀘 옆에 길가메시가 걸터앉는다. 마찬가지로 말끔히 씻은 모습이었다. 뭐, 같이 들어갔으니까. 길가메시 쪽으로 몸을 돌린 달퀘가 느릿하게 웅얼거렸다.

“룸서비스 시킬래요.”

“마음대로 하거라. 일일이 묻지 않아도 된다.”

그 말에 달퀘는 몸을 일으켰다. 졸음기 가득한 눈은 이미 반쯤 감겨있는 상태였다. 실내 슬리퍼를 신고 타박타박 유선 전화기 옆 태블릿으로 다가갔다. 전원을 켜니 음식의 사진과 이름이 떴다. 적당히 맛있어 보이는 걸 가득 담고 있으면 어느새 길가메시가 뒤에 서서 몸을 기울여 태블릿을 보고 있다. 달퀘는 고개를 돌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까치발을 들고 쪽,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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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부르니 더 이상 잠을 거부할 수 없었다. 소파베드에 반쯤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달퀘를 보며 길가메시는 쯧, 혀를 찼다.

“어디까지 시중을 들게 만들 셈이냐, 달퀘.”

막상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따스했다. 공주님 안기로 달퀘를 침대까지 옮긴 길가메시는 그녀를 내려놓고 자신도 옆에 자리했다. 그리고 그녀를 품 안에 가득 끌어안고 자신도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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