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자의 섬의 해변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안타깝게도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다. 섬의 거주민들이나 가끔 오가는 평범한 해안. 굳이 이곳까지 찾아오는 관광객은 없는 조용한 장소. 그러나 그런 적막한 점이 더욱 경치를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그런 장소.
그리고 그 조용한 해변에, 오늘은 두 개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해변에 와보는 건 처음인가?’
실버는 맨발로 모래사장을 누비는 또 다른 그림자를 눈동자로 좇았다.
벌써 노을이 지기 시작한 탓에 수평선부터 모래톱까지 모든 게 붉게 불타오르고 있는 해변은 분명 따스해 보였지만,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은 계절을 잊게 할 정도로 차가웠다. 시각과 촉각의 부조화 속. 새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파도를 밟는 아이렌을 지켜보고만 있던 그는 조금 전 학교 정문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아이렌, 이런 늦은 시간에 어딜 가는 거지?’
릴리아를 따라 교외로 외출하고 온 실버는 홀로 교문을 빠져나가는 아이렌을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평소 늘 신고 다니는 워크 부츠 대신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있던 아이렌은 먼 곳을 힐끔거리며 답했다.
‘바다요.’
‘바다?’
‘네. 멀리 가진 않을 거예요.’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이 어디였더라. 실버는 주변 지리를 떠올려 보다가, 학교와 해안 간의 거리가 아주 짧지는 않다는 걸 눈치채고 탄식했다. 지금은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지만, 분명 조금만 있으면 해가 지고 거리가 어두워질 텐데. 그런 시간에 마법도 쓸 수 없는 아이렌이 혼자 돌아다녀도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돌아올 생각이지?’
‘그건 정해두지 않았는데요. 자정 전까진 와야겠죠?’
‘자정 전?’
‘예.’
저 말은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 돌아오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어 보인다. 조금 더 일찍 돌아올 생각이라면 다른 시간을 기준점으로 잡았을 테니까. 노을이 지기 전이라던가, 저녁 식사 전 같은 식으로 말이다.
길도 보이지 않을 어두운 시간에 홍일점 혼자 떠도는 걸 내버려 두기엔 너무나도 선량한 실버는, 결국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혹시 동행해도 되나?’
다행스럽게도 아이렌은 쉽게 동행을 허락했다. 허락하지 않는다면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다는 충고라도 하려고 했던 실버는 그렇게 군말 없이 상대를 따라나섰고, 이 해변에 도착했다.
어째서 아이렌은 바다를 보고 싶어 한 걸까. 실버는 그게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모래사장에 도착하자마자 신발과 양말을 벗어두고 파도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유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나 즐거워하는 걸 보면, 그냥 더위를 식힐 겸 쉬고 싶어 온 걸지도 모르지. 북적이는 곳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렌의 성미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런 고즈넉한 장소가 더 취향일지도 모르고.
게다가 아이렌은 바다를 좋아하지 않던가.
언젠가 들은 바에 의하면, 아이렌은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서 일생을 보낸 그는 자신이 얼마나 바다를 좋아하는지 자주 말했고, 간혹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가 섬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도하곤 했다.
그렇다면 아이렌은 고향이 그리워 바다를 좋아하는가? 그런 생각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당사자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곧 해가 지겠군.’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난색으로 가득하던 하늘도 슬슬 남청색이 짙어지고 있다. 제가 있다는 것도 잊은 듯 발을 적시며 노는 아이렌을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으니 말은 해둬야겠지.
“아이렌, 슬슬…….”
그때.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상대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부자연스러운 멈춤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닫은 실버는 바다 너머를 바라보는 아이렌의 뒷모습에 숨을 삼켰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치마도,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도, 발밑에 깔린 파도도,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데 아이렌 만큼은 고개 하나 까딱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수평선만을 보고 있다. 그 모습은 꼭 합성 영상처럼 인위적이라,
‘무언가 발견한 건가. 아니면,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실버가 무슨 일이냐 물으려는 그때.
그 자리에서 뿌리내린 듯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던 아이렌이, 성큼성큼 육지를 등지고 걸어 나갔다.
“아이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발걸음이 너무 비장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운동신경이 나쁜 상대가 급류에 휩쓸리진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었을까. 등골이 오싹해진 실버는 성큼성큼 아이렌에게 다가갔다. 달려가듯 뛰어든 바다. 신발이나 양말을 벗을 틈도, 바짓단을 걷을 틈도 없이 파도 속으로 걸음을 내디딘 그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이렌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기우뚱. 붙잡은 팔이 억센 탓에 몸이 휘청거린 아이렌은 치마 끝이 아슬아슬하게 수면에 닿을 거리에서 멈춰 섰다.
그제야 뒤를 돌아본 그는 새하얗게 질린 실버의 얼굴에 작게 탄식했다.
“……선배, 신발은 벗고 들어오신 거예요?”
아이렌이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은 저것이었다. 보아하니 그는 어째서 상대가 놀란 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엉뚱한 말에 정신이 든 실버는 그제야 제가 너무 힘을 주어 후배를 붙잡았다는 걸 자각하고 손을 놓았다. 구두를 신은 발과 발목에 밀려드는 소금기 섞인 냉기를 눈치채는 건, 그것보다 조금 뒤의 일이었다.
“실버 선배?”
자신은 왜 그렇게 급하게 아이렌을 붙잡은 걸까. 아이렌이 티 내지 않았을 뿐, 방금 제 손길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거칠었는데. 이게 그렇게까지 해서 멈출 행동이었나?
상대의 행동에 놀라긴 했어도 아이렌이 그리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도 않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옷을 다 껴입은 이상 몸이 다 젖기 전 적당히 들어가다가 멈췄을 가능성이 큰데. 어째서 자신은 이렇게 세게,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상대를 움켜쥔 걸까?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답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자신도 지금 무슨 생각으로, 무엇이 계기가 되어 이런 짓을 한 건지 모르겠으니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은 아이렌이 걱정되었을 뿐이라는 거다. 뭐가 그리 걱정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발을 벗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걱정했다는 건 확실했다.
‘대체 왜?’
아이렌이 저 깊은 곳으로 뛰어들기라도 할까 봐? 아니다. 언제나 잔잔한 우울감에 발을 담근 채 그걸 당연히 여기며 사는 아이렌이라 해도 갑자기 불쑥 잘 놀다 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렇다면 방향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줄 알고? 이것도 아니다. 여긴 사방의 풍경이 다 다른데, 어떻게 방향을 헷갈리겠나?
찰나의 시간 동안 답을 찾으려 노력하던 실버는, 문득 파도위로 일렁이는 아이렌의 그림자를 보고 진실을 깨닫고 말았다.
자신은 두려웠던 거다.
아이렌이 이대로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봐.
왜 그런 생각이 든 것인지는 모른다. 평소 옥타비넬의 세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해도 이 여자는 분명 인어가 아니라 사람인데. 해저로 간다고 해도 거기가 고향도 아니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텐데, 왜 자신은 아이렌이 ‘바다 너머’도 아닌 ‘바다’로 떠난다 생각한 걸까?
“아니다, 아무것도.”
아주 잠깐 사이. 어느새 세상이 남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아. 이 애의 눈동자 색이랑 똑같은 파도가 밀려온다.
실버는 일렁이는 물결과 아이렌의 눈동자가 꼭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보여, 결국 정리되지도 않은 생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옷이 다 젖으셨잖아요.”
“말리고 가면 되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으음.”
감이 좋은 아이렌은 실버가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걸 금방 눈치챘지만, 굳이 그걸 짚어 말하진 않았다. 모든 것에 아는 척을 하는 건 현명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상대와 똑같이 말을 아끼기로 한 그는 젖어버린 실버의 바지를 보았다. 밑단뿐만이 아니라 걸어오느라 튄 물방울로 젖은 교복 바지는 이미 엉망이 된 상태였다.
“말리면 된다는 거죠?”
“응? ……그래.”
“그렇다면…….”
이미 엉망이 된 옷이니 더 젖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걸까.
아이렌은 갑자기 몸을 숙여, 손에 닿은 물을 실버에게 뿌렸다.
“에잇!”
실버는 갑자기 상반신에 튄 물방울에 어깨를 움츠렸다. 손끝에 닿는 파도를 살짝 튀게 한 것뿐이었기에 많은 양의 물을 뒤집어쓴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뺨에 닿는 물기에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다.
굳어있는 표정이 풀린 걸 확인한 아이렌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깜짝 놀랐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실버는 제 얼굴에 튄 바닷물을 손등으로 훔치더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물이 튄 부분을 확인했다.
“……선배?”
‘어라, 혹시 기분이 상한 건가.’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습관이 있는 아이렌은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는 실버의 반응에 금세 초조해졌다.
잠깐의 침묵 사이. 제 옷 상태를 점검한 실버가 아이렌의 치마로 시선을 돌렸다. 이러는 사이에 물이 밀려들어 온 건지, 아까까진 아슬아슬하게 수면을 스치던 치마 끝이 지금은 완전히 물에 젖어있었다.
“치마가 다 젖었군.”
“어, 그러고 보니……. 괜찮아요, 다 젖은 게 아니니 그냥 돌아가서 갈아입어도 돼요.”
“아니. 그대로 갔다간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 내가 말려줄 테니 그러지 마.”
“그래도 되나요?”
“같이 말리면 되는 거니, 힘들 것 없어.”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어차피 어려운 마법도 아닌데, 후배 옷을 같이 말려주는 게 뭐가 힘들겠나.
실버는 파도에 따라 흔들거리는 치맛단을 유심히 살피다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젖어도 되겠지.”
“예? ……우왓!”
역시 단련해 온 사람의 몸놀림은 다른 걸까. 실버는 순식간에 몸을 낮춰 손바닥에 물을 퍼 아이렌에게 뿌렸다. 방심하고 있다가 반격당한 아이렌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가,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선배, 잠깐! 장갑은 벗고……. 으으, 저도 봐주지 않을 거예요!”
“바라던 바야. 뭐든 전력으로 덤벼야지.”
“하하, 선배답네요!”
일찍 돌아가자고 말할 작정이었는데, 아무래도 달이 뜨고 나서야 돌아가게 될 것 같다.
실버는 어느새 번민도 잊고,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물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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