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렌은 항상 제 장점 중 하나로 ‘결과에 쉽게 후회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곤 했다.
썩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가 나왔더라도 결국은 자신이 선택한 거니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미 일어난 일에 후회하느니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게 더 효율적이며, 인생은 새옹지마라 지금은 나빠 보이는 결과가 궁극적으로는 잘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쉽게 후회하지 않는 게 좋다. 정말로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그 끝에 교훈을 얻어야 한다.
제 인생에 발생한 이벤트들을 의연하게 대처하려 하는 아이렌은 늘 이런 마음가짐으로 이세계 생활을 이어나갔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만큼은 달랐다.
‘하느님 부처님 아후라 마즈다님. 그리고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원래 세계에 있던 종교의 각종 신과 성인을 찾는 그는 지친 몸을 나무에 기대고 뻐근한 다리를 주물렀다. 사실상 무교인 주제에 뿌리도 다른 종교들을 중구난방으로 찾아대는 아이렌의 얼굴엔 땀이 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힘들어 보이는 모습을 외면할 수는 없는 걸까. 앞서 나가던 제이드는 조급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걸음으로 상대 옆에 다가가 섰다.
“이런, 아이렌 씨. 괜찮으십니까?”
“아뇨. 안 괜찮아요.”
“……놀랍군요, 아이렌 씨가 한 번에 ‘괜찮지 않다’라고 답을 하는 걸 처음 봤습니다.”
“진짜 안 괜찮으니까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은 아이렌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낯선 가을 숲에서 나는 식물들의 냄새가 섞인 공기는 분명 깨끗하고 맑았지만, 아이렌의 마음속에 싹튼 후회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자고 자신은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걸까. 아무리 캠핑이 재미있어 보였어도, 캠핑 장소가 산 중턱이라는 걸 알았다면 이리될 걸 예상하고 거절했어야지.
과거 제 선택을 후회하는 아이렌은 찬찬히 숨을 고르고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기력이 쇠한 상대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제이드는 사뭇 진지하게 한탄했다.
“그렇게 험한 코스도 아니었는데, 벌써 이렇게 지치시다니. 발가스 선생님이 알게 되시면 실망할 것 같군요.”
“실망하라고 해요. 제가 운동선수도 아니고 체력 좀 떨어진다고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건 ‘좀’이 아닌 듯한데요.”
아이렌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양심이라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맞는 말을 하는 자신을 원망하듯 흘겨보는 아이렌의 태도에 제이드는 결국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돌아가겠다던가 못 올라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그답지 않은가.
제이드는 어떻게든 버티고 이겨내기 위해 버티는 아이렌을 격려하듯 등을 토닥여주었다.
“자,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자꾸 쉬면 오히려 더 힘들어지니까요.”
“……이 소리, 등산 갔을 때 어른들이 꼭 하던데.”
“역시 어르신들은 지혜롭군요.”
저렇게 대꾸하는 게 정말이지 어르신이 따로 없다. 역시 이 선배는 17살이 아니라 27살, 아니 37살일지도 모른다.
아이렌은 속으로는 그리 구시렁거리면서도 얌전히 그를 따라 걸음을 떼었다.
“저 괜히 데려왔다는 생각은 안 하세요?”
“생각보다 더 산을 못 타셔서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 마세요.”
“……차라리 후회한다는 편이 나았을 거 같은 대답이네요.”
“후후.”
좀 장난스레 답하긴 했지만, 모처럼 단둘이 놀러 나왔는데 후회할 리가 있나. 제이드는 괜히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명확하게 한 번 더 답해주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먼저 권한 거 아닙니까. 같이 캠핑가고 싶다고.”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렌 씨가 이렇게 같이 와준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야외활동은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는데, 저를 위해 오신 것 아닙니까.”
아이렌은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정말 싫은 건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사소한 거절에 상처받을 사이도 아니지. 그런데도 굳이 함께하겠다고 한 거니, 어찌 걸음이 좀 느려지는 정도로 짜증을 내거나 후회를 하겠나.
제이드가 두 번이나 단호하게 괜찮다고 하자 아이렌도 안심이 된 걸까. 그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대로 맛있는 거 해주셔야 해요.”
“그럼요. 약속하겠습니다.”
이후 아이렌은 평지가 나올 때까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갔다. 중간중간 ‘죽겠네’ 같은 감탄사가 나오긴 했지만, 제이드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걷는 속도를 늦출 뿐 멈춰 서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 도착한 야영지에는 이미 자리 잡고 앉아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백패킹을 하느라 무거운 가방을 들고 올라온 두 사람은 얼른 남아있는 자리 중 가장 좋은 곳을 선점한 후 짐을 풀었다.
제이드보다 짐이 적어 더 빨리 가방을 정리한 아이렌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무 아래서 흥미로운 걸 발견하고 쪼그려 앉았다.
“어, 이거 쑥이네.”
“음?”
“이 풀 말이에요. 어릴 때 엄마랑 같이 캐러 다녀서 잘 알아요. 조금 뜯어둘까요? 쑥을 태우면 모기를 쫓을 수 있거든요.”
아이렌이 가리킨 것은 산을 오가면서 몇 번 본 적 있던 풀이었다. 식물에 관심이 많기에 그 이름과 마법적 효과 정도는 알고 있던 제이드였지만, 상대가 말해주는 처음 듣는 정보에 흥미가 생긴 그는 옆에 자리 잡고 앉아 귀를 기울였다.
“그냥 마법약 재료로 가끔 쓰이는 생명력 강한 잡초인 줄 알았는데, 그런 효과도 있었군요.”
“헤에. 이 세계에선 마법약 재료로 쓰이는구나. 제 고향에선 어린 순을 뜯어서 국에 넣거나 차로 마시기도 해요.”
이런 걸 먹는다고?
제이드는 영 믿기 힘들어 눈만 깜빡였지만, 곧 러기가 민들레도 먹을 수 있다고 알려준 사실을 떠올리고 의심을 거두었다.
“와, 달래도 있네. 이미 꽃이 펴서 못 먹으려나?”
“이것도 먹습니까?”
“네. 봄철에 뜯어서 나물로 많이 먹어요. 아, 그리고 저건…….”
몸이 덜 힘들어지자 주변을 인식할 여유가 생긴 건지, 아이렌은 계속해서 제가 아는 식물을 찾아내어 각종 TMI를 말해주었다. 진심으로 식물 이야기에 흥미가 가기도 하고 아이렌이 말해주는 건 뭐든 귀에 담아두고픈 제이드는 설명을 가만히 듣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전에 러기 씨가 산에서 캐온 식물들로 요리를 하는 법을 알려주긴 했습니다만, 아이렌 씨가 알려주는 건 다 처음 듣는 거군요.”
“그래요? 그러고 보니 제 고국 사람들은 별걸 다 채취해 먹는 민족이긴 했어요. 외국에선 거의 안 먹는 걸 용케도 먹는다던가. 예를 들어 서양에선……. 아니, 타국에선 도토리를 거의 안 먹는데 고국 사람들은 맛있게 먹는다는 걸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도토리를 먹는다고요?”
“예. 젤리 비슷한 걸로 만들어서 먹어요. 디저트 말고 식사용으로.”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애초에, 맛이 있을까?
그러나 아이렌이 굳이 제게 거짓말을 하거나 허풍을 떨 필요가 없으니, 이건 진실일 거다. 제 형제만큼이나 큰 호기심을 가진 제이드는 장난스럽게 속닥였다.
“맛있는 건 제가 아니라 아이렌 씨가 해주셔야 할 것 같군요.”
“요리법을 아는 건 아니니까 무리예요. 그리고 풀은 몰라도 버섯은 선배가 더 잘 알잖아요?”
“그건 그렇지요.”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선배보다 맛있는 밥을 하려면 5년 정도 틀어박혀 수련해야 할걸요?”
“이런, 과찬입니다.”
비록 체력은 안타까운 수준이지만, 말솜씨 하나는 참으로 근사하다. 그러나 그 점 또한 아이렌의 매력이지 않겠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제이드는 짐짓 신사처럼 손을 내밀었다.
“자리도 잡았으니 주변을 더 둘러보도록 하죠. 같이 보고 싶은 게 많습니다.”
“좋아요. 기대되네요.”
아이렌은 덥석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가방을 내려놓은 두 사람의 발걸음은 아까보다 훨씬 가벼웠다.