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다~!"
"신나보이네."
"그럼요. 저 바다 좋아해요."
"알아."
당연하다는 말투로 대꾸하는 백지한을 보며 채유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죠. 잘 알고 계시겠죠. 제가 말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저에 대해 사소한 부분마저 알고 있는 그가 가끔은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그의 태도에 불만을 갖는 건 아니지만, 저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자랑스러운지 말을 하고 나면 뿌듯한 표정을 짓는 탓이었다. 그렇다고 그에 대해 물어보고자 하면…
"백지한 씨도 바다 좋아해요?"
"응."
"정말요? 역시 넓게 트여서? 청량한 분위기가 좋아서?"
"아니, 네가 좋아하잖아."
이런 식의 대답이 돌아오기 때문에 백지한에 대해 물어보기를 몇 번하다가 관두었다. 애초에 그하고 지내며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 제 앞에 펼쳐진 바다라는 거겠지.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가! 휴가를 쓰려고 해도 몇 번이고 오는 업무 연락에 집에서 편히 쉰 적도 없을 뿐더러 멀리 여행조차 가기 어려웠던 나날. 이놈의 회사 따위 그만둔다고 속으로 외쳤지만, 통장을 보며 결국 착실히 출근하는 자신이 정말 불쌍했던 기억만이 있다. 하지만 귀하고 귀하게 잡은 휴가만을 위해 야근 따위 두렵지 않았고, 드디어 오늘을 맞이했다. 넓은 바다, 화창한 날씨에 빛나는 물결, 그리고 화려한 호텔. …호텔?
"잠깐만요, 저 호텔을 잡은 기억 없는데요."
"기껏 놀러왔는데, 겨우 그런 곳에서 머물 작정이었어?"
"그야 제 예산 안에서 잡을 수 있는 숙소였으니까요."
"내가 있는데 뭐 하러 그러냐는 거야."
"저하고 있을 때, 돈 과하게 쓰지 않기로 했잖아요."
"과하게 안 썼어. 방 하나 잡은 거야."
"아무리 그래도… 아니, 왜 방 하나만 잡아요?"
"안돼?"
"당연하죠!"
백지한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내린 곳은 살면서 TV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호텔이었다. 제가 백지한에게 권한 숙소는 흔히 말하는 펜션이나 원룸으로 이뤄진 방이었는데, 방 정도는 본인이 고르게 해달라고 한 게 불안해서 찾아둔 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 예상과 전혀 다른 호텔이 눈앞에 놓였지만. 그나저나 이만한 호텔이 여기 있었나? 숙소 찾을 때는 못 봤는데.
"설마, 지은 건 아니죠?"
"무슨 소리야?"
"아뇨, 아무것도…"
기껏 해야 짐이라고는 수영복이나 갈아입을 옷이 전부인데도, 그 짐을 옮겨주기 위해 붙은 벨보이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이면 이미 앞선 나가는 백지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채유하는 벨보이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하며 그를 뒤따라갔다. 그가 말한대로 두 사람, 정확히는 백지한 손에 쥐어진 호텔키는 하나였다. 정말 같은 방을 쓰는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런 말은 방을 보고 나서 말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재력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광경이었다. 둘이 쓴다고 하기에 넓은 거실과 부엌, 3개의 방까지. 1박만으로 아쉬운 방에 이럴 줄 알았으면 휴가를 더 썼을 거라고 채유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정도로 넓은 객실에서 왜 화장실은 하나이며, 커다란 욕조가 있는 건지. 애써 시선을 돌리며 방을 구경하자 이를 알아차린 듯이 백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건드려. 네가 허락할 때까지는 절대."
"허락하면 어디까지 건드는 건데요?"
"궁금해?"
"…아뇨."
궁금하다고 말하면 곧장 건들 기세에 채유하는 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도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탓에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게 최선이었다. 매번 이런 식이지. 그에게 말리면 도저히 빠져나올 방법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은 수없이 기다렸던 날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휘말리지 말아야지. 부디 오늘 하루가 무사하기를…!
*
제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그를 흘긋거리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백지한이 저를 쳐다보았다.
"… …"
"불만 있으면 말로 해. 그래야 알아."
"…말하기 전에 알아주면 안돼요?"
"뭐, 원한다면. 노력해보고."
대놓고 부리는 투정에도 백지한은 무리없다는 듯이 답하였다. 그 모습에 어리광을 부린 제 모습이 순간 부끄러웠으나 밀려드는 불만에 다른 감정은 금방 묻히기 마련이었다. 호텔에서 바다에 도착하기 전에는 분명 괜찮았다. 평소라면 잘하지 않을 법한 팔짱까지 끼면서 백지한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바다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바다에 들어가기 위해 자리를 잡고, 수영복 위로 입고 있던 커다란 티를 벗을 때까지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건 다름 아닌 둘만의 여행이었으니까. 돗자리를 대충 깔면서도 바다에 들떠 한 눈 판 사이에 어느새 백지한의 곁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정확히는 저와 비교될 정도로 예쁜 언니들이 잔뜩이었다.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같이 있던 저의 모습 따위 잊었는지 그들은 백지한을 향해 몇 마디씩 건네고 있었다. 아, 그래. 평소에도 같이 다니면 눈에 띄는 사람인데. 정작 백지한은 검은 티에 반바지를 입고 있을 뿐더러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으나 그들에게 중요한 건 옷차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 몰랐을까… 생각해보면 몰랐던 이유도 백지한에게 있었다. 그는 연인이 있던 적도 없다고 했고, 고백을 받은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런 분위기를 만들 사람이 아니었던 거겠지. 그 말에 안심이 되어 지금까지 둘이서도 잘 지내왔는데. 그치만 지금은 다르다…! 여기는 바다라고! 연인이 되기보다 하루 정도 놀기 위해 만나는 사람도 분명 있을텐데! 저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야하는지 고민하자 백지한이 인파를 뚫고 저한테 다가왔다. 그리고 일행이 있다는 말과 함께 다시 단둘이 될 수 있었다.
"좀 더 빨리 밀어낼 줄 알았는데요."
"그 정도로 둘러쌓인 건 처음이라서."
"말도 안 돼…"
"진짜인데."
"그 얼굴로?"
"질투하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좋지만."
지금은 질투가 맞네요. 채유하는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래서는 바다를 즐길 타이밍이 없잖아. 아니, 왜 못 즐기지? 백지한을 못 믿어서? 그는 제가 반려고, 저만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게 어디까지 통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믿어야 하지 않…나? 한참 제 머리를 붙잡은 채 생각했으나 도통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한 가지 알겠는 건 분명하다. 왔으면 즐겨야 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백지한의 팔을 당겼다.
"바다! 들어가요."
"그래."
"이 날을 위해 튜브도 귀여운 걸로 샀단 말이에요."
"알아, 봤어. 그런 건 어디서 구한 거야?"
"인터넷에서 싸게 샀죠."
바로 오늘을 위해! 당당한 목소리로 말한 다음, 한 팔에는 귤 모양의 튜브, 다른 팔에는 백지한을 낀 채 성큼 바다로 향했다.
*
"기세 좋게 가더니. 괜찮아?"
"너무 들떴나봐요…"
채유하는 돗자리에 누워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백지한을 향해 웃어보였다. 그의 말대로 기세 좋게 바다에 들어갔지만, 나온 시간은 기껏 해야 30분 남짓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저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물에 빠지는 게 그에게 좋은 기억이 아닌 걸 알면서도 들뜬 탓에 깜박했었다. 그보다 튜브로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으나 파도에 뒤집혀 그대로 휩쓸린 탓에 백지한한테 들려 나온 걸로 마무리되었다. 솔직히 조금 놀란 게 전부였지만, 백지한의 사색된 표정을 보자니 괜찮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까와 달리 흐린 날씨가 조금 춥기도 했고. 저에게 집중하는 백지한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 봐."
"어디 가려고요?"
"잠깐만."
어딜 가냐고 되물어볼 시간도 없이 자리를 뜨는 백지한을 눈으로 쫓았다. 어딜 가도 걱정될 사람은 아니지만, 저 모르게 또다시 사람들한테 둘러쌓이는 게 아닌지 신경 쓰였다. 그렇다고 지친 상태로 따라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쉬고 나면 금방 오겠지.
…
… …
… … …
이 사람, 왜 안 와?
한참 눈을 감은 채 백지한이 돌아오길 기다려도 오지 않자 채유하는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지 10분 정도 지난 참이었다. 어딜 갔는지 모르니 그가 언제 돌아올지 영 가늠이 되지 않았다. 왜 매번 나를 혼자 두냐고. 그를 찾는다고 돌아다니는 건 좋은 선택은 아닐 듯하고. 아까보다 나아진 몸상태가 느껴져 다시 바다에 발을 담글 때쯤, 제 곁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당연히 백지한일 거라 생각하고 고개를 들자 처음 보는 무리가 시선 안에 들어왔다. 누구, 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들은 먼저 말을 늘어놓았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혼자라면 같이 놀자는 등. 솔직히 그들이 뭐라 말하는지 들을 맘은 없었다. 관심도 없었고, 결코 성격 좋은 이들이 아니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채유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에 시선을 옮겼다. 제가 아무리 작은 덩치가 아니라고 해도 남자 둘에게 둘러 쌓인 상황을 빠져나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백지한이 올 때가 되었을텐데. 진짜 어디 간 거야…
"우리한테 집중 좀 해줄래?"
"저 일행 있어요."
"혼자면서 왜 거짓말을 해~"
그것도 당신들한테 아주 위험한 일행이요. 말한다고 알 리가 없겠지만. 차라리 지금 내가 거절할 때 가는 게 좋을텐데. 속으로 가만히 생각하는 탓에 말이 없어지자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남자 하나가 손을 뻗자 어디선가 콰르릉, 하고 번개가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가 왔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건 제게 말을 건 일행이었다. 인간을 죽이지 않겠지만,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만들지도 모르고.
"저, 지금 이제 가는 게 어때요…"
"왜? 설마 비 올까 봐 걱정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번개치는 소리를 그들도 들었는지 주변을 살펴보자 점차 그들에게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새삼 덩치가 크구나. 그 모습을 감탄하듯이 바라보는 새 백지한은 남성 중 하나의 팔을 잡은 채로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곧 나올 말과 행동이 예상되자 저는 급하게 그를 불렀다.
"백지한 씨!"
"나도 알아."
*
"다음에는 바다 말고, 다른 곳이나 가지. 괜한 녀석들이 꼬이잖아."
"매번 이렇지는 않다니까요."
"너, 방금 위험했어. 알아?"
"…그거야 알긴 아는데…"
"그리고…"
"네?"
"나만… 보고 싶은데, 안돼?"
"그건 매번 하는 소리… 아."
"어떻게든 바다가 좋으면 프라이빗 비치라도 알아볼게."
무력으로 해결할 줄 알았던 예상과 다르게 조용히 -그보다는 꽤 화난 얼굴이긴 했지만- 돌려보낸 채 해결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다사다난한 하루네. 날이 흐려진 상황에 더해 심기가 불편한 백지한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바다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면 호텔에서 푹 쉬어야겠다는 생각과 문득 떠오른 현실에 백지한의 옷깃을 살짝 쥐었다.
"아까 보니까 침대가 넓더라고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오늘은 왠지 같이 자도 될 것 같아서."
"…정말로?"
"정말이죠."
제 말의 의미를 생각하던 백지한이 눈이 커진 채로 되물었다. 저는 마지막 말과 함께 먼저 호텔로 뛰어 들어갔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비밀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