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유하는 누군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라고 해도 자신을 바라보는 이는 여기서 단 한 사람이었으니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다시 고개를 돌려 제 앞에 놓인 풍경을 바라보아도 집중이 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이는 바로 백지한, 처음 만나자마자 제게 반려라는 호칭을 쓰며 제 곁을 맴도는 이였다. 그와 만나게 된 이유나 그가 사실 어떤 존재이고, 제게 놓인 상황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복잡한 설명은 물론, 아직까지도 제게 놓인 상황을 이해하기란 어려워서 제대로 된 설명을 하기 어려운 탓이다. 중요한 건 백지한이란 사람이 저를 반려라고 칭한다는 것. 하여튼 오늘은 관광지에 촬영이 있는 날로, 다음날 휴일이 있는 걸 이용해 여행까지 온 날이었다. 본래라면 그가 아니라 유예 씨하고 올 예정이었다.
*
"이번에 촬영이 잡혀서요."
"그렇습니까.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네에, 근데 엄청 유명한 관광지라서… 다음날이 휴일이기도 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시겠네요."
"그쵸? 그러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아예 머물었다가 오신다는 말씀입니까?"
한쪽 눈썹을 휜 채 말하는 유예를 보며 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 -사실 그게 어떤 표정인지 저도 예상은 가지 않지만- 을 지은 채로 그를 바라보자 유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원래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곧바로 알겠다고 답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야 유예에게 있어 저는 위험한 상황에 둘 수 없는 주인과 마찬가지였으니, 그나마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집을 벗어난다는 건 그에게 있어 쉽게 괜찮다고 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이다. 그러나 저는 일을 해야 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지 집에서 놀고 먹는 백수가 아니었다. 일을 하러 나가야 한다는 건 유예도 이해할 부분이고. 그러면 역시 휴일에 놀겠다는 부분을 납득할 수 없어보이는데… 물론, 하루이틀 지낸 사이가 아니다. 제 쪽에서도 준비해둔 멘트가 있었다. 저는 양손을 주먹 쥐고 유예를 바라보았다.
"저하고 같이 가요!"
"예?"
제 말에 표정변화가 거의 없는 유예의 얼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게 보였다. 유예의 무표정 외 다른 얼굴은 보기 힘든데, 그중에서 웃는 얼굴이 가장 귀했고, 지금처럼 놀란 얼굴은 그나마 자주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저와 여행을 갈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사람의 표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웃기면서도 제가 너무 성급했나 싶어 잠시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유예의 표정이 보였다. 답이야 금방 돌아오겠지만, 그가 말을 내뱉을 때까지 저는 꽤 긴장된 상태였다.
"정확히 날짜가 어떻게 됩니까?"
*
그 말이 허락의 의미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저는 유예와 몇가지 약속을 한 후, 휴일에 머물 숙소까지 정한 채로 촬영날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유예하고 한 약속은 평소에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혼자 다니지 말 것,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할 것, 위험한 일에 나서지 말 것. 마지막 말은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 쪽에서 위험부담을 안아달라고 부탁한 셈이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반대로 유예 씨에게는 너무 눈에 띄지 말 것이란 조건 하나를 가지고 모든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을 때, 변수가 일어났다. 어쩌면 완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을까.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해도 제 일을 먼저 생각할 유예에게 차마 그날 시간을 비울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동료의 부상으로 인한 부재는 유예에게 있어 우월을 가리기 힘든 일이라는 건 저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가 없어도 괜찮을 거라 내심 생각하고 있었으니 저는 몇 번이고 괜찮다는 대답을 남겼다. 그런데도 여행을 취소할 수 없겠냐는 말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기껏 얻어낸 휴가였다. 자격자라며 알 수 없는 일에 휘말리고, 일에, 상사에 치여 겨우 얻어낸 여행. 심지어 이번이 아니면 언제 올 지 예상할 수 없는 유명한 관광지였다. 일 때문에 어차피 가지 않을수도 없었고, 서로의 일정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제 한숨이 그에게 무거웠던 걸지도 모른다. 한참 조용하던 휴대폰에서 유예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실 저 대신 가줄 분을 찾았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나서야 정말 그와 여행을 갈 수 없을 거란 현실이 다가온 만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처럼 들려 두근거림도 감출 수 없었다. 저는 다급하게 누군데요, 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온 결과가 이거였다. 백지한이 넓게 트인 풍경을 바라보는 저를 바라보는 상황. 사진을 여러 번 찍으면서도 백지한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긴장된 상태를 풀 수가 없었다.
"너…"
"네…?"
드디어 올 게 왔다, 는 생각이 들자 그가 내뱉은 말은 제 예상과 빗나간 말이었다.
"왜 하필 그 녀석이야?"
아니, 오히려 예상할 수 있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녀석이라면 유예 씨요?"
"그래, 같이 오자고 했다며"
"그야 제일 가까이서 저를 걱정하잖아요."
"네가 냅두니까 그 녀석이 주제도 모르고 붙어있잖아."
"전 좋은걸요. 요리도 해주고."
"그 정도는 나도 할 줄 알아."
네, 네. 그러시겠죠. 그가 해준 요리를 모르지 않지만, 불만스레 얘기하는 걸 전부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유예 씨가 제 집에 머물겠다고 했을 때 저도 당황했을지언정, 지금은 그가 있어준 뒤로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른다. 누구처럼 불만만 늘어놓는 경우도 없고. -너무 없어서 문제이긴 하지만- 무섭게 노려보는 일도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없으면 안 될 지경에 놓였단 말이지. 요리는 몰라도, 집안일을 하는 백지한의 모습은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그라면 분명 고용인을 두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까지도 백지한은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유예한테 당부했던대로 백지한도 촬영이 끝날 때까지 제 주변을 맴돌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람들 시선을 끌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촬영이 끝난 다음이었다. 제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시선마저 저를 쫓아다녔다. 그게 당연한 사람처럼.
"그러지 말고. 사진 찍을래요?"
"무슨 사진?"
"여기 풍경 사진이요. 이 관광지가 얼마나 유명한지 알아요?"
"…아예 모르진 않아."
뜸을 두고 답한 부분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때, 지금 주제를 돌렸다는 게 더 중요한 사실이지 않은가. 일 때문에 찍은 사진은 당장 볼 수 없을 뿐더러 모델이 있기 때문에 풍경만 담은 사진은 처음 찍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저는 챙겨온 카메라를 들고 유명 관광지답게 지정해둔 포토존에 서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촬영 끝나자마자 시작된 여행이니 눈에 보이는 건 산에 걸린 해, 노을진 풍경, 그대로 물결에 그려진 노을의 색, 그리고…
"왜 그래?"
제 카메라에 담긴 백지한의 모습에 저는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내렸다. 풍경 사진이라도 찍으라고 기껏 말했는데. 그는 여전히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래서는 뭘 못 하겠네.
"…밥 먹으러 갈래요?"
솔직히 아주 기대가 없지 않았다. 유예하고 가는 여행은 마음 편할 거란 생각에 내린 판단이었다. 그의 취급이 조금 미안하지만, 일상적인 부분에서 유예는 굉장히 도움이 되고 편한 사람이었다. 사소하게 내 가방을 들어준다거나 찾기도 전에 휴지를 건넨다거나. 백지한에게도 그러한 모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다짜고짜 반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보인다면 좀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는 떡 줄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 김칫국 마시는 걸 보면 나도 참 나지만. 그래도, 어쩌면, 좋은 사진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여기, 왜 유명한지 알고 있어요?"
"…응. 그건 갑자기 왜?"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더니 대뜸 비싼 레스토랑에 데려가는 그를 따라 한참 스파게티 면을 말아 제 입에 넣은 참이었다. 한국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산과 강이 어우러진 자연 중에서도 우리가 온 곳이 유명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풍경 삼아 사진을 같이 찍은 연인은 영원히 이뤄진다는 것. 이곳이 어떤 관광지인지 알고 있는 그가 단순히 소문이라고 해도 떠도는 이야기를 모를리가 없었다. 우리가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서도. 바로 옆에 놓인 와인잔을 들며 저는 고민없이 의문을 내뱉었다. 그렇게 내 사진을 갖고 싶어 했으면서.
"사진 찍어달라고 할 줄 알았어요."
"당연히 갖고 싶어."
"근데 왜 안 찍었어요?"
"그걸론 안 되니까."
"뭐가 안 돼요?"
"…있어, 그런 게."
아, 또다시 뜸을 둔 대답이었다. 그가 제게 숨기는 게 있을 때마다 말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겼다. 그가 숨긴다고 하면 저는 알 수 있는 방법 따위 없는데도. 괜스레 느껴지는 불만에 잔에 채워진 와인을 전부 비웠다. 술은 많이 마시지 말라는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백지한은 언제나 그랬다. 좋아한다고 말한 건 본인이면서. 정작 두근거리고 고민하는 건 제 쪽이었다.
심지어 기껏 잡아둔 숙소에 돌아간 건 저 혼자였다.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며 아침 일찍 데리러 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저는 방이 두개나 있던 숙소에서 혼자 잠에 들어야만 했다. 저를 결코 혼자 냅두지 않을 성정이니 숙소에는 저 혼자였어도 제가 위험할 때 나서줄 존재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그런 게 중요한가? 이 방에 들어오기까지 제 가슴을 뛰게 한 그가 없는데.
"이게 무슨 여행이냐…"
사진도 찍지 못했고, 마지막까지 함께 있지도 못했다. 제 마음에도 확신은 없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한 채 잠에 들었다.
*
"제대로 못 잤어?"
"그럴 일이 있었죠."
차마 백지한 씨가 없어서 못 잤어요, 라는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제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고, 딱히 그가 없어서 아쉬운 건 아니었다. 정말로. 저의 탐탁치 않은 표정을 백지한은 알아챈 건지 운전석에 앉은 이후로도 저를 흘긋거리는 시선이 이어졌다. 기껏 낸 휴가의 마지막 시간을 부정적인 감정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작은 한숨과 함께 백지한을 바라보았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다시 와."
"다음에요?"
"응."
"여기를? 왜요?"
"사진 찍고 싶어."
"어제는 안 찍었잖아요."
"지금 말고. …네가 내 연인이 되었을 때."
그 말을 하던 백지한의 귀가 붉어진 게 눈에 띄었다. 문득, 제 카메라에 담겨있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풍경 사진을 찍는 도중 제 카메라에 담긴 그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찍은 탓에 남아있는 사진이었다. 잠들기 직전에도 그 사진을 봤다는 사실이 떠올라 저는 그의 말에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어차피 혼자 찍힌 사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지울 생각을 했던 것까지도. 하지만 제게서 시선을 뗀 적 없는 그가 지금은 다음에도 오자는 말 한마디를 하며 붉어진 얼굴로 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저는 돌아가서도 그 사진을 지울 수 없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 말았다.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참아낸 채, 저는 가까스로 알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맑은 하늘 아래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